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즌 1 - 각성(Awakening)
22화: 의심의 씨앗
체류 6시간 경과. 지하시설 중앙 식당.
넓은 식당에는 50여 명의 지원자들이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공기는 온화했고, 사람들의 표정은 평온했다.
너무나도 평온해서 오히려 이질감이 들 정도였다.
지오는 리 박사와 함께 테이블에 앉아 그들을 관찰했다.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가벼운 농담, 일상적인 대화.
그 어디에도 ‘조종당하는’ 느낌은 없었다.
박민호(35세. 전직 특수부대원)
건장한 체격의 남성이 지오에게 말을 걸었다.
그는 PTSD로 인해 10년간 악몽과 환각에 시달려왔다고 했다.
“재구축 후에는 잠을 푹 잡니다. 환각도 사라졌고요.
이제는 신입 경비원들을 가르치는 교관으로 일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당신의 진짜 감정이 그립지 않나요?
두려움도 인간의 일부잖아요.”
지오의 질문에 민호는 온화하게 미소 지었다.
“진짜가 뭐죠? 저를 마비시켜서 아무것도 못하게 만들던 공포가 진짜인가요?
아니면 저를 살아가게 해주는 지금의 평온함이 진짜인가요?”
지오는 대답할 수 없었다.
김소영(42세, 사고 유가족)
맞은 편의 여성은 2년 전 교통사고로 아이를 잃었다고 했다.
그녀는 당시 자살 충동으로 매일이 고비였다고 고백했다.
“지금은 고아원에서 봉사활동을 해요.
아이들을 보면 행복합니다.”
“따님이 그립지 않으세요? 슬픔을 잊는다는 건...?”
“기억해요, 사랑하고요.
하지만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아요.
그게 제 딸이 원하는 모습 아닐까요?
제가 고통 속에서 죽어가는 것보다,
이렇게 웃으며 다른 아이들을 돕는 것 더 원하지 않을까요?”
지오는 흔들렸다. 8년 전 여동생을 잃었을 때의 자신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만약 그때 이런 선택지가 있었다면? 자신은 거절할 수 있었을까?
심야. 게스트룸.
지오는 잠들 수 없었다. 침대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았다.
‘김중석 노인은 리 박사가 감정을 결함으로 본다고 했어.
하지만 이 사람들은 행복해 보여. 진짜로 행복해 보여.’
8년 전, 지오가 자신의 슬픔을 팔았을 때도 그는 기능했다.
일도 했고, 밥도 먹었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런데 이곳의 사람들은 달랐다.
그들은 ‘살아 있는’ 것처럼 보였다.
‘만약 리 박사가 옳은 거라면? 우리가 틀렸다면?’
하지만 지오의 본능은 여전히 경고음을 울리고 있었다.
너무 완벽했다. 그림자가 없는 빛은 존재할 수 없다.
지오는 조용히 방문을 열었다. 잠겨있지 않았다.
이것조차 리 박사의 시험일까?
그는 저녁 식사 때 몰래 챙긴 김소영의 출입 카드를 손에 쥐고
복도로 나갔다. 낮에 눈 여겨봐 둔 구역이 있었다.
지하 3층. 제한 구역.
경비는 허술했다.
아니, 리 박사는 지오가 이곳을 찾을 거라 예상하고 일부러 비워둔 것 같았다.
문에는 [피실험자 모니터링 실 – 관계자 외 출입 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있었다.
지오는 카드를 긁고 안으로 들어갔다.
거대한 서버실.
벽면 가득한 모니터에는 수천 명의 데이터가 흐르고 있었다.
지오는 메인 터미널에 접속해 장기 추적 데이터를 열었다.
프로젝트 페이즈 3: 장기 안정성 보고서
[1년 차] 성공률: 100%(전원 감정 안정)
[2년 차] 성공률: 87%(13% 감정 평탄화 증후군 발현)
[3년 차] 성공률: 65%(35% 심각한 부작용 발생)
[5년 차] 성공률: 40%(60% 붕괴 단계 진입)
붕괴 증상: 완전한 감정 사멸. 동기 부여 상실. 식물인간 상태.
조치: 폐기 또는 생명 유지 장치 전환(제7병동)
“세상에...”
성공률 40%. 그것도 시간이 지날수록 급격히 떨어진다.
유나나 민호처럼 ‘성공적’인 사례들은
모두 최근 1-2년 내에 시술받은 사람들이었다.
지오는 ‘제7병동’의 위치를 확인했다.
바로 옆 구역이었다.
제7병동: 실패작들의 무덤
문이 열리자 차가운 냉기가 뿜어져 나왔다.
그곳에는 수백 개의 포드가 정렬되어 있었다.
하지만 로비의 밝은 포드들과는 달랐다.
이곳의 포드는 검은색이었고,
안에 든 사람들은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기계장치만이 그들의 심장을 억지로 뛰게 하고 있었다.
눈은 뜨고 있었지만, 동공은 풀려 있었다.
영혼이 증발해 버린 육체 껍데기들.
그들 중에는 ‘유나’의 조기 테스트 모델이었던 사람도 있었다.
“진실을 찾으셨군요.”
지오가 화들짝 놀라 뒤를 돌아보았다.
사라 강 박사가 서 있었다.
그녀는 지오를 체포하는 대신, 힘없이 옆의 의자에 주저앉았다.
“리 박사님의 실패를 ‘허용 가능한 손실’이라고 부릅니다.
0%보다는 40%가 낫다는 논리죠.”
“이건 학살입니다. 이 사람들은 살아있는 게 아니에요.”
“알아요. 매일 밤 이들이 제 꿈에 나옵니다.”
사라의 목소리가 떨렸다.
“하지만 저는 남았어요. 왜냐하면... 만약 고칠 수 있다면?
다음 버전이 완벽해진다면?
그 희망 하나 때문에 악마의 조수가 되기를 자처했죠.”
그때, 박수 소리가 들렸다.
리처드 리가 어둠 속에서 걸어 나왔다.
그는 화난 기색이 전혀 없었다.
“좋아. 이제 전체 그림을 다 봤군.”
“이게 당신이 말한 진화입니까? 60%를 식물인간으로 만드는 거요?”
지오가 소리쳤다.
“암 치료의 성공률은 이보다 낮을 때도 있었네.
그래도 우리는 썼지. 모든 의학적 진보에는 희생이 따르는 법이야.”
“이건 통계가 아니라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중 40%는 진정으로 구원받았지.
자네가 본 민호와 소영처럼.”
리처드 리 박사는 지오를 전망 데크로 데려갔다.
아래쪽 기숙사에서는 지원자들이 가족들과 화상통화를 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보게, 저 가족들은 사랑하는 사람을 되찾았어. 자살하려던 딸이,
폭력적이던 남편이 돌아왔어.”
“완벽하진 않아. 하지만 기능하고, 행복해하지.”
“자네가 말해보게. 40%의 구원이 100%의 고통보다 나쁜가?”
지오의 머릿속에 8년 전의 기억이 스쳤다.
한지유. 그녀도 감정을 거래했었다.
어쩌면 그녀는 이 ‘붕괴’의 징조를 느꼈던 게 아닐까?
그래서 진실을 파헤치려다 제거당한 게 아닐까?
“페이즈 3은 30일 뒤에 시작하네. 전 세계 1억 명이 지원했지.”
리 박사가 선언했다.
“그들은 성공률이 95%라고 알고 있어.
그래, 내가 거짓말을 했네.
하지만 그들 중 수천만 명은 실제로 구원받을 거야.
나는 괴물이 아니야.
실용주의자일 뿐이지.”
리 박사는 지오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24시간 남았네. 선택하게.”
“나와 함께 성공률을 높여 60%를 구하든가.”
“아니면 떠나서, 1억 명이 개선되지 않은 구형 치료를 받게 두든가.”
새벽 3시. 정비 구역.
지오는 낡은 통신 단말기를 찾아냈다.
보안이 허술한 구역이었다.
그는 떨리는 손으로 암호화된 메시지를 입력했다.
TO: EUN-BYEOL
MSG: LEE ALIVE. PHASE 3 = 40% SUCCESS, 60% FAILURE.
NEED BACKUP PLAN. 24 HOURS.
전송 버튼을 눌렀다. ‘전송 완료’.
하지만 이 깊은 지하에서 신호가 닿았을지는 알 수 없었다.
숙소로 돌아가는 길.
지오는 복도 구석에 웅크리고 있는 김소영을 발견했다.
낮에 만났던 아이를 잃은 어머니였다.
“소영 씨? 괜찮으세요?”
그녀가 고개를 들었다.
그녀의 눈동자는... 텅 비어 가고 있었다.
“가끔... 아무것도 안 느껴져요. 평온함도, 사랑도, 아무것도,”
지오의 등골이 서늘해졌다.
붕괴가 시작된 것이다.
“이게 정상인가요? 리 박사님께 말하지 마세요.
저를 다시 포드에 넣을 거예요.”
“언제부터 이러셨어요?”
“3일 전부터요. 점점... 어둠이 커져요.”
지오는 확신했다. 리 박사는 틀렸다.
40%의 성공은 영구적인 게 아니다.
그저 붕괴가 늦게 오는 것일 뿐이다.
페이즈 3가 시작되면, 1억 명의 사람들이 시한부 식물인간이 될 것이다.
아침 8시. 리 박사의 집무실.
리 박사가 차를 마시며 지오를 맞이했다.
“결정했나?”
지오는 깊게 숨을 들이마셨다.
그리고 결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네. 결정했습니다.”
“함께 하겠습니다.”
리 박사의 눈이 커졌다. 그리고 곧 만족스러운 미소가 번졌다.
“현명한 선택이야!”
“단, 조건이 있습니다. 모든 데이터를 공개하세요.
실패 원인을 연구하게 해 주세요. 제가 직접 고치겠습니다.”
“물론이지! 함께 완벽하게 만드는 거야!”
리 박사가 손을 내밀었다. 지오는 그 손을 잡았다.
‘가까이 가야 해. 시스템을 이해하고, 약점을 찾아내서, 안에서부터
무너뜨려야 해.’
멀리서 사라 강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그녀는 지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아는 눈치였다.
그녀의 눈이 지오와 마주쳤고, 아주 미세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군이 생겼다.
남은 시간: 24시간 00분.
이제 지오는 내부자가 되었다.
다음화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