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각성(Awakening)
3화: 감정 브로커의 하루
지오는 그날 밤 한숨도 자지 못했다.
천장을 바라보며 레오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한지유. 8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 하지만 그게 사고가 아니었다면?”
사고가 아니었다면?
그럼 뭐란 말인가?
살인? 음모? ...
아니면 그저 레오가 던진 미끼?
지오는 자신의 감정을 알 수 없었다.
단지 가슴 한쪽이 불편하게 조여드는 느낌만 있을 뿐이었다.
새벽 5시,
지오는 침대에서 일어났다.
샤워를 하고,
회색 정장을 입고,
무채색 넥타이를 맸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은 여느 때와 같았다.
무표정. 공허. 생기 없음.
하지만 뭔가 달랐다.
눈빛이 미세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오전 9시. 감정은행.
“지오씨, 안녕하세요!”
로비에서 동료 브로커 정수진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그녀의 손목 주입기에는 노란빛‘유쾌함’캡슐이 반짝였다.
“어제‘감정 클리닉’갔다며? 괜찮았어?”
“별일 없었어.”
“정말? 얼굴이 안 좋아 보이는데. 혹시 위험한 일은...”
:괜찮아. 걱정하지 마.“
지오는 그렇게 말하고 자리로 향했다.
수진은 그의 뒷모습을 걱정스럽게 바라봤다.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홀로그램 화면에 오늘의 일정이 떠올랐다.
[한지오 브로커 – 금일 상담 일정]
지오는 커피를 한 모금 마셨다.
쓴맛이 입안에 퍼졌다.
하지만 그것도 단지 감각일 뿐, 감정은 아니었다.
첫 번째 고객이 문을 두드렸다.
오전 9시 30분. 상담실 1.
김민준. 28세. 구겨진 정장. 긴장한 표정. 손에 든 서류 가방.
“안녕하세요... 내일 대기업 최종 면접이 있어서요.”
지오는 그를 관찰했다.
떨리는 손가락. 식은땀. 불안한 눈빛.
“어떤 감정이 필요하십니까?”
“자신감이요. 면접관 앞에서 떨지 않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는 자신감이요.”
지오는 진열장이서 빨간색‘자신감’앰플을 꺼냈다.
황금빛과 빨간빛이 섞인 아름다운 액체.
“이거.. 정말 효과가 있나요?”
“네. 주입 후 5분 이내에 효과가 나타납니다.
떨림이 사라지고, 목소리에 힘이 들어가며,
눈맞춤이 자연스러워집니다.”
“...가짜인 걸 알면서도 사야하는 게 참 웃기네요.”
민준이 자조적으로 웃었다.
“저 자신을 믿을 수 없어서 다른 사람의 자신감을 사는 거잖아요.
이게... 정상인가요?”
지오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답할 수가 없었다.
그것이 정상인지 아닌지, 그것이 슬픈 일인지 아닌지,
지오는 알 수 없었다.
판단하려면 감정이 필요하니까.
“구매하시겠습니까?”
“...네. 구매할께요.”
결제가 완료되고, 민준은 앰플을 자신의 감정 주입기에 장착했다.
잠시 후, 그의 표정이 달라졌다.
등이 펴지고, 눈빛이 또렷해지고,
목소리에 힘이 실렸다.
“오... 정말 느껴져요. 이게... 자신감이구나.”
민준은 놀란 표정으로 자신의 손을 바라봤다.
더 이상 떨리지 않았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그는 활기차게 문을 나섰다.
지오는 혼자 남은 상담실에서 생각했다.
48시간 후, 그 자신감은 사라진다.
그리고 그는 다시 떨릴 것이다.
그럼 또 사러 올 것이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진짜 자신감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것이다.
나처럼.
지오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봤다.
텅 빈 감정주입기.
오전 11시. 상담실 2.
이서연. 35세. 검은 드레스. 창백한 얼굴. 왼손 약지에 결혼반지 자국.
“이혼한 지 3주 됐어요.”
그녀는 조용히 말했다.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눈가의 다크서클이 말해주고 있었다.
“밤마다 잠을 잘 수가 없어요. 눈을 감으면...
그 사람 얼굴이 떠올라요.
화가 나고, 억울하고, 슬프고... 너무 복잡해요.”
“평온함을 원하십니까?”
“네. 그냥... 아무것도 느끼고 싶지 않아요. 고요하고 싶어요.”
지오는 하늘색‘평온함’앰플을 꺼냈다.
맑고 투명한 푸른빛.
“이거 주입하면... 그사람 생각이 안나나요?”
“생각은 납니다. 하지만 고통스럽지 않습니다.
마치 오래된 사진을 보는 것처럼.
담담하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좋네요. 그게 좋아요.”
서연이 결제를 완료하고 앰플을 주입했다.
잠시 후, 그녀의 어꺠가 내려갔다.
얼굴에서 긴장이 풀렸다.
“아... 정말이네요. 편안해졌어요.
그녀는 작게 미소지었다.
감사합니다. 이제 좀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문이 닫히고 지오는 혼자 남았다.
7일 후, 그 평온함은 사라진다.
그럼 또 사러 올 것이다.
그렇게 반복하다 보면... 자신의 진짜 평온이 무엇이었는지
잊어버릴 것이다.
오후 2시. 상담실 3.
정아라. 31세. 헝클어진 머리. 짙은 다크서클.
손목 주입기에 과부하 경고등
“더 주세요! 제발!”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아라가 절박하게 외쳤다.
그녀의 손목 주입기는 빨간 경고등으로 점멸하고 있었다.
“쾌락! 황홀함! 뭐든지 좋아요!”
“정아라씨. 이번 달 한도를 초과하셨습니다.”
“돈은 있어요! 집도 팔았어요! 차도 팔았어요!
제발 주세요!
지오는 화면을 확인했다.
아라의 이번 달 감정 구매 내역이 떠올랐다.
[정아라 감정 구매 내역: 3월]
“법적으로 더 이상 판매할 수 없습니다.
치료를 받으시길...”
“치료? 치료가 뭐예요!”
아라가 책상을 탁 쳤다.
“제 진짜 감정이 뭔지 아세요?
공허함이에요.
무기력함이에요.
죽고싶다는 생각이에요!
그런 걸로 어떻게 살라는 거예요!”
아라의 눈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감정주입기 없으면 저는 아무것도 아니에요.
빈 껍데기예요. 제발... 제발 주세요...”
지오는 그녀를 바라봤다.
8년 전 자신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감정을 팔아버린 후, 공허함에 시달렸던 그때.
하지만 지오는 다른 길을 택했다.
감정을 사지 않았다.
그냥 공허함과 함께 살기로 했다.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채로.
아라는 반대의 길을 택했다.
공허함을 견디지 못하고 가짜 감정을 사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독되었다.
“죄송합니다. 도와드릴 수 없습니다.”
경비가 들어와 아라를 데리고 나갔다.
복도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쳤다.
“제발... 제발요”
문이 닫혔다.
지오는 혼자 남은 상담실에서 생각했다.
그녀와 나의 차이는 무엇일까?
나는 공허함을 받아들였고, 그녀는 도망쳤다.
어느 쪽이 더 나은 삶일까?
답은 없었다. 답을 찾으려면 감정이 필요하니까.
오후 4시. VIP 상담실.
박준혁. 45세. 값비싼 정장. 금시계. 여유 있는 미소.
“한지오 브로커님이시죠? 소문 많이 들었습니다.”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특별한 걸 찾고 있습니다.
일반 매장에서는 구할 수 없는 것들이요.”
지오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어떤 종류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복수심이요. 아주 진하고 순수한 복수심.”
복수심. 합법거래소에서는 판매가 금지된 감정이다.
“죄송하지만 저희는 그런 감정은 취급하지 않습니다.”
“물론이죠. 하지만 방법이 있다고 들었는데요?”
준혁이 명함을 꺼내 책상에 놓았다.
레오의 명함과 똑같은 디자인이었다.
“레오라는 분이 당신을 추천하더군요.
‘한지오 브로커라면 길을 안다’고요.”
지오의 심장이 빨라졌다.
아니, 심장이 빨라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레오를... 아십니까?”
“오래된 거래 파트너죠. 그분이 말하더군요.
당신이 곧‘특별한 의뢰’를 맡게 될 거라고.”
“특별한 의뢰?”
“2045년 빈티지 설렘 말입니다. 아주 희귀한 물건이죠.”
지오는 숨이 멎는 것 같았다.
노인의 의뢰. 레오가 이미 알고 있었다는 말인가?
“그 설렘을 구한다면...
저와도 거래할 수 있을 거라고 하더군요.”
준혁이 일어서며 웃었다.
“복수심 말고도 흥미로운 것들이 많이 있어요.
살의, 광기, 질투...
생각해보세요.”
문이 닫혔다.
지오는 혼자 남아 생각했다.
레오가 모든 걸 계획하고 있었다는 말인가?
노인의 의뢰도, 나와의 만남도 모두?
그럼 여동생 이야기도...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그것은 의심일까? 분노일까?
두려움일까?
지오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했다.
무언가 시작되고 있다는 것을.
그날 밤, 지오는 레오의 명함을 바라보며 생각했다.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흘러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감정을 사고팔고 있다.
진짜 감정이 무엇인지 잊어버린 채로.
지오는 자신의 감정주입기를 바라봤다.
여전히 텅 비어 있었다.
나는 왜 이 일을 하고 있을까?
나는 왜 살고 있을까?
8년 만에 처음으로 던지는 질문이었다.
그리고 그 질문에 답하기 위해서는,
먼저 진실을 알아야 했다.
여동생의 죽음에 대한 진실을.
감정은행의 비밀에 대한 진실을.
그리고 자신이 잃어버린 감정에 대한 진실을.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