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각성(Awakening)
4화: 암시장의 그림자(Shadow of the Black Market)
박준혁이 나간 후,
지오는 한동안 빈 상담실에 앉아 있었다.
레오의 명함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며 생각했다.
모든 것이 계획된 것 같았다.
노인의 의뢰, 레오와의 만남, 그리고 박준혁의 등장까지.
나는 누군가의 계획에 따라 움직이고 있는건가?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린다.
8년 만에 처음 느끼는 감정이었다.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지만, 분명히 무언가 새로운 것이었다.
호기심? 의심? 분노?
지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더 이상 이 상황을 방치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노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저에요. 한지오입니다.
내일 밤 감정 클리닉으로 오시겠습니까?
답을 찾을 시간입니다.”
다음날 저녁 11시. 감정 클리닉.
어두운 골목, 깜빡이는 네온사인도 없는 낡은 건물.
지오와 노인은 나란히 서서 입구를 바라봤다.
“정말 들어가시겠소”
노인이 물었다.
75세 노인의 목소리에는 떨림이 있었지만,
결의도 서려 있었다.
“위험할 수 있습니다.”
“내게 남은 시간이 얼마나 되겠소.
위험을 두려워할 나이가 아니야.”
지오는 고개를 끄덕이고 문을 열었다.
감정 클리닉 내부.
복도는 여전히 어둡고 차가웠다.
하지만 오늘은 뭔가 달랐다.
복도 양쪽으로 작은 방들이 보였고,
각 방마다 희미한 불빛이 새어나오고 있었다.
“어서 오세요. 예상했던 분들이군요.”
레오가 복도 끝에서 나타났다.
여전히 검은 선글러스를 끼고 있었지만,
오늘은 미소가 더 깊었다.
“김중석 할아버지, 그리고 한지오 브로커,
둘 다 찾는 것이 같군요.”
“김중석?” 지오가 노인을 바라봤다.
“내 본명이오. 2045년에 그 감정을 판 사람이지.”
레오가 손짓했다.
“따라오세요.
오늘은 특별히‘블랙 필’의 진짜 모습을 보여드리겠습니다.”
그들은 복도를 따라 걸어갔다.
각 방마다 다른 풍경이 펼쳐졌다.
1번방: 한 중년 남성이 검은 앰플을 받고 있었다.
‘살의’라고 적힌...
2번방: 젊은 여성이 보랏빛 앰플을 주입하고 있었다. ‘광기’라는 라벨.
3번방: 정장을 입은 남성이 짙은 녹색 앰플을 구매하고 있었다.
“보시다시피,
여기서는 합법 거래소에서 금지된 모든 감정을 다룹니다.”
레오가 설명했다.
“살의, 광기, 복수심, 질투, 절망, 증오...
인간의 어두운 면이 모두 상품이 됩니다.”
노인이 한숨을 쉬었다.
“내 순수한 설렘이 이런 곳에...”
“아, 할아버지의 설렘은
이곳에서도 특별 취급받는 상품입니다.
2040년대 빈티지 감정이거든요.”
레오가 맨 끝 방을 가리켰다.
“저기가‘빈티지 감정’전문 매장입니다.
가보시죠.”
빈티지 감정 매장
마지막 방은 다른 곳과 분위기가 달랐다.
고급스러운 인테리어, 화려한 조명,
그리고 벽면을 가득 채운 앰플들.
각 앰플마다 작은 플래카드가 붙어있었다.
노인이 자신의 감정을 발견하고 다가갔다.
분홍빛 앰플은 여전히 아름다웠다.
“어떻게 순도가 이렇게 높을 수 있죠?”
지오가 물었다.
“재생 기술입니다. 원본 감정에 비슷한 감정들을 조합해서
순도를 높이죠.”
레오가 설명했다.
“예를 들어 할아버지의 설렘에는
다른 사람들의 첫사랑 감정 30여 개를 혼합했습니다.
순도는 높아지지만...”
“하지만?”
“원래 감정은 아니죠. 짝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노인의 얼굴이 굳었다.
“그럼 내 진짜 감정은 어디에 있소?”
“진짜 감정은... 이미 소진됐습니다.
50년 동안 여러 번 거래되면서 완전히 희석됐죠.”
노인이 주저앉을 뻔했다. 지오가 그를 부축했다.
“그럼... 내가 평생 찾던 건... 이미 사라진 거란 말이오?”
레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지오를 바라봤다.
“한지오, 당신도 마찬가지입니다.
당신이 8년 전에 판 슬픔과 그리움...
이미 흔적도 없어요.”
지오의 가슴이 조여왔다.
“뭐라고요?”
“당신의 감정은 매우 순도가 높았어요.
98.9%의 슬픔이요. 그래서 인기가 많았죠.
수백 번 재거래됐습니다.”
레오가 다른 앰플을 가리켰다.
“당신의 슬픔이 주성분으로 들어간 상품입니다.
하지만 이것도 진짜 당신의 감정은 아닙니다.”
“그럼 우리는 왜 여기 있는 겁니까?”
지오는 앰플을 바라봤다.
짙은 남색 액체가 아름답게 빛나고 있었다.
지오가 차갑게 물었다.
“진짜 목적이 따로 있는 거 아닙니까?”
내가 여동생을 그리워했던 마음이... 상품이...
레오가 선글라스를 벗었다. 그의 눈은 지친 중년 남성의 눈이었다.
“맞습니다. 따로 목적이 있어요.”
그는 벽 뒤쪽으로 안내했다. 숨겨진 문이 있었다.
“진짜 보여드리고 싶은 건 이겁니다.”
감정은행의 비밀
문 너머에는 거대한 실험실이 있었다.
수십 개의 컴퓨터 모니터, 복잡한 기계들,
그리고 수백 개의 감정 앰플들이 체계적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레오가 설명했다.
“정부와 결탁해서 위험한 감정들을 시장에서 제거하고 있어요.
사람들이 저항하지 못하도록.”
화면에는 통계가 표시되고 있었다.
“사람들은 자신의 부정적 감정을 팔아버리고,
대신 순종, 만족, 무기력 같은 감정을 사고 있어요.”
“완벽한 통제 사회가 만들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럼 당신은 누구입니까?” 왜 이런 걸 보여주는 거죠?”
“저는... 이 시스템의 피해자입니다.”
레오가 자신의 손목을 보여줬다. 감정 주입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제거된 흔적이 있었다.
“5년 전까지 저는 감정은행의 수석 연구원이었어요.
프로젝트 제로를 개발한 사람 중 하나죠.”
“하지만 제 딸이 죽었어요. 학교에서 집단 괴롭힘을 당했는데...
아이가 분노나 저항심을 모두 팔아버렸거든요. 싸울 힘이 없었어요.
그냥... 조용히 죽었어요.”
“그때 깨달았어요. 우리가 만든 시스템이 얼마나 위험한지.”
노인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럼... 내 손녀도 그런거요?
작년에 자살했는데... 아무 이유도 없이...”
“확인해보겠습니다.”
레오가 컴퓨터를 조작했다. 잠시 후 결과가 나왔다.
노인이 울음을 터뜨렸다.
“소연이가... 소연이가...”
“미안합니다, 할아버지. 이 시스템의 희생자였어요.”
지오는 화면을 바라보며 물었다.
“그럼 내 여동생도...”
“한지유 양의 경우는 조금 달라요.”
레오가 다른 파일을 열었다.
“지유 양은 우리 시스템을 조사하고 있었어요.
매우 위험한 수준까지.”
“그래서...”
“제거됐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지오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여동생이 단순한 사고로 죽은 게 아니라,
누군가에게 살해당했다는 말인가?
8년 동안 자신이 느낀 죄책감과 슬픔이...
모두 잘못된 것이었단 말인가?
지유야... 너는... 싸우다 죽은 거였구나.
그 순간, 지오의 가슴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8년 만에 처음으로.
분노였다.
“그럼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지오가 물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지금까지 없던 감정이 실려있었다.
“싸우는 겁니다.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는 거예요.”
“어떻게요?”
“프로젝트 제로의 핵심 데이터를 폭로하는 겁니다.
모든 사람이 진실을 알게 하는 거예요.”
레오가 USB를 꺼냈다.
“이 안에 모든 증거가 들어있어요.
하지만 혼자서는 불가능해요.
감정은행 내부의 도움이 필요하죠.”
“내가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지오가 말했다.
“당신은 감정은행 브로커예요. 내부 시스템에 접근할 수 있죠.
그리고...”
레오가 지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8년 만에 처음으로 감정을 되찾고 있어요.
분노를 느끼고 있죠?”
지오는 자신의 가슴에 손을 댔다.
뜨겁게 타오르는 무언가가 있었다.
“네... 느껴집니다.”
“그럼 이제 시작할 수 있어요. 진짜 감정으로 싸우는 거예요.”
노인이 일어섰다.
“나도 돕겠소. 내 손녀와 당신의 여동생을 위해서라도.”
“위험합니다, 할아버지.”
“이미 잃을 게 없소. 남은 시간 동안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소.”
세 사람은 서로를 바라봤다.
감정 없는 브로커, 모든 것을 잃은 노인,
그리고 시스템에 배신당한 전직 연구원.
이상한 조합이었지만, 그들에게는 공통점이 있었다.
모두 감정 거래 시스템의 피해자였다는 것.
“그럼 내일부터 시작하죠.”
레오가 말했다.
“혁명을.”
그날 밤, 집으로 돌아온 지오는 거울 앞에 섰다.
8년 만에 처음으로 자신의 눈에서 감정을 읽을 수 있었다.
분노, 결의, 그리고... 희망.
그는 자신의 감정 주입기를 바라봤다.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진짜 감정이 돌아오고 있었으니까.
지유야, 이제 오빠가 널 위해 싸울게.
네가 하지 못한 일을 오빠가 마저 하겠어.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흘러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가짜 감정으로 잠들고 있다.
하지만 곧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진실이 밝혀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진짜 감정을 되찾게 될 것이다.
혁명이 시작되었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