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동장에 땅거미가 묽은 안개 퍼지듯 내리고 있었다.
“연우야, 농구 한 판 할래? 오늘은 한 팀이 아니라 적이야.”
“그래요. 근데 타이틀은 뭐죠?”
“짜장면.”
“에이, 탕수육이라면 몰라도.”
“좋아! 짜장 곱빼기로.”
지상은 주머니를 탈탈 털어 보이며 너스레를 떨었다.
“선배님, 이 시간에 배달이 될까요?”
“주인장이 그대로라면 내 이름을 대면 올 거야.”
곧 경기가 시작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연우는 지친 양 주저앉았다.
“제가 졌어요.”
“일부러 져주기도 쉽지 않지?”
그때 “짜장면 시키신 분~!”이라는 외침이 들려왔다.
"웬 달밤에 체조하는 거야. 그릇은 언제 찾아가라고."
배달원은 샐쭉거렸다. 두 사람은 서로 계산하려고 실랑이를 벌였다.
“가지가지한다. 얼마나 된다고. 사장님이 VIP 고객이라던데 진짜 개진상이네.”
결국 연우의 돈으로 지급은 일단락되었다.
“이걸로 상태 수임료와 퉁 친 겁니다.”
“뭐? 그렇게 깊은 뜻이 있었어?”
지상은 뒤통수를 맞은 듯 머리를 감싸 쥐었다.
“선배님, 우리가 이 재판에서 이길 수 있을까요?”
“장담은 못 해. 재판에 100%는 없으니까.”
“저희는 억울한 사람 편에 서 있는 거 맞죠? 정의의 편에 있는 거죠?”
“물론이지. 이 재판을 끝까지 지켜보자고. 정의가 누구 편으로 갈지.”
“정말 우리가 진실을 밝힐 수 있을까요?”
“진실은 밝히고자 하는 사람의 의지만큼 드러나게 마련이지.”
그들은 포장마차로 향했다.
“1차는 네가 냈으니까 여기는 내가 쏜다. 마음껏 시켜!”
지상이 허세를 부렸다. 두 사람은 잔을 부딪치고 단숨에 비웠다.
“역시 커피는 자판기 커피가, 술은 포장마차가 최고야. 취업 준비는 잘 되고?”
“그렇지요.”
“네가 도전한 회사가 도원그룹이라 했지? 우리는 신기하게도 도원과 인연이 깊네. 비록 나와는 악연이었지만. 애인은 있어?”
“네. 캠퍼스 커플이에요.”
어느새 연우는 대학 시절의 기억에 젖어들었다.
도서관이 만석이라 도희가 그의 자리에서 공부하고 있었다. 연우는 자리를 양보하고 소지품을 챙겨 밖으로 나왔다. 교정의 벤치에서 책을 보던 그에게 도희가 다가와 커피를 건넸다.
“아까 그쪽의 기사도 정신이 마음에 들었어요. 우리 오늘부터 사귀어 볼까요?”
연우는 그녀의 당돌함에 매력을 느꼈고, 외모도 멋졌다.
“와우! 그림이 좋은데?”
“선남선녀가 따로 없네.”
“연우야, 부럽당~”
친구들은 다정하게 데이트하는 두 사람을 축하해 주었다.
그때 그는 도희의 아버지를 도원그룹의 임원으로 알고 있었고, 도원에 입사하면 결혼하기로 묵시적인 약속이 오갔다.
어느 날, 연우는 원룸을 뛰쳐나왔다. 입구에는 깜찍한 쿠페가 주차되어 있었다.
“어디 가는 거야?”
“드라이브. 자기가 열심히 공부하는데 이 정도 서비스는 기본이지.”
“새벽부터 책을 봤더니 답답했는데, 땡큐!”
“그러게, 아빠의 백을 이용했으면 작년에 붙었잖아.”
“걱정하지 마. 이번에 장원급제로 당당히 입사할 거니까.”
“하여간 자기의 왕고집은 내가 못 당해.”
“달려라 도희야! 지구를 구하러!”
연우의 오버에 그녀는 힘차게 액셀을 밟았다.
“뭘 그렇게 생각해?”
즐거운 추억에 잠긴 그를 지상이 깨웠다.
“아, 연우의 질문에 아직 대답을 안 했네. 왜 검사를 그만두었냐고? 나, 검사 그만둔 걸 후회해.”
지상은 지갑에서 종이쪽지를 꺼냈다.
“매일 이것을 삼켜가며 공부만 했어. 그 문구가 뭔지 알아?”
“뭐예요?”
‘사시 합격까지 나의 하루하루는 죽었다.’
연우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왜 그렇게 놀라?”
“제가 도원 입사를 준비하면서 쓴 글과 똑같아서요. 역시 우리는 텔레파시가 통하는 것 같아요. 다른 점이 있다면 저는 먹지는 않았다는 거죠.”
“처음에는 좀 그렇지만 씹다 보면 나무 향도 음미하고 괜찮아.”
“그럼, 제가 전화번호부 책을 선물해 드릴까요?”
“뭐? 하하하.”
“선배님, 그렇게 힘들게 얻은 자리를 떠나신 이유가 뭔가요?”
지상은 즉답 대신 술잔에 한숨을 담아 마셨다.
“가난이 다시 발목을 잡았지.”
“네?”
“연우는 검사의 초봉이 얼마라고 생각해?”
“잘은 모르겠지만, 검사인데 꽤 괜찮지 않을까요?”
“검사는 특정직 공무원으로 부이사관 대우를 받아. 기본급은 300만 원이 안 되지만, 수당 등을 포함하면 400만 원이 넘지.”
“더구나 권력과 명예도 있는데, 왜요?”
“사시를 합격하자마자 집안의 기둥이던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나는 장남이고 동생이 세 명이지. 그때부터 가족의 생활비와 동생들을 책임져야 했어. 근데 검사 봉급으로는 이 모든 부담을 감당할 수가 없었어. 검사로 임용된 다음 해에 평범한 여성과 결혼했는데, 아내가 딸을 낳고 췌장암 판정을 받았어. 수술비와 항암 치료로 인해 빚이 눈덩이처럼 불어났지. 명색이 검사인데 어디 가서 하소연도 못 하겠더군. 그때 태양에서 억대 연봉을 제시하며 스카우트 제의가 왔어. 내가 수사를 잘해서 기소율이 높기로 유명했거든.”
지상은 자화자찬에 쑥스러워하며 말을 이어갔다.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지. 하지만 난 미래보다 현실이 더 중요했어.”
“미래라니요?”
“나는 청렴결백한 검사로서 검찰 고위직에 오르는 것이 목표였어. 학창 시절에 올림픽 금메달을 꿈꿨지만 이사장의 압력으로 좌절된 아픔이 있었거든. 그래서 정의를 파괴하는 자들을 응징하고 후배들의 버팀목이 되어주고 싶었어. 근데 그 자리는 사명감만으로는 힘들더라고.”
“왜요?”
“실제로 근무해보니 검찰 조직이 정치판 못지않게 학연, 지연 등의 연결고리가 단단한 거야. 나처럼 평민 출신에 인맥도 없는 사람은 성골, 진골 속에서 도약하기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기보다 어렵더라고.”
“정말요?”
“머리 좋은 엘리트들의 싸움이 더 치졸하고 비열한 법이지.”
“그렇군요.”
“연우는 판·검사가 누구에게 받는 뇌물이 안전하다고 생각해?”
“법의 집행자이므로 죄를 지은 사람에게…”
“아니야. 바로 변호사야.”
“네? 정말요?”
“그들만 눈을 감으면 아무도 알 수 없잖아. 서로의 이익을 충족시키는데 폭로해서 자폭할 이유가 없는 거지. 그리고 판·검사도 나중에 변호사로 전직하잖아. 우리나라에서는 전관예우라는 부패한 관습이 특히 심해. 그런데 이 전관예우는 법조계뿐만 아니라 모든 기관에 퍼져 있고, 이로 인해 대한민국의 비리가 확산되었다고 봐. 청문회를 보면 현직에서 물러난 후 불과 1~2년 만에 수십억 원을 벌었다는 데, 젊은 사람들이 그런 걸 보고 무엇을 배우겠어? 어떻게든 높은 자리로 올라가면 쉽게 돈을 벌 수 있다고 여길 거야. 나는 이런 전관예우와 관련된 비리자들에게 강력한 처벌이 내려져야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고 믿어. 그 외의 사람에게 받는 뇌물과 향응은 시한폭탄과 같아. 누가 자신의 피 같은 돈을 그냥 주겠어? 목적을 이루지 못하거나 불만이 생기면 터뜨릴 수 있지. 내게도 그런 유혹이 있었지만 단호히 거절했어.”
“왜요? 안전하다고 하셨잖아요?”
“나에게 가슴 아픈 기억이 있어서 그래. 비슷한 경우는 아니지만 그런 이유로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지 못했거든.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사람이 누구라고 생각해?”
“글쎄요.”
“악에 받친 착한 사람.”
연우는 그 의미를 이해했다.
“검사가 되면 내 꿈이 뭐였는지 알아?”
“뭔데요?”
“아버지께 손바닥만 한 땅이라도 사드리고, 품삯 일을 하는 엄마를 쉬게 하는 것이었어. 하지만 검사 봉급으로는 그게 어려운 거야. 그나마 그 꿈을 이룰 수 있는 곳이 로펌이었지.”
“그런 로펌을 왜 나왔어요?”
연우는 그가 무능력으로 해고된 것이라고 알았지만, 차마 표현할 수는 없었다.
“로펌에서의 일이 검사 때와는 완전히 다른 거야. 검사는 철저히 조사하고 법에 따라 처리하면 되지만, 변호사는 실체적 진실을 알고도 의뢰인을 위해 변호를 해야 해. 이 점이 내 스타일과 맞지 않았어. 그래서 의뢰인과의 마찰이 생기고 소송 패소율이 높아지더군. 로펌은 승소율로 변호사의 가치를 평가하는 곳이니까.”
“선배님 성격으로는 견디기 힘들었겠네요.”
“그렇지만 악착같이 버텼어. 내게만 의지하는 가족들 때문에 어쩔 수 없었어. 그러다 결정적인 사건으로 떠나게 되었지.”
“결정적인 사건이요?”
지상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이전에 도원 엔터테인먼트와 게임 벤처 기업 토이넷과 지식재산권 침해 소송이 있었어.”
“도원 엔터테인먼트는 도원그룹의 자회사잖아요.”
“맞아. 도원 엔터테인먼트가 자본을 대고 토이넷이 게임을 개발하기로 했던 거야. 즉, 원청과 하도급의 관계였지. 그 소송은 태양로펌이 맡았고, 그동안 도원 엔터테인먼트에게 횡포를 당했던 업체들이 토이넷을 위해 증인으로 나섰어. 이에 소송은 도원 엔터테인먼트에게 불리해져 패소가 불 보듯 뻔했지. 그때 태양에서 나에게 특명을 내렸어.”
“특명이라니요?”
“그 업체들을 회유하고 매수하는 역할을 맡은 거야. 무능한 내게 뒤치다꺼리 일감을 줬다고 해야겠지.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이 뭔지 알아?”
“뭐죠?”
“부끄러움과 죄책감을 느낀다는 거야. 근데 그것들도 현실 앞에서는 철면피가 되더군."
“그래서 했나요?”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할 수밖에 없었어. 당장 아내의 병원비와 동생들의 학비가 필요했거든. 결국 나는 악마가 되고 말았지.”
“그럼 소송은 어떻게 됐나요?”
“증언하기로 한 업체들도 토이넷과 같은 하청 관계였기에 계약 해지를 압박하여 막았어. 그 결과 도원 엔터테인먼트의 승소로 끝났지. 그런데….”
지상은 눈시울이 붉어졌다.
“또 어떤 일이 있었나요?”
“마땅히 승소할 것이라고 믿었던 토이넷 대표가 억울함을 토로하며 유서를 남기고 투신자살한 거야. 내가 그 사람을 죽인 거나 마찬가지야.”
흑흑, 그는 숨죽여 울었다.
“선배님이 말씀하신 죄책감이 바로 그거였군요. 사실 저도 상태에게 씻을 수 없는 죄책감이 있어요. 그것도 두 번이나.”
연우는 중고등학교 시절의 사건을 털어놨다.
“이제야 네가 상태의 일에 적극적으로 나선 이유를 알겠구나. 우리 둘 다 죄책감의 굴레에 갇혀 있다는 게 공통이네.”
“그럼 제가 이 죄책감에서 벗어나는 길은 뭘까요?”
“이 사건의 진실을 밝히는 것이 아닐까? 나도 마찬가지고.”
“근데 선배님의 얘기를 듣고 나니 걱정되는 점이 있어요.”
“뭐가?”
“이전에 토이넷 소송에서 태양이 증인들을 회유와 매수했다면, 이번에도 그럴 수가 있겠네요.”
“분명 시도할 거야. 이미 끝났을 수도 있어.”
“그럼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죠?”
“더 큰 문제는 증인만이 아니라는 거야. 이 사건이 어떤 재판으로 열리지?.”
“설마 배심원들까지?”
“태양이라면 그러고도 남지.”
“정말 큰일이네요.”
“연우야, 내 말을 잘 들어. 만약 네가 배심원으로 선정된다면….”
고개를 끄덕이는 연우의 모습이 천막 밖에서 검은 실루엣으로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