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진과 세호는 꾸벅꾸벅 졸고, 상아는 우울한 표정으로 창밖을 바라보았다.
지상이 운전하는 연우의 허리를 툭 쳤다. 이어 '학교'라는 입 모양을 만들고 술 마시는 시늉을 했다. 상아를 시작으로 한 명씩 내리며, 차는 모교를 향해 달렸다.
종강이 가까워졌는지 교정은 한산했다. 텅 빈 운동장 스탠드에 앉아 있는 두 사람은 외로워 보였다.
“연우야, 너와 난 전생에 부부였나 봐.”
“네?”
“우리는 시합 때마다 한 팀이었잖아.”
“그렇네요. 미리 짠 것도 아닌데요. 근데 선배님이 우리 동아리를 만들었다고 들었어요. 스타드림이라는 이름도 지으셨고요. 그 이름에 어떤 의미가 있나요?”
“별의 꿈이라…. 나는 시골 출신이야. 그것도 깡촌이지. 학교도 먼 읍내로 다녔고, 집에 돌아오면 친구도 없었어. 다행히 밤하늘의 별들이 나의 말벗이 되어주었지. 그래서 그 이름을 지었는지도 모르겠어.”
“선배님, 하나만 여쭤봐도 될까요?”
“그래.”
“그렇게 잘 나가던 검사를 그만두신 이유라도?”
“나는 빈농의 맏이로 태어났어. 무지한 아버지는 소작농으로 살았고, 엄마는 이웃의 품삯으로 우리를 키웠지. 그러나 나는 꿈이 있었기에 모든 것을 견뎌냈어.”
“그 꿈이 뭐였나요?”
“금, 메, 달.”
“네?”
“난 태권도를 좋아했어. 초등학생 때부터 수업이 끝나면 태권도장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지. 내 목표는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이었어. 그 포상금을 엄마에게 드리려고 했거든. 하지만 그 꿈은 이루어지지 않았어.”
“왜요?”
“가난 때문에.”
어느새 지상은 고교 시절로 돌아갔다.
체육관 입구에는 ‘춘천 시장기 태권도 대회’라는 현수막이 펄럭이고 있었다.
실내는 각 학교를 응원하는 열기로 뜨거웠다. 지상과 상대 선수의 대련이 시작되었고, 몇 번의 몸동작이 오간 후 상대 선수가 그의 옆차기에 쓰러졌다. 심판이 껑충껑충 뛰는 지상의 팔을 높이 쳐들었다.
그는 연속으로 시합에서 승리했다. 패배한 선수 중에는 같은 학교의 상구도 있었다. 금메달을 목에 걸고 시상대에 오른 지상의 얼굴은 마치 세계를 다 제패한 듯했다.
태권도실에서 땀범벅으로 훈련 중인 지상에게 친구가 소리쳤다.
“코치님이 부르셔!”
그는 등나무 벤치에 앉아 있는 코치에게 달려갔다.
“지상아, 내 말을 오해하지 말고 들어라.”
“뭔데요?”
“이번 전국체전 강원도 예선 대회에 상구가 우리 학교 대표로 출전할 거야.”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학교의 결정을 따르도록 해라. 정말 미안하다.”
코치는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상구는 저를 한 번도 이긴 적이 없어요. 코치님도 잘 아시잖아요? 근데 상구가 대표로 나간다는 게 말이 되나요?”
“나도 알지만, 교장 선생님이 그렇게 결정하셔서….”
“이럴 수는 없어요! 교장 선생님께 말씀드리겠어요.”
“그래도 소용없을 거야.”
“아니에요. 이건 정말 아니란 말이에요!”
지상은 교장실로 뛰어갔다. 노크와 동시에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섰다. 깜짝 놀란 교장은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뭔가? 지상 학생은 예의가 없구먼.”
“죄송합니다.”
“찾아온 용건은?”
“이번 전국체전 강원도 예선 대회에 우리 학교 대표로 김상구가 출전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래서 뭐가 문제야?”
“교장 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저는 상구와의 시합에서 단 한 번도 진 적이 없습니다. 당연히 승자인 제가 나가는 것이 원칙 아닙니까?”
“이사회와 교무회의에서 이미 끝난 사항이야. 학생이라면 선생님들이 내린 결정을 겸허히 받아들여야지 토를 달면 쓰나? 그렇게 알고 돌아가게!”
차가운 말이 떨어졌다.
“상구가 학교 이사장님의 아들이라서 그런 겁니까?”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제 말이 틀렸습니까?”
“어, 어. 이 학생이?”
지상이 반발하자 교장은 당황한 기색을 보였다. 결국 그는 무릎을 꿇고 간청하기 시작했다.
“교장 선생님, 다시 한 번 심사해 주세요. 제발 부탁드립니다.”
“지상 학생은 내년에 출전하면 되잖아?”
“저, 내년에 졸업입니다.”
“그, 그런가?”
“저는 내일도 중요하지만 오늘이 더 소중하다고 생각합니다.”
지상은 교장실을 나서며 문을 쾅 닫았다.
“저, 저, 버르장머리 하고는. 이래서 가정교육이 필요한 거야!”
교장의 고성이 밖까지 울려 퍼졌다.
교실로 가던 그는 복도에서 상구와 마주쳤다. 지상은 증오의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지만, 상구는 비웃으며 지나쳤다. 그가 할 수 있는 보복은 그것뿐이었다.
교문을 나선 지상의 축 처진 어깨 위로 세찬 비가 쏟아졌다. 얼굴에 눈물과 빗물이 섞여 흐르고, 귓가에 코치의 음성이 맴돌았다.
“우리 학교가 사립이라 이사장의 힘이 절대적이잖아. 몇몇 선생님이 반대했는데 이사장님이 자리까지 들먹이면서…. 나도 부양가족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단다.”
불끈 쥔 주먹에 돋은 푸른 힘줄이 섬뜩하게 보였다.
집에 돌아온 지상은 비에 흠뻑 젖은 책가방을 툇마루에 던졌다. 아버지는 나갈 채비를 하고, 엄마는 이미 알고 있는지 아들의 눈치를 살폈다.
“나 논에 간다.”
“다녀오세요.”
자식 일에는 관심이 없는 무뚝뚝한 아버지였다. 지상은 인사를 하고 나서 괜히 엄마에게 화풀이를 돌렸다.
“우리 집은 왜 이렇게 가난한 거야. 아버지는 내가 대회에 못 나가는 걸 알기나 해!”
“아셔….”
“엄마, 내가 상구를 죽을 만큼 패면 아버지가 소작하는 논을 조합장인 상구 아버지가 빼앗겠지? 그치? 상구네 땅이니까.”
“...”
엄마는 말이 없다.
“그럼 난 아무것도 할 수가 없네.”
지상은 터벅터벅 대문을 나섰다. 그의 뒷모습을 보며 엄마는 주르륵 눈물을 흘렸다.
두 사람은 둑방에 앉았다.
“철구야. 나는 선발전도 올림픽도 나갈 수가 없어. 왠지 알아? 우리 집은 돈도 백도 쥐뿔도 없거든. 하지만 난, 죽어도 이런 일을 두 번 다시는 겪지 않을 거야.”
지상이 소리쳤다.
“야! 우리나라에서 대통령을 제외하고 가장 힘이 센 사람이 누구냐?”
“어? 그, 그러니까… 어른들 말로는 판·검사가 세다고 하더라.”
“그래? 두고 봐! 나는 이제부터 내 꿈을 짓밟은 놈들보다 더 힘센 사람이 될 거다.”
별이 빛나는 밤, 야산에 모닥불이 타오르고 있었다. 지상은 눈물에 젖은 검은 띠와 도복을 불 위로 던졌다. 그리고 타는 옷가지를 바라보며 핏대를 세웠다.
“난 결코 이 일을 잊지 않을 거야. 아버지처럼 살지 않을 거야. 반드시 이 가난의 대물림을 끊을 거야. 별아, 약속할게.”
이때, 별똥별 하나가 긴 꼬리를 그리며 머리 위로 떨어졌다. 마치 그의 마음을 위로하듯이.
“지상이 학교를 자퇴했다며?”
“검정고시를 본다고 하던데?”
“운동만 하던 지상이에게 쉽지 않을 거야.”
“아니야. 내가 지상이랑 초등학교 동창이잖아. 그때 걔 공부 잘했어.”
“하긴 운동하면서도 중위권을 유지한 건 지상이뿐이지.”
“맞아. 운동만큼 공부한다면 충분할 거야. 그놈 악바리잖아.”
가방을 멘 지상이 검정고시 학원으로 들어갔다. 강의가 끝난 후, 칠판을 지우고 분필 가루를 마시며 지우개를털었다. 수강료를 면제받기 위해 근로 장학생을 하는 것이다.
비좁은 사무실 벽에는 ‘사시 합격까지 나의 하루하루는 죽었다’는 문구가 붙어 있었다. 한 학생이 창문을 두드리자, 지상은 돈을 받고 영수증을 끊어주었다. 숙식을 해결하기 위해 독서실 총무를 하는 것이다..
책갈피에 코피가 떨어졌다. 얼른 화장실에서 닦고 나오니, 사무실 앞에 누군가 서 있었다. 고향에서 올라온 엄마였다. 양손에 쥔 보따리가 유난히 무거워 보였다.
두 사람은 근처 놀이터로 갔다.
“엄마, 그동안 잘 지내셨어요?”
“이놈의 자식! 살았는지 죽었는지 연락은 해야 할 거 아냐? 아버지가 얼마나 걱정하는지 알아? 너 이래서 판·검사가 되면 뭐 하려고!”
“판·검사가 되면 뭐 하냐고? 그럼 나도 아버지처럼 만날 굽신거리며 살아야 하나?”
“지금 그 얘기가 왜 나와? 최종 발표까지 시간이 있으니 집에 한번 오거라.”
“안 간다.”
“뭐라고?”
“내가 거길 왜 가는데?”
“이 녀석, 말하는 버릇 좀 보소.”
“합격 통지서 받기 전까지는 절대 안 내려간다.”
엄마의 꾸지람에도 그의 대답은 확고했다.
“아이고, 이놈아. 엄마 아버지가 너를 이렇게 가르쳤냐?”
“엄마는 아직도 모르겠어? 그렇게 당하고 서럽게 살아왔으면서. 힘이 없으면 죽는 거야!”
지상은 벤치를 꽝 쳤다.
“그래, 나는 무식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사람으로의 도리는 지켜야 해. 요즘 아버지가 편찮으셔.”
엄마는 훌쩍이며 놀이터를 나갔다. 그는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평생을 짓밟히며 살아왔는데… 얼어 죽을 사람의 도리가 무슨 소용이야.”
지상은 컵라면을 먹고 있었다.
“강 총무!”
요란한 소리에 그는 사레가 걸려 캑캑거렸다. 인상이 후덕한 주인아저씨였다.
“사법고시 합격을 축하해. 강 총무, 아니 이제는 영감님이라고 불러야겠네. 영감님~”
아저씨는 합격자 발표가 실린 신문을 건네며 아첨을 떨었다.
‘드디어 신분 상승의 사다리를 움켜잡았어. 이걸로 내 운명을 송두리째 바꿀 거야.’
가슴이 벅차올라 눈물이 났다. 그러나 ‘인생지사(人生之事) 새옹지마(塞翁之馬)’라고 했던가! 그때 휴대폰이 울리더니 여동생의 흐느낌이 들려왔다.
“오빠, 아버지가 돌아가셨어.”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아! 어찌 신은 이렇게 가혹할 수 있는가! 한평생 소작농으로 살았다가 이제야 사람답게 살 기회가 왔는데… 왜 그것조차 허락하지 않는단 말이야!’
아버지의 장례식 날, 매서운 칼바람이 불었다. 그럼에도 어떻게 나의 사시 합격을 알았는지 군수와 면장이 조문을 왔다. 심지어 고등학교 이사장과 교장도 면상을 비췄다. 평소에 왕래가 없던 친척들까지 와서 문상객들로 북적였다.
‘정승 집 개가 죽으면 문전성시를 이루지만, 정작 정승이 죽으면 아무도 얼씬거리지 않는다.’
지상은 이 속담을 떠올리며 씁쓸한 기분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