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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판준비기일의 위기

by 이인철

상태는 면회실의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빠, 몸은 괜찮아?”

“응.”

“상태와 이야기할 게 있으니, 너는 나가 있거라.”

“왜요?”

“나가 있으래도!”

만복의 호통에 그녀는 마지못해 나갔다.

“상태야, 네가 운전했든 안 했든 무조건 운전했다고 해라.”

“제가 운전하지 않았는데 어떻게 했다고 해요? 저는 분명히 도진이와 운전을 교대했어요.”

그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네가 조금만 참으면 회장님이 우리 가족을 책임져 주신대. 또 검찰과 법원에도 손을 쓰고 훌륭한 도원 변호사가 도와줄 테니 곧 나올 수 있을 거야.”

“그래도 저는 안 했는데….”

“그리고 회장님께서 너희에게 좋은 일자리와 결혼, 집도 마련해 주겠다고 약속하셨어. 세상에 우리를 이렇게 배려해 주는 분이 어디 있겠니?”

“정말요?”

“응. 상아를 위해서라도 그렇게 해다오.”

자신보다 여동생을 더 걱정하는 상태는 마음이 흔들렸다. 이윽고 그는 결심을 굳혔다.

“아버지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고맙구나. 이 일은 우리만 알고 상아에게는 비밀로 해라.”

“네.”


첫 공판 준비 기일이 열렸다. 공판 준비는 차후 재판이 효율적으로 진행되도록 검찰과 변호인이 쟁점 사항을 논의하는 절차로 판사실에서 이루어진다. 보통은 검사와 변호인이 참석하며 피고인은 출석할 의무가 없다. 그런데 상태는 참석하겠다고 했다. 지상은 그가 자신에게 유리한 진술을 할 것이라고 예상했지만,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첫 공판 준비를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오늘 피고인은 출석할 필요가 없는데 굳이 나온 까닭이 있나요?”

“사실은…. 제가 운전했습니다.”

“지금까지 피고인은 범행을 부인하다가 갑자기 시인하는 이유가 뭔가요?”

“겁이 나서….”

“그렇다면 피고인은 검찰의 공소사실을 모두 인정한다는 건가요?”

“네.”

“재판장님, 잠시만요.”

“변호인, 뭐 할 말이 있어요?”

“그, 그게 아니라….”

지상은 어이없어 말문이 막혔다.

“피고인의 자백으로 국민참여재판의 요건이 사라졌으니, 다음 주에 결심 공판을 진행하겠습니다.”

“네!”

석낙은 웬 횡재라는 듯 우렁차게 대답했다. 이 소식은 곧 태양과 도원에게 전해졌고, 그들은 어부지리의 상황에도 불구하고 공적 분배 문제로 시끌벅적했다.

지상은 힘없이 판사실을 나서며 중얼거렸다.

“불 꺼달라고 했더니 기름을 붓는 격이네.”

그때 휴대폰이 울렸다.

“강 선배! 우리 변호인에서 해임됐어. 법원에 갔더니 도원 변호사가 상태의 변호인으로 선임됐더라고. 어, 어떡하지?”

“호들갑 떨지 마. 그 일은 여기 난리에 비하면 새 발의 피야.”

“그게 무슨 말이야?”

“우리 의뢰인이 자기가 운전했다고 자백했어. 그러니 용 쓸 필요 없어. 이미 종이 쳤으니까.”

“뭐라고? 지금 어디야? 바로 갈게.”

“오든지 말든지.”

지상은 혼잣말을 했다.

“참, 돌아가면서 돌게 하네.”


수진은 접견실로 총알처럼 달려갔다.

“어떻게 된 거예요?”

그녀의 질문에 상태는 말없이 고개를 숙였다. 지상이 부드럽게 말을 꺼냈다.

“지금껏 무죄를 주장하다가 갑자기 마음이 바뀐 이유라도 있나요?”

“….”

“다시 물어볼게요. 정말 상태 씨가 운전했나요?”

“...네.”

“어쩔 수 없군요. 그럼 새로 선임된 변호인이 도원 변호사라는 건 알고 있죠?”

“네.”

“그 변호인은 누구에게 급여를 받으며 일할까요? 바로 도원그룹입니다. 과연 당신을 위해 변론해 줄까요?” “그, 그건….”

“결코 아닙니다. 이제 좀 이해가 되나요?”

“상태 씨! 바보천치예요? 그걸 수락하면 어떡해요!”

수진은 화가 나서 소리쳤다.

“당신에게 그럴 만한 사정이 있겠지만, 마지막으로 묻겠습니다. 아직도 자신은 무죄라고 주장하나요?”

“….”

“그렇다면 그 사람들에게 절대 변호를 맡겨서는 안 됩니다. 물론 결정은 의뢰인의 몫이지만요.”

상태는 입술을 파르르 떨며, 결심한 듯 말했다.

“그래도 아버지의 뜻을 따르겠어요.”

그들은 안타깝지만,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스스로 범인이라고 하는데,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구치소의 콘크리트 담장은 지상의 눈에는 철벽처럼 느껴졌다.


상아는 이 상황을 수진에게 듣고 즉시 면회를 갔다.

“오빠, 미쳤어? 왜 하지 않은 일을 뒤집어쓰고 있어? 아빠가 시킨 거야?”

“그, 그게….”

“이 손을 봐.”

그녀는 손을 펼쳐 상태의 눈앞에 내밀었다. 손바닥에는 날카로운 물체에 베인 상처의 흔적이 있었다.

“그 상처는 네가 음식을 만들다가….”

“아니야. 사실은 고등학생 때 도진 오빠가 나를 겁탈하려 했어. 그때 내 손을 이렇게 하면서까지 저항한 거야.”

“진, 진짜야? 도진이가 널 강간하려 했었다고? 그래서 자해한 거야?”

상태는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그런 놈 때문에 오빠가 왜 죄인이 되어야 하냐고!”

“아버지도 알고 있어?”

“아니, 모르셔. 알면 속상할 테니까.”

상아는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도진이 이 개자식….”

상태의 동공에 서슬 퍼런 핏줄이 치솟았다.

그녀는 접견을 마치자마자 만복에게 달려갔다.

“아버지는 무고한 오빠에게 왜 죄를 뒤집어 쓰라고 해요? 그러고도 아버지라고 할 수 있어요!”

“상태가 조금만 고생하면 회장님께서 너희를 보살펴 준다고… 보다시피 나는 능력이 없잖니.”

“저희는 그런 도움 필요 없어요! 아버지도 할 만큼 하셨어요. 집사가 아니라 왕처럼 받들며 종처럼 일했지요. 우리에게 언제 신경을 쓴 적이 있어요? 오로지 회장님 가족을 위해서만 살았잖아요!”

상아는 과거의 아픈 기억 속으로 빠져들었다.


초등학교 문구점 처마 아래에서 도진과 도희가 비를 피하고 있었다. 멀리서 만복이 절뚝거리며 뛰어왔다.

두 사람의 머리 위로 우산을 받쳐 든 만복이 힘겹게 걸어갔다. 이 모습을 상태와 상아가 비를 맞으며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다.

고등학생 시절, 끔찍한 사건이 발생했다. 도진은 정원을 지나 반지하 방으로 숨어들었고, 살며시 방문을 열어 낮잠을 자던 상아를 덮쳤다. 저택에는 아무도 없었고, 그녀의 비명은 허공에 메아리쳤다. 블라우스는 찢어졌고, 상아의 거센 저항은 도진의 힘에 짓눌렸다.

그녀는 숨이 막혔지만, 필사적으로 벗어나서 책상 위의 커터칼로 자신의 손바닥을 홱 그었다. 피가 쏟아져 내렸다.

그때, 밖에서 돌아온 만복이 창문을 통해 이 광경을 목격했다. 그는 우물쭈물하며 헛기침을 반복했다. 그 소리에 놀란 도진은 반나체로 도망쳤다.

“아빠, 우리 이사 가면 안 돼요?”

“오늘 일은 너와 나만의 비밀이다.”

애원하는 그녀에게 만복의 냉정한 한마디가 떨어졌다.

방바닥에는 피가 흥건했다.


“아버지는 예나 지금이나 어쩌면 똑같아요? 전에 도진에게 겁탈당했을 때, 아버지가 딸을 위해서 한 게 고작 헛기침밖에 더 있어요? 그런데 이제 오빠까지 전과자로 만들려고 해요? 아버지는 사람도 아니에요!”

상아는 원망을 퍼부었다.

“오빠는 결백하다며 인정할 수 없다고 했어요. 또 도원 변호인 선임도 취소했다고요. 그러니 더 이상 오빠를 괴롭히지 마세요!”

만복은 눈만 끔뻑일 뿐 묵묵부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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