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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위공 Oct 13. 2021

가족

가족의 힘

충격이었다.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는 처참하게 불난, 흉물스러운 건물이 언제라도 

무너질 것 같이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었다.

그 자리에서 큰누나가 위태롭게 들락날락하며 내가 오기를 기다리는 중이었다.

그리고 딸 희정이에게 삼촌한테 연락을 하라고 했던 것이다.

어쨌든 누나를 만나러 밀양으로 기차 타고 가면서 창밖을 보니,

풍경과 함께 누나의 고단하고 힘들었던 과거가 스케치되었다.

도착해서 불난 집과 누나가 기거하는 방을 보니, 한마디로 참담했다.

그게다 누나가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자위수단으로 쇠꼬챙이와 

낫 2자루를 잠자리에 함께 꼭 쥐고 있는 모습에 더 아연실색이다.

날씨도 6월 초순으로 초여름이지만, 낮에는 햇빛이 따가운 불볕이다.

누나와 나는 처음으로 그렇게 만났다.

밀양 상동 금산마을에서 전원생활하던 중에 갑자기 불이 났다고 한다.

조립식 패널 집에 불이 붙었다.  집은 모두 전소되었고 누난 다행히

빠져나와 목숨을 건졌다. 

누가 불을 냈는지 모르는 상황에서 누나는 방화라고 주장했다.

또 다른 말로는 누나가 작은 누나를 내쫓기 위해 일부러 불을 저질렀다 

는 이야기도 있고 한편으로는 누나가 치매끼가 있어 실화였을 수도

있다는 얘기가 주변에서 들린다. 즉, 심증은 있어도 물증은 없다.

내게 이런 자세한 이야기를 해주는 사람은 조카 희정이다.

희정이는 큰누나 딸로 총명하고 성실하며 정직하다.

몇 년 전에 유방암 수술을 받고 잘 치유하는 중이다. 

새해에나, 명절에 꼭 안부 전화를 빠뜨리지 않고 연락을 준다.

그런데 “삼촌 엄마가 찾아요, 전화를 한번 해보세요”라고 했다.

사실 큰누나와 연락은 그동안 거의 두절 상태였다.

일본으로 돈 벌러 가고 희정이가 집안 살림 다 맡아 가족들 모두

챙기며 힘든 생활할 때, 내가 수시로 기장에 갔지만 누나의 소식은

못 듣고 누나가 일본에서 나왔을 때, 잠시 보았을 뿐 그 뒤로 또다시

수년간 못 보고 연락도 안되었던 게 여태껏 이어졌던 것이다.

어쨌든 희정이가 삼촌인 내게 엄마가 찾는다고 연락했기에

일단, 누나를 충격을 받은 상태에서 안정을 취하게 하고 복구작업을 

문현동 형과 함께 시작했다.

복구작업이 시작되면서 누나의 집요하고 주관적인 모습을 보고 힘들다는 

생각이 들었고 실제로 내가 업체며, 누나를 이해시키는 데 상당히 힘들었다.

또한, 누나와 자식들 간의 불화와 갈등도 있었고, 그 가운데 내가 위치하기가

참 난감했다. 그래도 일단 복구와 누나 생활을 안정적인 상태로 만들었다.

일이 어느 정도 마무리되니 이번에는 누나 노후생활에 대한 가족들 간 불협화음이 

터지고 아들 내외는 계산적이고 누나에게 아무런 방법을 제시 못한 상태에서

딸인 희정이가 그래도 엄마를 수시로 챙겼다.

희정이는 암과 투병생활을 하는 가운데 엄마를 챙겨 참으로 기특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누나는 가족과의 마찰은 늘 희정이에게 해결을 원하고

희정이는 엄청 힘들어하며 삼촌인 내게 도움을 청했던 것이었다.

결국엔 내가 도와주는 것으로 해결이 어느 정도 되었지만, 부모 자식 간의

문제에 대해서는 나서기가 뭐했고 이 일을 언제까지나 해야 하나 나로서도

참 난감했었다. 

밀양 생활을 정리하고 부산에서 생활하기로 누나가 정하면서도 말이 

많았고 믿음이 가는 행동을 보여주지 못했다.

그런 가운데 속에서 누나는 자서전까지 작성하자고 했다.

그러자 대뜸 희정이가 말했다. “엄마가 유명인사도 아니면서~”

누나가 머쓱한 표정을 짓자, 내가 말했다. “엄마가 한이 많은가 보다”

그제야 누나는 과거 이야기를 한참 끄집어내며 주접을 떨었다.


자존심

만약에 누나 자서전 작성을 한다고 하더라도 그렇다.

오히려 주인공이 바뀐 것이다. 누나가 아닌 희정이가 자서전 주인공으로

적합했다. 누나가 주인공이 되어야 할 경우 제목이 수정되어야 할 것이다.

그래서 누나 자서전이 아니라 그냥 자존심이라고 제목이 바뀌어야 생각이 

들었다. 이제 부산생활인데, 자식들 간 돈문제로 감정싸움이 일어났다.

누나가 돈싸움을 시켰으니, 결국 결자해지라고 싸움을 벌이는 것도, 싸움을 

말리는 것도 누나의 몫이다.

며느리가 돈을 요구하고 누나가 달맞이 집에 들어가는데 희정이더러

4천만 원 송금하라고 해서 송금을 했다.

암과 투병 중인 희정이에게 모두들 가혹한 짓을 벌였다.

엄마의 억센 일생이 고스란히 딸에게 고통으로 전했다.

첫째, 누나가 밀양 집을 며느리 명의로 해놓고 불이 나자 그 뒤처리를

수영이에게 요구한 것이 누나의 잘못이고, 자신이 죽으면 제사는 아들이

지내야 한다면서 진작 아들에게는 일절 할 일을 회피시킨다.

결국, 희정이가 차속에서 불편했던 속을 얘기했다.

“엄마가 일본에서 무슨 짓을 했는지 모르겠다”라고 하자, 누나가

“내가 호 양년 짓을 했냐, 잡년 짓 했냐 응? 야 이년아! 내가 

너를 낳아준 엄마야! 저년이 제고모와 똑같이 닮았어!”라고 고함을 질러 댔다.

둘째, 아무리 감정이 상했어도 그렇게 자식에게 막말은 해선 안 되는 것이다.

희정이는 충격을 받은 듯, 한동안 침묵으로 일관했다.

엄마와 헤어진 후, 다시 내게 카톡으로 “삼촌 나 이제 엄마와 인연을 

끊겠어요”라고 왔는데, 그 이후에는 일절 누나의 전화를 안 받았다.

이는 내 역할이 징검다리로 희정이 카톡 내용을 누나에게 전달하고

누나의 요구사항을 희정이에게 전하니 딱 그렇게 되었다.

만나서 싸울 때는 중재자로, 하소연할 때는 고충상담원이 되기도 했다.

그런데 희정이가 내게 진실을 말하면서 그동안 삼촌이 힘들어하고 

엄마도 사실 오빠 부부의 일을 삼촌에게 미루고 있는 사실을 확인했다며

이제 삼촌도 할 일을 다했고 엄마일에 손 떼라고 했다.

나 역시 눈치를 챘고 좀 고민을 하던 차에 누나에게 말했다.

그러자 누나는 희정이에게 했던 것처럼 내게도 고함치며 이성을 잃어버린 

것 같아서 내가 전화를 끊고 고민을 했다.

누나의 일생이 한순간 그려지며, 누나는 오로지 먹고사는 것만 최우선

이지, 딴 문제는 아예, 생각지도 않는 것 같다.

노년에는 고독과 친해지고 자제도 해야 어른 대접을 받는 것인데,

자신의 고집과 아집은 결국 모든 사람들이 외면할 수밖에 없다.

밀양에서 복구 작업을 하면서 수시로 누나와 지난 이야기를 많이

했는데 내가 보관하고 있는 ‘엄마 편지’를 누나에게 보여 줬고 

직접 읽어 줬었다.


어머니 편지

‘어머니 편지’는 작은 누나가 가족들에게 애를 한참 먹일 때, 어머니께서 

내가 아들만 낳고 딸들은 낳지 말았어야 되는데 하시면서 내게 받아

적어라고 하였다. 그때가 어머니 73세 때였다.



잘 읽어 보아라. 내가 벌써부터 생각해온 것을 이제 말하겠다.

그전에는 전부 자식들이 스스로 잘 살아갈 것이라 생각했는데,

사는 모습이 기대에 못 미치는구나. 그래서, 내가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상세히 말하겠다. 물론, 내가 지나온 것에 대해 대충이야 알겠지만 

온갖 어려움을 헤쳐 나온 이야기를 너희들은 상상도 못 할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내가 죽고 나서 내가 겪었던 일부라도 깊이 새겨

항상 어려운 일을 헤쳐 나가도록 하여라.

내가 처녀 일 때까지 부모님 밑에서 호강만 하다 보니,

물에 손 담그는 일조차 안 해볼 정도로 일이라고는 몰랐고 또

생각조차 못했다. 그런데 부모님께서 내가 몸이 약하다고 빨리 시집을 

보내기로 했었다. 물론, 딸 허락도 안 받고 무조건 날짜를 잡아 그것도

멀리 일본으로 보내기로 했단다. 내 나이가 16살 일 때, 결혼식은 6월 

22일 올렸다. 나이가 너무 어려 위안부를 내어주지 않아, 1년이 지나

17살에 일본으로 시집을 들어갔다. 부모님도 물론 형제, 친척들도 볼 수가

없는 데다 글도 모르고 말도 통하지도 않는 일본 땅에 살아갈 것을

생각하니, 눈물만 나는 게 아니라 죽고만 싶었다.

거기에다 홀 시아버지 한분, 신랑이 22살, 큰 시동생이 17살, 둘째 시동생이 

14살, 시누가 12살, 화명동 막내 시동생이 7살이었다.

그리고 이불이 각각 2채씩 모두 14 채였다.

이불을 빨면 3일이 걸리고, 또 이불을 꾸미며 3일이 걸렸다.

그래도 부모님께 배운 탓으로, 어린 나이에 시집살이를 해나갈 수 있었는데 

일이 매일같이 산더미처럼 끝이 없고, 하루가 어떻게 지나가는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나중에 고향에 가서 부모님 한번 뵙고 

죽으면 죽었지, 이대로는 안된다는 생각에 악착같이 버터 나갔다.

이러한 생활을 계속해 나갔는데, 나이가 22살 일 때 원자탄이 일본 떨어졌는데

히 호시 마 1개, 나가사끼 1개씩 터졌다.

그때, 온통 불바다고 유리조각 더미 속에서 헤매며, 우선 살려고 발버둥 치면서 

집 밖에 뛰쳐나와 보니, 개천가에는 시커멓게 탄 시체들이 많았다.

정신없이 도망가야 살 수가 있었기에, 앞뒤 가릴 것 없이 무작정 일본에서 나왔다.

나중에 나와 정신을 차리고 보니 2살 먹은 순자와 화명동 시동생도 따라 나왔다.

조선에 와서 친정에 한 달 있다가, 다시 일본으로 갈려고 했는데 조선사람은

일본에서 전부 나오고, 일본 사람도 역시, 전부 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소문과 함께 영원히 일본으로 갈 수 없다는 말에 낙담이 컸다.

친정에서 오랫동안 있을 수가 없고 어쨌든, 혼자라도 살아가야 하기에

공장에 취직을 하려고 부산에 왔다.

그때가 나이 27살이었고, 방직 공장도 알아보고 했지만 결국, 공장에는

들어가질 못했다. 온갖 생각 속에 생전 해보지도 못한 장사를 해봐야 

겠다고 생각이 퍼뜩 들었다.

어째, 처음부터 쌀장사를 시작하게 되었다.

그때쯤, 매축 오촌 아주머니 소개로 성주 어른을 만났다.

이쪽 집안 역시, 찢어지는 가난 속에 전부 식솔들이 빈대만 붙어살고

하나같이 걱정거리만 내게 안겨 주었다. 그래서 내가 아니면 도저히

생활이 될 수가 없고 설사, 생활이 된다 해도 집안 살림은 엉망이 이었다.

정말 식구들 하나같이 빈대만 붙이는 꼴이지, 일을 하거나 일을 돕는 

사람이나 나가서 돈을 벌려는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식구, 친지들 그렇게 많이 붙어살아도 누구 하나 도와주는 인간은 없고

말 한마디 좋게 하는 인간 없고, 매일같이 서로 욕질하고, 싸우며 맨날

남 비방만 하는 게 그 식구들 하루 생활이었다.

그래서 나는 더욱더 마음을 모질게 먹고 악착같이 돈을 벌려고 생각했다.

제일 처음 밀양 가서 됫박 하나 사서, 쌀을 4말 사고 부산 와서 소매를

내니, 쌀이 4되가 남았고 1말에 25원씩 돈이 남았다.

또 청도로 가서 쌀 4말을 사고 부산 와서 소매를 내니, 3되 반이 남고

1말에 20원이 남았다. 이렇게 장사를 하면서 약목도 가고, 경상도 가고

왜관까지도 갔다. 경산에 가서 쌀 4말을 가져오니, 남는 것이 하나도

없고 본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사과를 4접 가져와서 소매를 내니깐, 4접 전부 25원인 남았다.

이렇게 사과장사를 할 때쯤 정자를 낳았다.

아침도 안 먹고 점심도 안 먹고, 매일같이 5원씩 하는 국수로 하루 한 끼

때웠다. 밥이 10원 하니, 도저히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또 구미도 가고, 김천도 가고 그렇게 갔지만 제일 많이 남는 곳은

밀양과 청도였다. 이렇게 쌀장사한 게 30살까지 계속했다.

그리고 그 이후로는 또 고기 장사를 시작했는데, 처음에는 영도에 가서

수루 메 100마리를 사 가지고 머리에 이고 오면서, 집집마다 다 팔고

매축까지와 계산하니, 50원이 남았다.

계속해서 고기 장사를 하면서 정이를 낳을 때쯤, 부대 근처에 집을 샀다.

그러나 곧, 집을 철거한다 해서 다시 팔아 성주에 논 2마지기를 샀다.

이렇게 살아오면서 기차 타고 쌀자루가 터져 고생한 이야기, 식당에

고기 한 접 더 넣으려고 애걸하며 붙잡고 널어진 이야기 등은 

하려면 너무너무 많아 태산 같고, 말로 글로도 끝을 못 맺겠다.

여하튼, 그때는 잠도 하루에 2시간밖에 못 잤다.

새벽 4시에 일어나 5시에 차를 타서 장사 끝내고 밤중 10시에 

집에 들어와서 공동수도에 물 받으려고 줄을 서서 받아와,

그 물로 빨래하고 나면 딱, 새벽 2시가 되었다.

사소한 이야기는 빼고 매일 일어나는 생활이 이랬다.

또, 동래에서 미나리 200단을 사 가지고 머리에 이고 장사했는데 

이때는 몸이 붓고 눈앞이 노랗게 빙빙 돌아갈 때가 많았다.

전차를 태워주지 않아, 신작로를 걸어가는데 군인들 지프차가

옆에 와서  타라고 해서 탔는데, 매축에 와서 내려줘 너무너무 고마워 

눈물이 났다. 정말, 그때는 군인들 덕 많이 봤다.

미나리 한 단에 1원씩 받아오면 1원 50 전이 남으니, 쓰러져도

어떻게든 일어나 가야 돈을 벌지 않았겠느냐.

옛날이나 지금이나 사람 사는 것은 똑같다. 다만,

좀 변한 게 있다면 교통이고, 사람들이 많이 편리해진 생활뿐이다.

여자는 옛날부터 더 힘들고 어려웠다.

내가 보기에는, 요즘은 여자는 거의 남자와 똑같은 대우받는다.

아니, 남자보다 더 대접 잘 받는다.

이런 세상에, 내가 게으른 여자와 잘 살아가지 못하는 딸들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겠느냐. 이것은 내 자식뿐만 아니라,

남의 자식도 매 한 가지다. 왜냐하면, 지금 내가 73살이지만

그때를 비추어, 마음가짐은 몸이 훤하니 당장 많은 돈을 벌고

세상에 얻고 싶은 것 모두가 얻을 수 있다 생각하지만,

몸이 이러고 보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참으로, 마음만 빤하면 뭐 하겠느냐. 그래서 몸이 조금이라도 

성할 때, 젊은 시절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요즘 젊은 사람, 얼마나 좋은 세상이고 좋은 세월이 아니냐.

원하는 대로 노력하고 열심히 하면, 자기가 원하는 세상이

될 수가 있다. 참, 할 말은 하자면 끝이 없고, 태산 같고

죽을 때까지 글을 쓰도 숨이 안찬다.

딸이고, 며느리고 간에, 여자들은 어느 집, 어느 장소에 가도

접시 위에 물방울 구르듯, 깨끗하고, 반듯하고, 빛나야겠지만

더욱더 중요한 것은 집안 일과 생활에 큰 어려움을 어떻게 

잘 이겨 내는 것이 참으로 중요하다.

그것은 남편과의 문제가 아니라, 저 자신과의 진짜 싸움에서

이기는 것이다.

요즈음, 젊은 여자들은 좀처럼 지나온 이야기를 듣지 않는다.

결국, 이것이 경험이고 그 경험이 바로 재산이 되는데 말이다.

그리고 자신들도 똑같이 이렇게 늙어간다.

젊은 여자들이 살아봤자 살림을 얼마나 했으며, 집안 식구들과

일을 얼마나 했겠느냐.

지나온 경험과 요즘 자신들이 배운 지식을 잘 이용하면 재산

되는데 안타깝기 그지없다.

알고 보면, 어른들 말씀 듣지 않고 부모 속만 썩이는 자식들이 

아무것도 모르고, 잘 배우지도 못해 빈껍데기 밖에 없으면서

어른을 무시하고 자기밖에 모른다.

결국 자기밖에 모르니, 남이 어떻게 살아가는지 느끼질 못한다.

그러니, 항상 제자리 자기 무덤만 팠지 우물을 절대 팔 수 없다.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아도 요즘 젊은 사람들이 더 잘 알 것이다.

Tv로나, 신문이나 많은 이야기가 잘 알려지고 많은 것을 배우니깐,

내 말이 이해되리라고 생각이 든다.

할 말이 끝이 없고 태산 같지만 이만 그치겠다.

잘 새겨듣고 너희들에게 꼭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어머님 편지를 읽고 누나는 한바탕 눈물을 쏟아내고 좀 많이 

진정되는 것 같았다.

그런데 진작 편지를 받을 사람은 작은 누나인데, 큰누나가 받은 꼴이다.


사실과 진실

누나가 한이 많은지 엄마 편지와 함께 내 일생도 같이 자서전을 써

달라는 것이다. 그래서 알았다고 하며, 누나의 그동안에 있었던 얘기를 

자장가처럼 들었다.

그때, 누나의 장남에게서 전화가 왔다. 누난, 한참 동안 통화하면서

갑자기 내게 전화를 바꿔, 엉겁결에 받았지만 끊겼다.

그러자 누나가 “아들이 삼촌에게 미안해서 그런가 보다”라고 말했다.

불난 후에 아들은 어머니 내가 알아서 한다고 하면서 결국, 삼촌이

다 해결했도록 미루어 왔고, 언제나 그런 식이 었다.

어쨌든 어머니의 한 많은 사연의 편지가 누나에겐 자신도 엄마처럼

그런 일생이었다며, 그래서 자서전 이야기가 나온 것이다.

자서전이던, 수기던 간에 어머니와 누나는 한 국가의 역사적 사건에 

휘말리면서 인생의 고난이 예고되었다.

‘누나의 과거 이야기’를 듣고 내가 그동안 알지 못했던 새로운 사실도 알게 되었다.

일단 ‘누나의 이야기’를 말하자면, 


누나는 1945년생으로 해방둥이다.

태어난 곳은 일본 히로시마 겐카이라고 한다.

누나 친아버지 박 씨가 어머니 사이에서 둘째로 태어났고, 형제는 위에

3살 많은 오빠가 있었는데, 히로시마 원폭 때 사망했다고 말했다.

원폭 후, 어머니와 함께 일본에서 나와 진주 고모집에서 5살까지 살았고

어머니가 의붓아버지와 재혼하면서, 의붓아버지 형제들에게 학대를

많이 받았다고 한다. 그래서 어머니가 고아원에 맡기고 입양을 원했지만

내 인생이 그렇게 순탄치만은 않게 입양이 불발로 끝나고 다시, 의붓아버지

밑으로 가게 되었다.

어린 시절부터 고생과 온갖 험한 일을 겪으면서도 굴하지 않고, 오히려 총명

하며 순발력이 뛰어났다고 주위에서 그렇게 혀를 내둘렀다.

‘치영, 저 아이는 보통 아이가 아닌 천재다!’라고 말했다.

의붓아버지는 국민학교도 보내주지 않았지만, 동네에서 친구들 명자, 영숙이

등 경남여고와 동주여상 다니는 애들을 주도하고 이끌었다.

내 꿈은 부자가 되는 게 유일한 꿈이었고, 항상 열심히 사는 것이었다.

처녀시절에는 엄마가 아파서 늘, 병간호하며 집안 살림을 도맡았다.

그런 와중에, 의붓아버지와 엄마 사이에서 태어난 동생들도 보살펴 주어야 했다.

특히, 막냇동생이 다리에 악성종양으로 고생이 심했고, 치료를

위해서 더욱더 애착을 가져야만 했었다.

25살에 천 씨(남편)를 만나 몇 년간 교제 끝에 시집을 갔다.

시집은 부잣집으로 천금당이라는 금방을 해서 돈이며, 금 등 물량공세에

내가 결혼을 승낙하고 부잣집 아들과 꿈같은 신혼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이고 시집식구, 특히 큰 시누이에게 엄청 시달렸다.

한마디로 전형적인 악질이었다.

힘겨운 시집살이를 하면서도 유일한 희망인 내 자식 들을 훌륭하게 키워야

겠다는 일념으로 정말 열심히 살았었다.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혼자서 가계(간판업), 가족 뒷바라지, 집안

살림살이 등 모두 다 책임을 지고 가기에는 너무 벅찼다.

그리고 아이들이 커서 진학, 학원, 교육비 등으로 더 큰돈을 벌어야 했다.

큰아들 군 입대하고, 둘째, 딸은 대학교에 가고 막내아들은 고등학교에 갈 때에

내 나이 47세 일본으로 들어가서  본격적인 돈벌이에 나섰다.

그곳에서 돈을 위해 온갖 어렵고 힘든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도쿄 근교의 술집 및 식당과 김치 공장에서 뼈 빠지게 일하고 하루 3시간

정도 잠을 잘 수밖에 없었지만 아이들을 위한 돈이 차곡차곡 쌓이는 

벌이에 희망과 꿈이 곧 가까워지는 것 같았다.

수시로 다치는 일도 있었지만, 돈벌이를 위해선 이겨낼 수 있었다.

술집 식당에서 오후 16시까지 출근해서 다음날 아침 7시에 퇴근하고

다시 김치공장에 8시까지 가서 오후 13시에 퇴근하고 집에서 잠을 자고 

일어나면 또, 출근하면 잠은 딱 3시간밖에 잘 수밖에 없었다.

술집 식당에서 늘 이렇게 힘든 생활을 반복되었지만 그곳에서 만난 유학생

등 한국사람으로 내게 많은 힘이 되어 주었다. 

그렇게 10년간 돈을 버니, 계획했던 만큼은 되어 일본에서 나왔다.

그때가 57세였는데 막상 나와보니 내가 돈을 벌어서 송금한 것은

흔적도 없어, 낙담이 컸다.

얼마만큼은 있을 거라고 생각은 했는데 이렇게 허망할 수가 없었다.

정말 고층 아파트에서 뛰어내리고 싶었다.

남편이 도박에 빠져 악착같이 벌어다 준 돈을 탕진하고 말 그대로 살림은

희정이가 맡고 어렵게 꾸려가고 있는 형편이었다.

어쨌든 다시 이를 악물고 우선, 딸 시집을 보내기 위해서라도 또 돈을 

벌어야 했기에, 울산 커피숍, 동래 커피숍, 카바레 식당, 장어집, SK주방 등 

별의별 돈벌이가 되는 것이라면 다하고 8년 동안 닥치는 대로 했다.

그 악착같은 노력으로 딸 희정이, 막내아들까지 결혼을 다 시켰다.

그동안 벌인 돈이 7천~8천만 원, 한 달 평균 4백만 원을 벌었다.

또, 고생 끝에 보람이 있다고 7년간 모은 돈을 여동생이 사는 밀양에

투자하며 전원생활과 함께, 멋지고 꿈같은 노년 생활을 하기로 했다.

조립식 패널 집을 지어 1년 남짓 살다, 갑자기 불이나 구사일생으로

살았는데, 불이 나고 한 달간 말 그대로 참담한 심정이고 억장이 무너졌다.

마음과 몸, 같이 완전히 무너져 버렸다.

그런 와중에 막냇동생이 생각나서 딸 희정이에게 연락을 하라고 했다.


여기까지 누나의 독백을 글로 옮겼다.

그리고 지금까지 큰누나 문제는 현재 진행 중이다.


집착과 유혹

나는 누나의 문제가 궁금한 것이 세 가지다.

첫째, 불이 왜 났을까?

불이 나질 않았으면 자존심 강한 누나가 나를 찾지도 않았다.

둘째, 불난 집을 아들 부부 명의로 해놓고 왜, 뒤처리를 딸과 나에게

부탁한 저의가 무엇일까?

셋째, 철거 및 복구 완료 후에 밀양에 새집을 짓는다고 하고, 또 부산 아들이

얘기하는 해운대 달맞이 집에 들어가서 산다는 등 갈팡질팡 하는 것이 정말

치매가 있는 건지 아니면, 내가 모르는 또 다른 게 있을까?

이 세 가지 궁금한 사항이 누나의 문제이기도 하다.

누나의 충동적이고 돌발적인 이상한 행동이 몇 차례나 계속되었는데,

며느리에게 밀양 집을 명의로 해놓고는 내게 밀양 집 재건을 위해 주택담보대출을

요구하는가 하면, 밀양시내에 신축 아파트 분양 문의하는 자리에 형과 나를

데리고 가기도 하고, 동거남자가 같은 고아원 출신이라 돌보고 있다면서 

갑자기 이상한 행동을 해서 헤어졌다는 등 도무지 앞뒤가 맞지 않는 말을 했다.

조카, 희정이도 엄마가 자꾸 거짓말한다고 내게 말하면서 이제 엄마 문제는

엄마 스스로 알아서 하도록 하는 편이 모두가 스트레스를 안 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그동안 엄마, 오빠 부부, 희정이의 통화내용을 전했다.

오빠가 말했다. “엄마 밀양 집은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그래서 희정이는 “엄마가 삼촌 불러 달라고 하네요” 말하자,

“그럼 알아서 해, 내가 너 언니와 함께 학원 나가야 하니 바쁘다”라고

오빠는 바쁘다는 말만 계속하는 것이다.

“엄마! 오빠가 한다고 하는데 삼촌을 왜 불러?”라고 수영이가 물었다.

엄마는 “오빠가 전화를 할 때마다 울먹이며, 조금만 기다리라고 하는데

자꾸 세월만 가고 도저히 안 되겠다” 하며 희정이더러 삼촌을 불러라 했다.

그래서 철거 공사가 시작되어, 내가 희정이에게 말했다.

“희정아! 이것은 철거까지 포함된 최초 계약서다 17,900,000원인데,

고철 비용을 빼고 17,000,000원으로 계약을 맺었다.

원본은 엄마가 가지고 있고, 엄마가 다시 요구한 2차 설계를 오늘 업체에 

견적서를 의뢰하려고 하는데, 수영이 의견을 듣고 취소했다

삼촌: “어쨌든 엄마에게 잘 설명해 주고 오해와 서운함이 없도록 해야지?” 

희정이: “지금 출근해야 해서 나중에 살펴볼게요 감사합니다”

삼촌: “그래 너무 신경 쓰지 말고 건강 챙겨, 희정아! 엄마가 이제 해운대에

가겠다고 하고 밀양은 정리를 한대 그리고, 엄마가 희정이와 통화를 

하고 싶다고 하니 전화를 해주렴” 

희정이: “네 내일 병원에서 검사를 받고 오후에 전화를 드릴게요 신경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삼촌: “ 엄마가 섭섭해하니 좀 달래주고 해야겠다 몸도 성치 않은 희정이에게 

엄마가 자꾸 응석 부리네, 엄마가 좀 그렇잖아!” 

희정이: “삼촌 공부 중이시죠 엄마가 전화해 달라고 하시네요 좋은 밤 보내세요” 

삼촌: “그래 엄마와 통화했어 잘 됐으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엄마와 통화를 했는데 밀양에 계시네”

희정이: “네 정관 오시라고 하니 안 온다고 하시네요 정 안되면 

밀양에 조립식이라도 빨리 지어야 되지 않을까 생각 중입니다” 

삼촌: “그래 안 그래도 그 때문에 엄마와 얘기를 했는데, 엄마는 밀양에 애착이 

강하시네 죽을 고비를 당하고도, 어쨌든 지혜롭게 대처해야겠지? ” 

희정이: “오빠는 아무 말이 없고 삼촌은 엄마 생각한다고 저한테 문자

보내시는데 중간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라 마음만 

불편하네요 늘 삼촌이라도 계셔서 제겐 큰 힘이 됩니다 감사해요

식사 한번 대접해 드리고 싶습니다 진짜 진짜 감사합니다”

삼촌: “아니다 그냥 엄마가 건강하게 잘 있고, 희정이도 건강하면 된다 희정아!

아까는 운전 중에 제대로 통화를 못해서 지금 얘기를 하는데, 엄마가

부산에 있으면 안전하고 편하단다 문제가 있을 때는  내가 꼭 연락을

하니 염려하지 말고, 오빠가 무슨 말을 할 때까지 기다리고 그다음에,

다시 의논하자.” 그리고 사진을 희정이에게 보냈다.

삼촌: “이 사진들은 삼촌이 보관하고 있던 것인데, 엄마가 가진 사진들은

불이 나는 바람에 하나도 없이 전부 소실되는 바람에 내가 엄마에게 

주는 것이야!” 

희정이: “할머니랑 아빠랑 보고 싶어요”라고 말하며 돌아가신 할머니와 

아빠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

삼촌: “희정아! 엄마가 있는 곳에 언제든지 같이 가서 잘 계시는 모습 확인해 

갈 때 삼촌에게 연락 줘서 만나자” 

희정이가 올케언니의 카톡 문자를 내게 보냈다.

올케: “아가씨! 어머니께서 달 17일에 세입자가 나가니 그 후에 

언제든 어머니께서 약속하신 대로 들어오시면 되고, 그게 싫으시면 

다른 곳에 전세 얻어지고 아가씨와 반반씩 부담하겠습니다”

희정이: “올케언니가 답장 온 내용으로 엄마에게 얘기하며 잘 생각해 

보시라고 했어요 그리고 삼촌 퇴직 축하금입니다 달리, 생각이 안 나고

조금 송금을 했습니다 그동안 가족들 위해 애 많이 썼습니다”

삼촌: “고마워, 희정아! 엄마가 집 구경하고 계약도 월요일에 한단다”

희정이: “네 알겠습니다”


애인과 친구

희정이가 엄마 생일에 맞추어 온다고 하자 갑자기  누나가 다급하게 내게

전화를 해왔다. 지금 같이 있는 친구는 너 친구라고 희정이에게 말하라는 것이다.

밀양에서 불나고 간혹 부산에 내려와 친구 집에 있다고 나와 희정이에게 말한 것이

문제가 될 것이기에 미리 말을 맞추는 건인데, 참으로 난감했다.

나도 여자 친구로 알았고, 희정이는 아마도 거짓말인걸 알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다.

희정이가 엄마를 불신하고 싫어하는 이유가 엄마가 전에도 남자 친구를 사귀었던

것을 알기에, 이번 일도 당연한 것이고 아빠가 보고 싶다고 한 것이다.

어쩐지 만나는 날이 불안한 심기를 희정이가 상당한 부담일 것으로 생각되었다.

솔직히 말해서 나 역시도 누나의 친구가 부담스럽고 껄끄러웠다.

매형 돌아가시고 얼마 되지 않아 남자 친구가 생겼고, 이번엔 또 다른 새 남자 친구로

구포역 근처에 동거를 하고 있었던 것이었다.

도대체 누가 애인이고, 누가 친구인지 알 필요도 없지만 누나에겐 중요한 사람으로

여기기에 참으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누나 행동만 볼 따름이다. 

작은누나는 좀 살기가 힘들고 해서 남자들을 의지해서 그렇다고 하지만,

큰누나는 자존심도 강하고 옛날부터 생활력이 강해서 매형에게도 의존하지 않고, 

강한 이미지이기에 남자가 필요한 게 의문이었고 남자 친구든 애인이든 남자가

있다는 게 의외로 생각이 들었다. 

이해가 잘 가질 않았지만, 굳이 이해하는 방향으로 생각한다면 노년에는 외롭고 

허전하기에 대화 상대가 필요한 것이 아닐까 싶다.

사실, 또 내가 만나서 대화를 하면 누나가 일방적으로 얘기를 다하는 편이고

내 얘기는 듣지 않는다는 점이다.

어쨌든 기다리는 날이 왔고, 날씨도 햇볕이 쨍쨍 나는 무더운 오전이었다.

희정이가 전화 와서 받았다.

삼촌: “엄마와 난 구포역 앞에서 기다리고 있다 엄마가 너무 행복해 보인다 

어쨌든 앞으로 잘 될 거야  그러니까 희정이도 너무 신경 쓰지 말고 지켜보자

그리고 참고로 오늘 봤던 집은 없던 걸로 했고 당분간 절에 다니기로 했단다”

희정이: “감사합니다 또, 죄송하고요 전 엄마를 보는 게 엄청난 스트레스받고 

언제까지 이런 일을 겪게 될지 난감하네요”

삼촌: “스트레스받지 말고, 다 잘 될 거야”

희정이: “가능하면 안 보는 게 방법입니다 당분간은 안 봐도 되겠군요 

일 있으면 연락 주세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삼촌: “엄마도 희정이가 속 깊게 엄마 생각을 한다는 것을 알고 있더라,

더 이상 엄마와 악화되지 않도록 해야지”

희정이: “같이 있으면 둘 다 정신병원에 가야 되니 안 봐야죠, 당분간은”

삼촌: “희정아! 엄마가 별 다른 일은 없지만 희정이와 또, 집을 보자고 해서

지금은 차분하게 생각하고 절에 다니는데 전념해야 엄마의 진정성이 느껴지는 

것이기에 그게 급선무라고 했다”

희정이: “정말 죄송합니다 지금 제 심정은 엄마가 정신병원에 가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좀 치료를 받아야 되는 게 아닌가 싶네요 몇 달 전에도 아이 아빠한테 

생난리 치고 가놓고 또, 그러고 앞으로 계속 그럴 것 같고요.

저는 좀 편안하게 살면 안 되는지, 가족이라는 사람들이 저한테 왜 그러는지 

제가 먼저 스트레스를 받고 죽을 것 같아요 엄마가 삼촌한테 연락하라고 할 때

괜히 했다 싶네요 저두 좀 벗어나고 싶었나 봐요 이런 사태에 끌어들여서

죄송해요”

삼촌: “그래 알았어 안 그래도 엄마가 이랬다 저랬다 하고 약간, 치매 증세도

보이고 강박관념도 있는 것 같아 어쨌든 이왕 여기까지 왔는데 좋은 방안

찾아보고 지켜보자 급한 일이면 연락하고 일단, 당분간은 연락을 하지 않을게”

희정이: “죄송하다는 말밖에 달리 드릴 말이 없네요 죄송하고 감사합니다”

삼촌: “그래 알겠다”

그로부터 보름이 지났다

희정이: “주말 잘 보내시고 계시죠? 박병원 31일 오후 15시 30분 신경과 예약이 

되어 있거든요 대신 얘기를 좀 해주세요”

삼촌: “잘 알겠다”

희정이: “감사합니다”

삼촌: “그런데 희정아! 엄마가 새마을금고 통장에 오빠가 빼 간다는 말이 무슨

말인지 통 모르겠지만, 현금으로 거래를 하는 것 같다”

희정이: “오빠가 김밥집 하면서 마무리 못한 게 있었나 봐요 그런데 새마을금고 

통장은 아니에요 그건 농협 통장이었고요 지금은 용돈도 새마을금고로 보내고

있어요 그리고 원래 현금만 사용하셨어요”

삼촌: “희정이가 송금한 것 엄마가 현금으로 달라고 하네”

희정이: “드리지 마세요 거지 같은 그 집을 계약하려고 그런가 보지요”

삼촌: “여하튼 알았어 더 이상 돈은 얘기가 없네”

희정이: “네 일단 그냥 진정되게 내버려 두세요 옆에서 삼촌 계시니까 일부러

더 그러니, 삼촌도 엄마한테 휘둘리지 마세요 제가 못된 딸인 건 맞는데 이렇게 

안 하면 엄마보다 제가 먼저 죽을 것 같아서 그래요 동생이 엄마 안 보는 것도

이런 이유일 거예요” 

삼촌: “그래 알았어 안 그래도 엄마가 좀 황당한 일도 가끔씩 해서 진정시키고 그래”

희정이: “감사합니다”

삼촌: “지금은 절에 가며 아빠 백중기도 한다고 그러네 당분간은 지켜보자”

희정이: “삼촌! 올케언니가 저보고 자기한테 입금하라고 하는데 엄마가 달맞이

집에 간다고 하던가요?”

삼촌: “지금 엄마는 이사 준비로 밀양 상동에 가있는데, 달맞이는 오빠가 아무 말도 

없어서 엄마는 안 간다고 그러네”

희정이: “그럼 엄마가 왜 돈을 자기한테 부치라고 하는지...”

삼촌: “내가 알아볼게 희정아! 엄마가 결국 달맞이 집으로 들어간대”

희정이: “그래서 그 돈을 부치라는 말인가 보네요”

삼촌: “엄마가 왜 이랬다 저랬다 하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희정이가 210만 원

송금하라고 하네”

희정이: “참 말도 안 통하고 답답하네요 병원이나 가라고 하세요 돈은 내일 부칠게요”

삼촌: “희정아! 삼촌이 최근 들어 느꼈던 것이 많다 먼저 엄마가 몸이 온전치 못해~

그러니까 장남과 며느리가 눈치 보이고 자꾸만 희정이한테 졸라대니, 진작 아픈

희정이는 많이 섭섭하겠구나 엄마가 억세게 살아온 대로 풀어 나가니 안타까운 

마음이 든다 어쨌든 희정아! 너 말대로 너만 신경 쓰고, 나머지는 죽이 되던지

밥이 되던지 당사자가 알아서 하도록 내버려 두자구나! 삼촌이 지금 이 말밖에 

할 말이 없네 이 시간 이후로 당분간은 차분히 지켜보자”

희정이: “네 삼촌 건강관리 잘하세요”

삼촌: “그래 고맙다”

희정이: “저도 많이 많이 감사드려요”

그 이후에 희정이가 올케언니와 통화내용을 캡처한 것을 내게 보냈다

올케언니: “어머니께서 내일까지 입금하고 전화 달라고 하십니다”

희정이: “내일 입금할게요”

올케언니: “네”

희정이: “입금했고요 엄마 새마을금고 통장으로 이사비용 삼백만 원도 입금했으니

전해주시기 바라요”

올케언니: “아가씨가 직접 전화드리세요”

희정이: “오빠한테 하라고 전해주세요”

올케언니: “직접 하세요”

희정이: “그럼 냅 두세요”

그리고 내게 다시 연락이 왔다 

희정이: “삼촌! 엄마한테 9시에 입금 다했다고 좀 전해주세요 번번이 죄송해요 

점심 식사 맛있게 하시고요”

삼촌: “알았어 지속적으로 연락 취할게”

희정이: “감사합니다”

삼촌: “엄마와 통화했는데 고맙다고 하더라 내일 희정이가 예약한 병원도 가라고

했고, 엄마가 생각보다 강하고 잘하고 있으니 희정이는 신경 너무 쓰지 말고 건강

관리 잘하거라 그리고 스트레스 더 이상 받지 말고”

희정이: “네 삼촌 감사합니다”

그리고 한 달이 지났다

삼촌: “희정아! 잘 있지? 이제 어느 정도 정리가 된 것 같네 엄마는 잘 있어 워낙에 

강하신 분이라 자신의 일을 일사천리로 처리해 나가네~ 이제, 삼촌도 희정이

말처럼 더 이상 엄마 도울 일이 없구나 그래도 엄마든 희정이든 언제라도 요청

하면 삼촌이 달려갈게 그리고, 삼촌 학교 경비 취직이 되었어 조금 바쁘겠네

어쨌든 희정이는 지금처럼 건강관리 잘하고 엄마는 걱정 마~ 무슨 일이 있으면

내게 연락이 오니, 그리 알아라”


달맞이 고개

그로부터 또 한 달이 지났다

슈퍼태풍이 연이어 3개나 지나간 뒤, 해운대는 피해가 속출했다.

나도 간간히 전화하며 누나 안부를 묻고 경비 업무 하면서 시간이 나면

한번 찾아간다고 전했다 

누나가 이사 간 집은 옛날에 누나가 아들을 위해 사놓은 집이었고 해운대

달맞이 고개 돌아가기 전, 해운대 미포 위 언덕에 위치한 자리였다

누나가 나를 반기며 잘 대해 주었다 

혼자서 잘 살아가고 있고, 치매 끼는 발견하지 못했다 

희정이가 말한 병원에서 진료 및 약 처방받아 약도 잘 먹고 해서 진정되는 건지

모를 일이다 일단 희정이에게 전했다 

삼촌: “희정아! 삼촌이 엄마 집에 다녀왔는데 엄마는 잘 있고 혼자서 집안 정리며

청소도 깨끗이 해놓고 잘살고 있더라,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오빠도 내가

가기 전에 한번 다녀 갔다고 그러네 이제 희정이는 건강관리를 더욱 잘하고

자신에게 충실하면 되겠네 또, 다음에 연락 줄게 가족과 추석 잘 보네~”

희정이: “삼촌 고맙습니다 감사해요 삼촌! 엄마 주소 좀 알려주세요  몸이 괜찮아 

지면 가봐야 될 듯싶어서요”

삼촌: “그래 잘 생각했네”

희정이: “감사합니다 삼촌도 건강하게 추석 잘 보내세요”

추석 전날에 누나가 내게 전화를 했는데 “동생! 고맙다 희정이가 다녀갔다 

김서방도 같이 왔단다 정말 너는 이 세상에서 가장 훌륭한 내 동생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그랬다 “누나! 이제는 좋아질 거요 누나도 좀 시간을

두고 지켜보면서, 행복하고 건강한 모습으로 살아가세요 그러다 보면 나중에 

자식들 모두 예전처럼 누나에게 돌아올 거예요”라고 했다 

그렇게 한동안 별다른 소식이 올 때까지 연락이 없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란 속담이 진짜 같았고 오랜만에 서로 바쁘게 지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서 누나가 다급하게 내게 전화를 해왔다

집에서 넘어져 병원에 입원해야 한다고 하길래, 내가 병원에 문의를 하고

직계 보호자가 와야 한다고 해서 희정이에게 연락을 취했다 

희정이가 병원에 가서 누나를 입원시켰고 진단은 일주일이라고 했다

아들 내외는 감감무소식이고 희정이가 병원에서 누나를 간호했다

그래도 누나는 그런 가운데 속에서도 아들 부부를 두둔했다

참으로 남아 선호 사상이 철두철미 했고 그 정도가 집요하게 강했다.

단지, 희정이가 가여울 뿐이다.


노인과 어른

며칠 뒤, 형으로부터 전화가 왔다. 형이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그리고 

경비 취업을 해서 잘하는 것도 궁금하다고 물었다.

내가 이야기도 할 게 있고 한번 만나자고 했다.

아침에 근무 교대하고 바로 지하철 타고 범일동역으로 갔다.

조방 앞 부산되지 국밥집에서 형과 아침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당연히 누나 이야기가 나왔고 내가 경비하게 된 동기도 이야기했다.

먼저, 누나보다 희정이가 그동안 힘들고 몸도 성치 못한 상황에서 제 엄마를

챙겨야 하니, 애처롭고 해서 도와준다고 했다.

형은 내 이야기를 듣고 대뜸, 큰누나와 인연을 끊고 전화도 수신거부로 해놓아

라고 했다. 형도 아예 누나와 인연 끊고 전화도 수신 거부한 지 오래된다고 했다.

그래서 나는 누나는 누나고, 희정이를 봐서 도와주는 것이기에 그럴 수는 없다고

했다. 그래도 나라도 누나를 수용해야 몸도 안 좋은 희정이가 좀 나을 것이다.

앞전에, 불나고 방문하여 누나를 위로하며 며칠간 다독거려줄 때 내가 도서관에서

빌려온 책도 건네며 이해인 수녀의 말씀하신 것도 전했다.

‘돈은 반드시 어두운 그림자를 수반한다’고 그리고는 이젠 나이가 들면 돈보다는

건강과 고독도 친해져야 하며 노인네보다는 어른이라는 말을 듣고 불필요한 간섭과

언행을 조심해야 한다고 했다.

어머님 생전에 그때를 떠올려보자고 했다.

몸도 성치 않았지만, 어느 정상인보다 못지않게 모든 것을 잘 처리했다.

늘 감사한 마음과 미소와 배려로 집에 어머님이 계실 때는 사람들이 구름처럼

모였다. 나 역시, 긍정과 희망으로 항상 좋은 방향으로 나가자고 했다.

어차피 지나간 역사가 잘못된 것이라면 또는, 악연이라면 좋은 인연으로 

끝맺자고 누나에게 말했다. 형은 자꾸 누나와 인연을 끝내라고 했지만,

인연은 억지로 끊어서는 안 되고 부모가 이어준 인연을 어떻게든 좋게 결말을 

내어야 하는 게 도리다. 다만, 누나가 처세를 못해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리고 누나는 이상한 행동을 했는데, 과거에 대한 피해망상증이나 돈에 대한

집착 등 그런 강박관념이 증세가 심했다.

결코, 고치기 힘든 고질병으로 자리를 잡았다.

전형적인 노인네로, 돌봐야 하는 노약자로 느껴졌다.

어머니처럼 진정한 어른스러움은 온데간데없이 보였다.


약속

그러나 밀양에 불나고 내가 누나를 위로하는 자리에서 누나가 말했다.

“동생! 사랑하는 내 동생~ 이제 너도 퇴직했으니 나랑 같이, 집도 다 짓고

내 자서전도 쓰며 노후생활을 즐겁고 행복하게 보내자”라고 하기에,

물론 내가 글쓰기가 취미이지만 자서전이라는 게 금방 완성되는 게 아니고

여하튼 알았고 천천히 생각해 보자고 했다.

며칠 뒤 누나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아름다운 수석을 사는 큰일을 저질렀다고 

오백만 원을 빌려주면 곧 갚고, 좋은 분위기에서 글을 쓰면 더욱 좋을 것에는 말에

어처구니가 없었다. 그래서 내가 말했다.

글쓰기는 어떤 분위기도 좋지만, 매일 열심히 쓰는 고된 작업이고 컴퓨터를 계속

사용하는 것이기에 그런 짓은 하지 말라고 했다.

누나는 단지, 멋지게 장식된 집에서 멋진 글쓰기를 하기 위해서였다고 한다.

충동적 행동을 잘하는 누나라서 은근히 걱정이 되었다.

그래서 다시 누나에게 강조했다. 제발 그런 충동적인 일을 벌이지 말라고 하며

그런 것은 전혀 내게 도움이 되지 않고, 내가 필요한 것이 있으면 누나에게

얘기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누나는 건강만 챙기라고 했다.

글은 금방 되는 게 아니라, 어느 정도의 시간이 필요하고 독자들에게 알려져야 

책으로 나온다고 했다. 글쓰기를 하다 보니 누나가 말한 자서전이 생각났고

누나의 이야기를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누나에게 약속을 했다.


행복

내가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물론 누나의 자서전 부탁도 있지만

작은 누나의 연애편지 대신 써주고, 고등학교 때는 군대 간 친구들에게 위문편지,

어머니 편지 등을 써다 보니 자연스럽게 글쓰기가 취미로 된 것 같다.

누나보다는 내가 더 행복한 이유는 글쓰기가 취미가 되고 습관으로 정착되자,

글을 안 쓰면 허전하고 불안하다. 글을 쓰면 행복하고 즐겁다.

어떻게 보면 누나가 내 행복의 불을 더 지폈다.

누나의 사전 계획된 것이든, 어떤 욕망일지라도 내게는 항상 좋은 방향으로

생각하고 나 자신을 발전시키는 것이라 행복한 것이다.

퇴직과 함께 찾아온 제2의 인생을 시작으로, 어쩌면 영원한 글쓰기를 위한

작가가 될 것이라 단언하고 싶다.

누나가 글감을 계속해서 주고 부탁 또한, 글쓰기를 자꾸 재촉하는 거와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인다면 나라는 존재가 왜 태어났으며 

어떤 일을 하고, 무엇을 하러 이 세상에 태어났는가에 대한 답을 한 발짝 다가섰다는 것은 분명히 말해 준다. 이러한 연유를 볼 때 과연 나라는 존재 여부를 다시금

생각하는 대목이다. 그래서 더욱더 나 자신에 대한 물음이 계속되고 결국 내

자신을 찾게 된 것이다. 그 찾게 된 동기가 가족들이다.

그래서 이 소설의 주제와 배경이 가족이 된 것이다.

글쓰기를 본격적으로 쓰기 전까지는 항상 나는 누구인가를 늘 끊임없이 물음이

계속되었다. 글쓰기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지금 마침내 마침표를 찍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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