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각성 (Awakening)
1화: 감정의 가격(The Price of Emotions)
2095년 서울의 아침은 홀로그램으로 시작된다.
거대한 광고판들이 도시 전체를 황금빛, 남색, 분홍빛으로 물들인다.
아침 통근길의 사람들은 각자의 손목에 찬 감정주입기를 확인한다.
오늘은 어떤 감정을 주입할까?
업무용 집중력?
사교 모임을 위한 유쾌함?
아니면 데이트를 위한 설렘?
하늘을 찌를 듯 솟은
Emotion Bank Tower.
감정은행 본부.
한지오는 오늘도 이곳으로 출근한다. 회색 정장, 흰 셔츠, 무채색 넥타이.
27세 남성의 얼굴에는 어떤 표정도 없다.
아니,
정확히는 표정을 지을 수 없다.
감정이 없으니까.
“지오씨, 안녕하세요!”
복도에서 마주친 동료가 밝게 인사한다.
그녀의 손목 주입기에는 노란빛‘유쾌함’ 캡슐이 반짝인다.
오늘의 기분을 30만 원에 구매한 것이다.
지오는 고개만 끄덕이고 지나간다.
인사를 나눈 것. 미소를 짓는 것. 호감을 표현하는 것.
그 모든 것이 그에게는 단지‘사회적 프로토콜’ 일뿐이다.
느낌이 없다. 기쁨도, 친근함도, 따뜻함도.
아무것도.
감정은행 로비는 아침부터 웅성거린다.
투명한 유리 진열장 안에는 수백 개의 감정 앰플이 빛난다.
마치 고급 향수 매장처럼,
아니 그보다 더 아름답게.
황금빛 오렌지 – 기쁨.
깊은 남색 – 슬픔.
진홍빛 적색 – 분노.
핑크 펄 광택 – 사랑.
하늘색 – 평온.
검은 보라 – 공포.
연둣빛 – 희망.
각 앰플 옆에는 가격표가 붙어있다.
기쁨 1회분, 48시간 지속, 50만 원.
평온 프리미엄, 1주일 지속, 120만 원.
사랑의 설렘, 72시간 지속, 80만 원.
모든 감정에는 가격이 있다.
지오는 자신의 사무실로 향하며 이 광경을 무표정하게 지나친다.
8년째 보는 풍경이다.
8년 전,
그가 이곳에서 자신의 모든 감정을 팔아버린 그날 이후.
“제 아내의 생일이...”
상담실에 들어선 첫 고객은 40대 중반의 중년 남성이었다.
깔끔하게 차려입었지만 어딘가 지쳐 보이는 얼굴.
손에 든 서류가방. 회사원일 것이다.
지오는 책상 맞은편에 앉은 남성을 바라본다.
관찰한다. 분석한다.
감정이 아니라 데이터로.
“어떤 감정을 원하십니까?”
“아내를 볼 때... 다시 설레고 싶어요.”
남성의 목소리에는 무언가가 묻어 있다.
지오는 그것이‘그리움’이라는 감정이라는 것을‘안다’.
하지만‘이해’ 하지는 못한다.
이해하려면 감정이 필요하니까.
“결혼하신 지 몇 년이십니까?”
“15년입니다.”
“자녀는요?”
“둘입니다. 중학생, 초등학생.”
지오는 태블릿을 조작한다.
홀로그램 화면에 다양한 ‘설렘’ 상품이 뜬다.
스탠더드, 프리미엄, 럭셔리...
각각의 순도와 지속시간, 가격이 표시된다.
“프리미엄 설렘 감정을 추천드립니다.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그 설렘과 유사한 순도 95.3%입니다.
지속시간은 72시간. 가격은 80만 원입니다.”
지오는 진열장에서 분홍빛 앰플을 꺼내 남성 앞에 놓는다.
속에서 반짝이는 분홍 입자들.
누군가의 설렘이다.
누군가 실제로 감정을 추출해서 상품화한 것.
남성은 그 앰플을 한참 바라본다.
“가짜라는 걸 알아요.”
남성이 작게 웃는다.
“구매한 감정이잖아요. 진짜 감정이 아니라”
“... 네.”
“그래도 필요해요. 아내에게 미안해서요.
요즘 제가...
너무 무감각해졌어요.
일만 하다 보니까. 집에 가도 피곤하고.
아내를 봐도
아무 감정이 안 들고.
그게 너무 미안해요.”
지오는 대답하지 않는다.
대답할 수 없다.
그는‘미안함’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8년 전에 그 감정도 함께 팔아버렸으니까.
“구매하시겠습니까?”
“네. 구매할게요.”
결재가 완료되고 남성은 앰플을 들고 일어선다.
문을 나서기 직전, 남성이 돌아본다.
“당신은... 감정을 느끼시나요?”
지오는 자신의 손목을 내려다본다.
감정주입기의 다섯 개 슬롯.
모두 텅 비어있다.
“아니요. 저는 감정이 없습니다.”
“... 그렇군요. 실례했습니다.”
문이 닫힌다.
혼자 남은 지오는 창밖을 바라본다.
저 아래 거리에서 사람들이 오간다.
누군가는 웃고,
누군가는 울고,
누군가는 화를 내고,
누군가는 사랑에 빠진다.
지오는 그 모든 것을‘본다’. 하지만‘느끼지’ 못한다.
8년 전
그날의 기억은 선명하다.
감정은 사라졌지만 기억은 남았으니까.
병원 복도의 차가운 형광등.
영안실로 향하는 복도.
그곳에 누워있는 19세 소녀.
한지유. 그의 여동생.
교통사고였다.
횡단보도를 건너다가 신호를 무시한 트럭에 치였다.
즉사.
장례식장에서 지오는 울지 못했다.
아니, 울음이 멈추지 않았다.
나흘 밤을 꼬박 울었다.
눈물이 마를 때까지.
목소리가 쉴 때까지.
가슴이 찢어질 것 같을 때까지.
다섯째 날 아침,
지오는 감정은행을 찾았다.
“판매 상담입니까, 구매 상담입니까?”
“... 판매입니다.”
“어떤 감정을 판매하시겠습니까?”
지오는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슬픔이요. 그리고... 그리움도요. 전부 다요.”
상담원은 E.E.S.(Emotion Extraction System) 스캐너를 지오의 이마에 댔다.
뇌파 스캔이 시작되고, 그이 감정이 추출된다.
진한 남색 앰플 – 슬픔.
회색빛 앰플 – 그리움.
두 앰플 모두 짙고 진했다.
상담원이 감탄하듯 말했다.
“순도가 매우 높네요. 특히 이 슬픔은... 98.9%입니다.
프리미엄급이에요.”
“... 얼마를 받을 수 있죠?”
“총 500만 원에 매입하겠습니다.”
지오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그 순간,
지오의 가슴에서 무언가가 빠져나갔다.
슬픔이 사라졌다.
그리움도 사라졌다.
더 이상 눈물이 나지 않았다.
더 이상 가슴이 아프지 않았다.
더 이상 여동생을 그리워하지 않았다.
고통은 사라졌다.
하지만 동시에,
그는 여동생을‘사랑했다’는 느낌도 잃어버렸다.
밤이 되어 집으로 돌아온 지오는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봤다.
손목의 감정주입기는 텅 비어 있었다.
지유야... 미안해.
나는 이제... 너를 그리워할 수조차 없어.
현재.
진한 남색 앰플 – 슬픔.
오후의 상담은 계속 이어진다.
20대 초반의 청년이 찾아온다.
구겨진 정장, 불안한 눈빛...
“내일... 대기업 최종 면접이에요. 제발 붙고 싶어요.
자신감을 주세요.”
지오는 빨간색 자신감 앰플을 건넨다.
48시간 지속, 45만 원.
30대 여성이 찾아온다. 검은 옷, 왼손에 결혼반지 자국.
“이혼 후... 매일 밤 잠을 잘 수가 없어요.‘평온함’을 주세요.”
지오는 하늘색 평온함 앰플을 건넨다. 일주일 지속, 120만 원.
그리고 오후 4시,
정아라가 찾아온다.
문을 벌컥 열고 들어선 그녀는 헝클어진 머리에 다크서클이 깊다.
손목의 감정주입기에는 핫핑크와 보라색 캡슐이 과부하 상태로 깜박인다.
“제발... 더 주세요!”
그녀가 책상을 탁 친다.
“쾌락! 황홀함! 뭐든지!”
“정아라 씨. 이번 달 한도를 초과하셨습니다.”
“돈은 있어요! 집도 팔았어요! 제발 주세요!”
지오는 그녀를 바라본다.
감정중독자.
쾌락 감정에 중독되어
이제는 일상적인 행복을 느낄 수 없는 사람.
더 강한 자극, 더 강렬한 쾌락만을 찾아 헤매는 사람.
“죄송합니다. 법적으로 제공할 수 없습니다.”
“제발요! 제발!” 아라가 울먹인다.
“감정 없이는 못 살아요!”
“아무것도 느껴지지 않아요!”
경비가 그녀를 끌고 나간다.
복도에 그녀의 울음소리가 메아리친다.
감정 없이는 못 살아요.
그 말이 그의 머릿속에 맴돈다.
하지만 아무 감정도 일어나지 않는다.
정도, 연민도, 슬픔도, 아무것도.
저녁 6시. 퇴근 시간이 다가온다.
지오는 사무실 책상을 정리하며 오늘의 업무일지를 작성한다.
판매한 감정 15건, 매입한 감정 3건, 총매출 1,200만 원.
평범한 하루다.
그때, 사무실 문이 열린다.
“실례하겠습니다.”
낮고 차분한 목소리, 지오가 고개를 든다.
70대 후반으로 보이는 노인이 서 있다.
깔끔한 양복, 은색 지팡이,
그리고 역광을 받아 얼굴이 잘 보이지 않는 실루엣.
“VIP 고객이십니까?”
“그렇다고 할 수 있지.”
노인이 천천히 들어와서, 지오 맞은편에 앉는다.
가까이서 본 노인의 얼굴에는 깊은 주름이 새겨져 있다.
하지만 눈빛만큼은 젊고 또렷하다.
그리고 그 눈에는... 무언가가 담겨있다.
지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안다’. 하지만 이름을 붙일 수 없다.
그는 그 감정을 느껴본 적이 없으니까.
“무엇을 도와드릴까요?”
노인은 잠시 침묵한다. 창밖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연다.
“50년 전에 판 내 감정을 되찾고 싶소.”
“... 50년 전이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소. 2045년. 내가 스물다섯이었을 때.”
지오는 태블릿을 켠다.
감정 추적 시스템에 접속한다.
“어떤 감정이십니까?”
“설렘이오.” 노인이 작게 미소 짓는다.
“첫사랑에게 고백하던 그 순간의 설렘.”
“... 50년 전 감정이라면 추적이 매우 어렵습니다.
이미 소멸되었거나,
여러 차례 재거래되었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알고 있소. 하지만 찾고 싶소. 죽기 전에...
그 감정을 한 번 더 느껴보고 싶소.”
지오는 노인을 바라본다.
노인의 눈에 담긴 그것.
그것의 이름은‘간절함’이었다.
밤 11시.
지오는 혼자 남은 사무실에서 홀로그램 화면을 응시한다.
감정 추적 시스템. 2045년 5월 23일.
감정 ID: EMO-20450523-00147.
“설렘”감정, 순도 96.2%, 25세 남성으로부터 추출.
거래 이력을 따라간다.
2045년 추출 ⇒ 2045년 첫 판매 ⇒ 2051년 재거래 ⇒
2063년 재거래 ⇒ 2078년 재거래 ⇒... ⇒ 2095년 최근 거래.
지오의 눈이 커진다.
“이상하다..”
50년 전 감정이 최근에 다시 거래되었다.
그것도 불과 한 달 전에.
감정은 추출되고 판매되면 시간이 지나면서 순도가 떨어진다.
50년이나 된 감정이라면 거의 소멸되었거나,
순도가 30% 이하로 떨어져 있어야 한다.
하지만 이 감정은 최근 거래 기록을 보니 순도가 여전히 94.8%다.
불가능하다.
지오는 더 깊이 추적한다. 최근 거래처를 확인한다.
그리고 화면에 뜬 주소를 보고 숨이 멎는다.
거래처: 블랙필(Black Feel) - 암시장
암시장.
합법 감정은행이 아닌,
금지된 감정들을 거래하는 불법시장.
살의, 광기, 복수심, 금지된 사랑...
법으로 거래가 금지된 위험한 감정들이 오가는 곳.
왜 50년 전의 평범한 ‘설렘’ 감정이 암시장으로 흘러들어 간 걸까?
지오는 화면을 응시한다.
무표정한 얼굴.
하지만 그의 내면 깊은 곳에서,
감정이 아닌 ‘의문’이 싹튼다.
무언가 이상하다. 무언가 잘못되었다.
그리고 그 순간, 지오는 알지 못한다.
이 의문이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놓을 거라는 것을.
8년 만에 그가 다시‘무언가를 느끼게’될 거라는 것을.
화면이 어두워진다.
지오의 손목에 찬 텅 빈 감정주입기가 희미하게 빛난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