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필(Black Feel)

시즌 1 - 각성(Awakening)

by 이용주

5화: 해커 서은별(Hacker Seo Eun-byul)


다음날 아침,

지오는 평소보다 일찍 감정은행에 출근했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8년 만에 처음으로‘목적’이 있었다.

레오가 건넨 USB를 주머니에 넣고,

그는 감정은행 본부의 거대한 로비를 가로질러 갔다.

평소라면 단순히 지나쳤을 광경들이 오늘은 다르게 보였다.

사람들이 감정을 사고파는 모습, 전광판에 흐르는 감정 시세,

진열장 속 아름다운 앰플들.

이 모든 것이 거대한 통제 시스템의 일부였다는 것을.


프로젝트 제로... 사람들의 저항 의지를 없애는 계획...

엘리베이터를 타고 15층 브로커 사무실로 올라가는 동안,

지오는 계획을 정리했다.

레오가 말한 대로라면,

감정은행의 중앙 데이터베이스에 프로젝트 제로의 모든 증거가 저장되어 있다.

하지만 일반 브로커 계정으로는 접근할 수 없다.

해커가 필요했다.


오전 9시 30분. 브로커 사무실.

사무실에 들어서자 마자, 지오는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동료들의 시선이 평소와 달랐다.

수군거리는 소리, 긴장한 분위기.

“지오씨!”

정수진이 다급하게 다가왔다.

“큰일 났어요. 어젯밤에 시스템 해킹 사건이 있었대요!”

“해킹?”

“네. 누군가 감정은행 보안 시스템에 침투했다가 발각됐어요.

지금 보안팀이 난리예요.

모든 브로커의 접근 기록을 조사하고 있다고...”

지오의 심장이 빨라졌다. 설마 레오와 관련된 일인가?

“범인은 잡혔나요?”

“그게... 아직 정체를 못 찾았대요.

너무 실력이 좋아서 흔적을 거의 안남겼다고.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수진이 목소리를 낮췄다.

“내부 협력자가 있을 거라고 의심하고 있어요.”

지오는 애써 평정을 유지했다.

“그래서 오늘 업무에 지장이 있을까요?”

“당분간 보안 등급이 높아진대요.

모든 시스템 접근이 기록되고,

정기적으로 보안 검사를 받아야 한다고...”

바로 그때, 사무실 입구에서 소란이 일었다.

“모든 브로커는 자리에 앉아주세요!”

검은 정장을 입은 보안팀원들이 들어왔다.

그들의 손목에는 특수한 감정 주입기가 차여 있었다.

지오는 그것이 무엇인지 알았다.

‘무감정 상태’유지용 주입기.

보안 요원들은 임무 수행 중 감정의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 사용했다.

“어제 밤 해킹 사건과 관련하여 전 직원 조사를 실시합니다.

한 명씩 면담을 진행하겠습니다.”

보안팀장이 발표했다.

“조사가 끝날 때까지 아무도 사무실을 나갈 수 없습니다.”

지오는 자리에 앉으며 주위를 둘러봤다.

20명의 브로커들이 모두 긴장한 표정이었다.

그런데 한 사람만 예외였다.

구석자리에 앉은 젊은 여성.

짧은 보브컷 머리에 검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태블릿을 만지작거리며 오히려 지루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저 사람은 누구지? 브로커 팀에 저런 사람이 있었나?

오전 11시. 개별 면담 시작.

보안팀은 알파벳 순서로 면담을 진행했다.

지오의 차례는 한참 후였다.

그 사이 지오는 그 여성을 관찰했다.

나이는 20대 중반쯤으로 보였다.

손목에는 감정 주입기가 없었다.

아니, 정확히는 개조된 무언가가 차여 있었다.

그녀가 태블릿을 조작할 때마다

화면에서 이상한 코드들이 스쳐 지나갔다.

설마...

점심시간이 되자,

보안팀은 잠시 면담을 중단했다.

하지만 여전히 사무실을 나갈 수는 없었다.

지오는 용기를 내어 그 여성에게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저는 한지오입니다.

같은 팀인 것 같은데 처음 뵙네요.”

여성이 고개를 들었다. 날카로운 눈빛이 지오를 훑어봤다.

“서은별이예요. 어제 임시로 배치된 신입이죠.”

그녀의 목소리는 차갑고 건조했다.

“어제 배치?”

“감정 거래 시스템 보안 강화 때문에 IT팀에서 파견 나왔어요.”

은별이 태블릿을 끄며 지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그런데 한지오 브로커... 어젯밤에 야근하셨나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지오는 당황했다.

“왜 그런 걸 물어보시죠?”

“아니예요. 그냥... 보안 로그를 보니까

어젯밤 늦게까지 시스템에 접속한 브로커가 있더라구요.”

“혹시 그게 한지오 브로커는 아니겠죠?”

지오는 그녀를 자세히 바라봤다. 무언가 이상했다.

일반 IT팀원이라면 브로커의 개별 접속 기록을 왜 확인하고 있는가?

그리고 그 태블릿의 화면...

일반적인 업무용 프로그램은 아니었다.

“실은... 제가 어젯밤 해커예요.”

은별이 갑자기 속삭였다.

“뭐라고요?”

“쉿. 조용히 해요.

저 보안팀들이 찾고 있는 해커가 바로 저예요.”

지오는 충격을 받았다.

“그럼 왜 여기에...”

“가장 안전한 곳이잖아요. 등잔 밑이 어둡다고.

아무도 해커가 감정은행 내부에 숨어있을 거라곤 생각 안해요.”

은별이 태블릿을 다시 켰다.

화면에는 복잡한 코드들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실시간 해킹 실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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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이 순간에도 그들의 시스템을 해킹하고 있었다.”

은별이 자랑스럽게 말했다.

“보안팀이 저를 찾는 동안,

저는 그들의 코앞에서 핵심 데이터에 접근...”

“왜... 왜 저한테 이런 이야기를 하시는 거예요?”

“당신이 필요해서요.”

은별이 진지한 표정이 되었다.

“한지오, 당신 어젯밤에 레오를 만났죠?”

지오의 심장이 멈췄다.

“어떻게...”

“레오가 저를 보냈어요. 당신을 도우라고.”

“3년 전부터 레오와 일해 왔어요. 프로젝트 제로를 막기위해서...”

“제 부모님도 그들이...”

“부모님이...”

“감정 중독이었어요.”

“처음에는 아버지는 업무 스트레스 때문에

‘평온함’을 사기 시작했죠.

그 다음엔 어머니도...”

“점점 더 강한 감정이 필요해졌어요.

집도 팔고, 빚도 내고...

마지막엔 절망밖에 남지 않았죠.”

“그래서 동반 자살을 했어요. 저 혼자 남겨두고.”

은별의 목소리에 미세한 떨림이 있었다.

“그때부터 결심했어요. 이 시스템을 무너뜨리겠다고.”

“그래서 해킹을 배웠고, 레오와 만났고...

오늘 당신을 만나게 된 거예요.”

바로 그때, 보안팀장의 목소리가 사무실에 울려퍼졌다.

“한지오 브로커! 면담실로 오세요!”

지오는 은별을 바라봤다.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그냥 평소대로 하세요. 저는 여기서 작업을 계속할께요.”

은별이 태블릿을 가리켰다.

“면담이 끝나면 만나요. 중요한 걸 보여드릴 게 있어요.”


오후 2시. 보안 면담실.

면담실은 차갑고 무미건조했다.

보안팀장과 두 명의 요원이 지오 맞은편에 앉아 있었다.

그들의 눈에는 감정이 전혀 없었다.

“한지오 브로커, 어젯밤 9시부터 12시까지 어디에 있었습니까?”

“집에 있었습니다.”

“증명할 수 있습니까?”

“혼자 살아서... 증인은 없습니다.”

보안팀장이 태블릿을 확인했다.

“시스템 로그를 보니까 어젯밤 10시47분에 당신 계정으로 접속 기록이 있네요.”

지오의 심장이 빨라졌다.

하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했다.

“그건 불가능합니다. 저는 집에서 쉬고 있었거든요.”

“그럼 누군가 당신 계정을 도용했다는 말입니까?”

“그런 것 같네요. 비밀번호를 바꿔야겠습니다.”

보안요원 중 하나가 특수한 기계를 꺼냈다.

“감정 스캐너입니다.

거짓말을 하면 뇌파에서 특정 패턴이 나타나죠.”

지오는 긴장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두려움이 느껴지지 않았다.

8년 동안 감정이 없었던 습관 때문인지,

아니면 진짜로 평정을 유지하고 있는건지...

“어젯밤에 감정은행시스템에 불법 접근을 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기계에서 부저 소리가 났다. 정상 범위

“해킹과 관련된 단체나 개인과 접촉한 적이 있습니까?”

“없습니다.”

다시 정상 범위.

보안팀장이 미심쩍은 표정을 지었다.

“감정이 전혀 없네요. 이상하군.”

“제가 8년 전에 모든 감정을 판매했습니다.

기록을 확인해 보세요.”

한 요원이 확인했다.

“맞습니다. 2087년 슬픔과 그리움을 대량 판매한 기록이 있네요.

그래서 감정 반응이 없는 거군.”

보안팀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좋습니다. 면담을 마치겠습니다.

하지만 당분간 시스템 접근을 제한하겠습니다.”

“며칠 정도요?”

“해킹 수사가 끝날 때까지. 아마 일주일 정도?”

지오는 내심 안도했다. 일단 의심을 피한 것 같다.

면담실을 나오며, 그는 생각했다.

감정이 없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된 것일까?


오후 5시. 사무실 화장실.

모든 면담이 끝난 후, 지오는 은별과 만날 장소를 찾았다.

화장실이 가장 안전할 것 같았다. CCTV도 없고, 도청 장치도 없을테니까.

은별이 이미 와 있었다.

“면담 어땠어요?”

“다행히 넘어간 것 같아요.

감정이 없는 게 오히려 도움이 됐네요.”

“좋네요. 그사이 저는 대박을 터뜨렸어요.”

은별이 태블릿을 보여줬다.

은별이 파일을 열었다.

지오의 세계가 무너져 내렸다.

여동생이 정말로... 살해당한 것이었다.

사고가 아니라 계획된 암살이었다.

8년 동안 자신이 느낀 죄책감이...

모든 것이 무의미했다는 말인가?


지유야... 너는... 영웅이었구나.

세상을 바꾸려다 죽은 거였구나.

갑자기 가슴 속에서 무언가가 폭발했다.

8년 만에 처음으로 느끼는 강렬한 감정. 분노.

순수하고 뜨거운 분노가 온몸을 휘감았다.

“저들을... 반드시...”

지오의 목소리가 떨렸다.

“반드시 무너뜨려야 해요.”

은별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당신이 필요한 거예요. 내부자로서.”

“뭘 해야 하죠?”

“시스템 접근이 막혔지만, 물리적인 침투는 가능해요.

지하 20층에 프로젝트 제로의 핵심 서버가 있어요.”

은별이 건물 구조도를 보여줬다.

“거기서 모든 증거를 확보하고,

전 세계에 동시 송출하는 거예요.”

“언제요?”

“이번 주말. 토요일 밤에 건물이 가장 한적할 때.”

은별이 지오를 똑바로 바라봤다.

“위험해요. 잡히면... 당신 여동생처럼 될 수도 있어요.”

지오는 주저하지 않았다.

“상관없어요. 지유가 못다한 일을 제가 마저 하겠어요.”

“그럼 내일부터 준비해요.”

은별이 손을 내밀었다.

“같이 싸워요. 진짜 감정을 되찾기 위해서.”

지오는 그녀의 손을 잡았다.

8년 만에 처음으로 다른 사람과 연대감을 느꼈다.

감정 주입기 없이도, 구매한 감정 없이도 느낄 수 있는 진짜 감정이었다.


지유야, 이제 오빠가 네 뜻을 이어받을께.

이 썩은 시스템을 반드시 무너뜨리겠어.

그날 저녁, 지오는 혼자 집에 앉아 여동생의 사진을 바라봤다.

19세의 밝은 미소. 꿈에 가득 찬 눈빛. 정의감 넘치는 표정.

8년 전, 그는 여동생의 죽음을 받아들일 수 없어서

모든 슬픔을 팔아 버렸다.

하지만 이제 알았다.

슬픔은 팔 것이 아니라 간직할 것이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기억하는 방법이었다.

분노는 억누를 것이 아니라 행동의 원동력으로 삼을 것이었다.

희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만드는 것이었다.

“지유야, 오빠가 늦었어.”

지오가 사진에 대고 말했다.

“8년 동안 멍하게 살았어. 하지만 이제 깨달았어.”

“네가 무엇을 위해 죽었는지, 오빠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창밖으로 서울의 밤이 흘러갔다.

수많은 사람들이 오늘도 가짜 감정을 주입하며 잠들 것이다.

진짜 자신이 누구인지도 모른 채, 무엇을 원하는지도 모른 채.

하지만 곧 모든 것이 바뀔 것이다.

진실이 세상에 알려질 것이다.

그리고 사람들은 다시 진짜 감정을 되찾게 될 것이다.

지오는 자신의 손목을 바라봤다. 텅빈 감정 주입기.

하지만 이제는 비어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가슴 속에서 뜨겁게 타오르는 진짜 감정들이 있었으니까.

분노. 슬픔. 사랑. 희망.

그리고 무엇보다도... 자유를 향한 갈망.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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