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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거 확보

by 이인철

연우와 지상은 '도로공사 속초 사무소'에 희망에 찬 얼굴로 들어갔다.

“당시에 시설 점검을 하느라 그 시간대의 영상이 삭제되었습니다.”

담당자의 말에 두 사람은 실망한 표정으로 사무소를 나왔다.

“사건이 점점 미궁 속으로 빠지니 마치 맨땅에 헤딩하는 기분이야.”

“미궁이란 해결할 방법도 있다는 것이 아닐까요?”

“그렇긴 하지. 막다른 골목보다는 나은 것 같아. 연우는 매사를 긍정적으로 생각하네.”

“저는 좀 낙천적인 편이죠. 선배님, 무작정 밀어붙여 볼까요?”

“그래. 까짓것 한번 해 보자.”

그들은 현관에서 다시 사무실로 올라갔다.

“복원이 가능할까요?”

“불가능합니다.”

“불가능은 우리가 판단할 테니, 일단 그 영상 파일을 주세요.”

“소용없을 거예요.”

담당자는 자리를 뜨려 했다.

“변호사님, 이분 상관에게 항의하고 우리의 정당한 요구를 거부하는 도로공사를 언론에 제보하죠.”

“그래. 〈그것이 알고 싶다〉, 〈추적 60분〉, 〈PD 수첩〉등에도 터트리자.”

연우의 반협박에 이어 지상이 압박하자 담당자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드, 드리겠습니다.”

파일을 받아낸 그들은 여러 업체에 복구를 의뢰했지만, 모두 불가능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전날 저녁, 도로공사 속초 사무소에서 수찬과 담당자가 밀담을 나누었다.

“그 정도는 어렵지 않죠. 가끔 그런 사고가 발생하곤 하니까요.”

“이건 보답으로….”

“아니, 이렇게 큰돈을!”

“비밀은 꼭 지켜야 합니다.”

“물론이죠.”


기대가 무너진 차 안의 공기는 차갑게 얼어붙었다.

“선배님, 백도진의 차는 어디에 있죠?”

“아마 폐차장에 있을 거야.”

“거기로 가볼까요?”

“왜? 뭐, 켕기는 거라도 있어?”

“상태의 말대로 운전을 교대했다면 운전석의 혈흔은 도진의 것이고, 조수석의 혈흔은 상태의 것이겠죠. 그 혈흔을 채취해 DNA 검사를 하면 운전자를 알 수 있어요.”

“맞아! 그러면 증거 능력이 있겠네. 역시 연우는 나의 빛과 소금이야. 근데 어떻게 그런 기발한 생각을 했어?”

“제가 공대생이잖아요. 유전학 수업을 듣고 피에 대해 좀 공부했거든요. 헤헤헤.”

외곽의 폐차장으로 가는 도중, 지상의 휴대폰이 울렸다.

“어디예요? 갔던 일은 잘 됐어요?”

그는 수진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CCTV 영상은 확보했대요?”

곁에 있던 세호가 은근슬쩍 물었다.

“당시 시설 점검으로 영상이 삭제된 것 같아. 글구 지금 폐차장으로 가고 있대.”

“왜요?”

“운전석과 조수석의 혈흔을 채취해서 DNA 대조를 하려고.”

수진이 수다를 떨자, 그는 슬그머니 밖으로 나가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그들이 폐차장에 도착했을 때, 도진의 차는 압축기에 눌려 납작해지고 있었다.

“앗! 멈춰요!”

지상이 비명을 질렀다.

순식간에 차량은 철판으로 변해 혈흔을 추출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사장이 태연하게 말했다.

“조금 전에 차주로부터 폐차하라는 연락이 왔어요.”

“그 수신 번호를 알 수 있을까요?”

“사무실 전화기에 입력되어 있을 거예요.”

그 번호는 바로 태양로펌의 전화번호였다.

쌍소리를 쏟아내는 지상에게 연우가 뭐라고 소곤거렸다.

“금방 폐차한 부품은 어디에 있나요?”

“부품은 왜요?”

“교통사고 사건으로 조사할 게 있어서요.”

“아이참.”

심드렁하던 사장은 지상이 건넨 변호사 명함을 보고 태도가 누그러졌다. 그가 가리킨 곳에는 폐차 부속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두 사람은 아연실색했다. 이 많은 부속품 중에서 어떻게 증거물을 찾는단 말인가! 이때 빗방울이 조금씩 떨어졌다. 그들은 부지런히 뒤지기 시작했다.

차츰 주변은 어두워져 갔다. 자동차 헤드라이트의 불빛은 밤이 깊어질수록 한계에 부딪혔다. 연우가 야식을 주문하고 사장에게 아부를 하자, 그는 포클레인에 전구를 달아 높이 올려주었다.

“이거 언제까지 해요?”

“찾을 때까지.”

새벽의 여명이 서서히 밝아오고 있었다. 연우는 오기가 생겨 웃통을 벗어젖혔다. 그의 상체에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하늘에 구멍이 뚫린 듯 비는 억세게 내리쳤다.

“찾았다!”

일시에 외침이 터져 나왔다. 두 사람의 얼굴에는 검은 기름방울이 흘러내리고, 옷은 너덜너덜해졌다. 마침내 그들이 손에 쥔 것은 주행기록계와 연료기록계였다.

“이제 정황 증거는 확보된 거야!”

지상은 승리를 거둔듯이 흥분했다.

“근데 좀 이상한 점이 있어요.”

“뭐가?”

“CCTV 영상이 사고 시간대에만 삭제되었고, 폐차장에 도착하자마자 도진의 차가 폐차된 것도… 누군가 미리 정보를 흘린 것 같아요. 선배님은 어떻게 생각하세요?”

“나도 그 점을 수상쩍게 여기고 있었어.”

지상은 잠시 침묵한 후에 말했다.

“연우야, 세호가 누구와 만나는지 알아봐.”

“네.”


세호는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기다리던 기탁이 손을 흔들었다. 밖에서 이 장면을 지켜보던 연우는 전화를 걸었다.

“선배님, 우리의 판단이 맞았어요.”

“우리만 아는 걸로 해. 상아와 하 변에게는 비밀로 하고. 내게 기막힌 작전이 있으니까.”

지상이 이렇게 행동하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들이 세호의 정체를 알게 되면 배신감에 분노할 것이고, 그러면 그를 이용한 역공작이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세호가 스파이라는 사실이 드러났으니, 빨리 대책을 세워야겠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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