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필(Black Feel)

시즌 1 - 각성 (Awakening)

by 이용주

○○

2화: 잃어버린 감정을 찾습니다


노인은 1945년 5월 23일을 기억했다.

“그날은... 토요일이었소.”

VIP 상담실.

고급스러운 가죽 소파에 앉은 노인이 창밖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의 목소리는 낮고 차분했지만,

어딘가 떨리고 있었다.


“대학교 4학년 봄.

캠퍼스의 벚꽃이 만개했던 날이었지.

나는... 3년 동안 좋아했던 여학생에게 고백하기로 마음먹었소.”

지오는 태블릿에 정보를 입력하며 노인의 말을 들었다.

감정이 없어도 정보는 수집할 수 있다.

데이터는 축적할 수 있다.

“그녀의 이름은 이선아. 문학과 학생이었소.

도서관에서 처음 봤을 때부터...

내 심장은 이상하게 뛰었지.

그녀가 웃을 때마다,

그녀가 내 이름을 부를 때마다,

세상이 다르게 보였소.”

노인이 주름진 손으로 가슴을 짚었다.


“그날,

나는 벚꽃나무 아래에서 그녀에게 고백했소.

‘당신을 사랑합니다’라고.

그때 느꼈던 그 떨림. 그 두근거림. 그 설렘.

그게...

내 인생에서 가장 생생했던 감정이었소.”

“결과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거절당했지.”

노인이 쓸쓸하게 웃었다.

“하지만 그게 중요한 게 아니오.

중요한 건...

그 순간 내가 ‘살아있다’고 느꼈다는 거요.

온 세상이 빛나고,

내 심장이 터질 것 같았고,

두려움과 희망이 동시에 밀려왔소.

그게 바로‘감정’이었소.”


지오는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눈에는 무언가가 반짝이고 있었다.

지오는 그것이‘그리움’이라는 것을‘알았다’.

하지만‘이해’ 하지는 못했다.

“왜 그 감정을 판매하셨습니까?”

노인은 잠시 침묵했다.

“젊었을 때는... 어리석었소.

사업을 시작했는데, 실패의 연속이었지.

매일 밤 그 거절의 순간이 떠올라 잠을 이룰 수가 없었소.

그래서 생각했지.

‘이 감정만 없으면 일에 집중할 수 있을 텐데’라고.”

“그래서 판매하셨군요.”

“그렇소.


2095년, 50년 전.

감정 거래가 막 합법화되었을 때,

나는 그 설렘을 팔았소.

96만 원을 받았지. 그 돈으로 사업 자금을 마련했고...”

노인이 쓴웃음을 지었다.

“성공했소. 큰 부자가 되었지.”

“하지만?”

“하지만 그 후로...

나는 단 한 번도 다시는 그렇게 살아있다고 느껴본 적이 없소.

결혼도 했고, 아이도 낳았고, 손주도 생겼지만...

모든 게 흐릿했소.

마치 안갯속을 걷는 것 같았지.”

노인이 지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이제 나는 75세요.

의사는 내게 1년이라고 했소.

죽기 전에...

마지막으로 한 번만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소.

내가 살아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소.”


8년 전.

병원 복도는 차가운 형광등으로 가득했다.

“보호자분이십니까?”

간호사가 클립보드를 들고 다가왔다.

젊은 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한지유 양...

오후 3시 47분에 운명하셨습니다.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깊은 조의를 표합니다.

그 말이 무슨 의미인지 지오는 알 수 없었다.

아니, 알고 싶지 않았다.


한지유. 19세. 대학교 1학년.

어제까지만 해도 “오빠, 저녁 뭐 먹을래?”하고 웃던 동생.

이제 영원히 웃지 않을 동생.

“안돼.”

지오의 입에서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세상이 무너져 내렸다.

“안돼... 지유야... 안돼...”

그날 밤,

지오는 울었다.

그다음 날도, 또 그다음 날도.

나흘째 되던 날,

지오는 더 이상 울 수 없었다.

눈물이 말랐다.

목소리가 쉬었다.

하지만, 고통은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심해졌다.

나는 이걸 견딜 수 없어.

나는 이 슬픔을 견딜 수 없어.


다섯째 날 아침,

지오는 감정은행을 찾았다.

“제 감정을... 팔고 싶습니다.”

“어떤 감정이십니까?”

“슬픔이요. 그리고... 그리움도요. 전부 다요.”

E.E.S 스캐너가 작동했다.

지오는 느낄 수 있었다.

가슴속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가는 느낌을.

마치 심장 한쪽이 비워지는 것 같은.

진한 남색 앰플에 슬픔이 담겼다.

회색빛 앰플에 그리움이 담겼다.

그리고 그 순간.

지오의 가슴에서 고통이 사라졌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더 이상 여동생을...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았다.

공허함만 남았다.

“지유야. 나는 이제... 너를 그리워할 수조차 없어.”


현재.

홀로그램 화면에 “검색 결과가 나왔습니다.”

홀로그램 화면에 노인의 감정 추적 결과가 떠올랐다.

감정 ID: EMO-20450523-00147

종류: 설렘(Romance/First Love)

추출일: 2045년 5월 23일

추출자: 김○○(당시 25세)

초기 순도: 96.2%


거래 이력:

2045년 6월 초기 판매: 960,000원

2055년 3월 재판매(순도 94.1%)

2068년 8월 재판매(순도 91.3%)

2088년 12월 재판매(순도 88.7%)

2095년 3월 암시장 유입(순도 94.8%)

“이상합니다.”

“감정은 시간이 지날수록 순도가 떨어집니다.

50년이나 된 감정이라면 50% 이하로 떨어져야 정상입니다.

하지만...”

“2088년에 88.7%였던 순도가 2095년에 94.8%로 증가했습니다.

이건 불가능합니다.”

“그게 무슨 뜻이오?”

“누군가 이 감정을 조작했다는 뜻입니다.”

“감정 재생 기술이라는 게 있습니다.

오래된 감정을 인위적으로 강화하는 기술이죠.

하지만 이건 불법입니다.”


최종 거래처: 블랙 필(Black Feel) - 암시장

위치: 추적 불가.

“귀하의 감정은 현재 암시장에 있습니다.”

“암시장?”

“불법 감정을 거래하는 곳입니다.

살의, 광기, 복수심 같은

금지된 감정들이 오가는 곳이죠.”

“재생된 오래된 감정은‘빈티지 감정’이라고 불립니다.

특히 2040년대 감정은‘디지털 이전 시대의 순수한 감정’이라며 암시장에서 비싸게 팔립니다.”

“그럼... 내 감정을 되찾을 수 없단 말이오?”

지오는 노인을 바라봤다.

노인의 눈에는 절망이 서려있었다.

8년 전 자신도 저런 눈을 하고 있었을까?

“... 방법이 없지는 않습니다.”

“정말이오?”

“암시장에 직접 접촉해야 합니다.

불법이고, 위험하지만... 가능은 합니다.”

노인은 지오의 손을 꽉 잡았다.

그 손은 떨리고 있었다.

“부탁하오. 제발 도와주시오.

나는... 죽기 전에 그 감정을 느껴보고 싶소.

내가 살아있었다는 걸 확인하고 싶소.”

지오는 노인의 손을 내려다봤다.

간절함.

그것이 무엇인지 지오는 알지 못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가슴 한쪽이 미세하게 흔들리는 것 같았다.

8년 만에 처음으로.

“... 예 알겠습니다.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날 저녁.

지오는 강남역 근처의 좁은 골목에 서 있었다.

네온사인 하나 없는 낡은 건물. 1층에 작은 간판.


감정 클리닉(Emotion Clinic)

복도 끝, 작은 방.

중년 남성. 검은 선글라스. 여유로운 미소.

“어서 오세요. 첫 방문이시군요.”

남자는 화면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

“2045년 빈티지 설렘?

아, 이거 최근에 우리가 취급한 물건이네요.

비싸게 팔렸죠?”

“누구한테 팔렸습니까?”

“그건 고객 정보라서요.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남자는 선글라스를 벗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지오를 꿰뚫었다.

“당신, 재밌는 사람이네요.

감정도 없으면서 이렇게까지 집착하다니.”

“... 어떻게 알았습니까?”

“눈빛을 보면 알아요. 당신 눈에는 아무것도 없어요.

텅 비어있죠.

그런 사람이 왜 다른 사람의 감정을 찾아다니는 거죠?

남자가 명함을 꺼내 건넸다.


레오 Black Feel Brok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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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 받아두세요. 언젠가 필요할 테니까.”

“무슨 뜻입니까?”

레오가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신, 곧 알게 될 거예요.

감정은행이 숨기고 있는 비밀들을.

그리고 당신 여동생에 대한 진실을.”

지오의 심장이 멎는 것 같았다.

“여동생을... 어떻게...?”

“한지유. 8년 전 교통사고로 사망.

하지만 그게 사고가 아니었다면?”

레오는 일어서서 문을 열었다.

“오늘은 그만 가시죠.

하지만 조만간 다시 오게 될 거예요.

진실이 궁금해질 테니까.”

지오는 명함을 쥔 채 밖으로 나왔다.

밤거리는 차갑고 어두웠다.

하지만 지오의 머릿속은 혼란스러웠다.

여동생의 사고가... 사고가 아니었다고?

그게 무슨 뜻이지?

그날 밤, 지오는 잠들 수 없었다.

8년 만에 처음으로‘무언가’를 느끼고 있었다.

그것이 무엇인지 이름을 붙일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가슴속 깊은 곳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다음 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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