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필(Black Feel)

시즌 1 - 각성(Awakening)

by 이용주

25화: 그림자


섬 붕괴 3일 후. 서울 저항군 본부.

지오는 암호화된 메시지를 밤새 분석하고 있었다.

강민우가 모니터를 보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리처드 리의 프로토콜이 아닙니다. 흉내만 냈을 뿐,

기본 구조가 완전히 달라요.”

“그럼 누가 보낸 거죠?”

“리 박사의 이름을 빌려 우리를 조롱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우리의 모든 작전을 알고 있는 사람.”


그때, 은별의 손가락이 키보드 위에서 멈췄다.

그녀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TRACE ROUTE COMPLETE

˃ HOP 49: SINGAPORE

˃ HOP 50: TOKYO

˃ FINAL ORIGIN: SEOUL, DISTRICT 1 [WITHIN 1KM RADIUS]


“발신지가... 서울이야. 그것도 우리 근처.”

적은 바다 건너에 있지 않았다. 이미 그들 곁에 있었다.


2주일 후. 서울.

섬의 붕괴 이후 세상은 평화를 되찾은 듯 보였다.

하지만 지오의 눈에는 기이한 균열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NEWS TICKER

[속보]

강경파였던 김 의원, 돌연 “모든 복지 예산 삭감” 주장 철회...

눈물의 기자회견.

[경제]

K그룹 회장. 수익성 1위 계열사 매각 결정.

“돈보다 중요한 가치를 찾았다.” 발언 논란.

[사회]

유명 앵커. 생방송 중 갑자기 멍한 표정으로 3분간 침묵 방송 사고.


이들은 모두 과거 ‘페이즈 3’ 사건 등록자들이었다.

누군가가 감정을 조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대규모가 아닌, 아주 정밀하고 선택적인 방식이었다.


저항군 비밀 회의실.

“적은 생각보다 가까이에 있습니다.”

지오의 말에 회의실에 긴장감이 감돌았다.

그때 회의실 문이 열리고, 하얀 가운을 입은 여성이 들어왔다.

윤세라 박사(32세).

그녀는 섬 붕괴 사건 이후 소영과 생존자들의 치료를 전담해 온 신경과학자였다.


“제가 도울 수 있을 것 같아요.

생존자들의 뇌파에서 특이한 패턴을 발견했습니다.”

그녀는 차분하고 지적인 태도로 데이터를 제시했다.

레오는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그녀를 보았지만,

지오와 은별에게 그녀는 생명의 은인이나 다름없었다.


그날 밤. 김중석 고문의 방.

갑작스러운 비명 소리에 지오가 달려갔다.

저항군의 정신적 지주인 김중석 고문이 바닥에 쓰러져 경련을 일으키고 있었다.


WARNING: NEURAL ATTACK DETECTED

SYNAPTIC OVERLOAD: 98%


지오가 그를 부축했다.

김 고문의 눈동자가 초점을 잃어가고 있었다.

그는 지오의 옷깃을 움켜쥐고 간신히 속삭였다.


“아무도... 믿지 말게... 그들은 이미... 안에 있어...”


윤세라 박사가 급히 달려와 그에게 주사를 놓았다.

경련이 멈췄지만, 김고문은 의식을 잃었다.


“새로운 형태의 신경 공격이에요.

E.E.S. 와 비슷하지만 훨씬 교묘하군요.”

그녀의 진단은 완벽했다.

지오는 순간적으로 위화감을 느꼈다.


다음 날 아침.

팀은 분열되고 있었다. 레오는 대놓고 윤 박사를 의심했다.


“그 여자가 오고 나서 일이 터졌어!

우연치고 너무 기막히잖아?”

“그녀가 우릴 도왔어, 레오! 그녀가 없었으면 소영이는 죽었을 거야.”


은별이 맞섰다.

지오는 침묵했다.

정수아가 보고서를 들고 뛰어왔다.

“대장님, 서울 시내에서 유사한 발작 증세가 15건이나 더 발생했습니다.

모두 우리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된 사람들이에요.”


‘이건 무작위 테러가 아니다. 정밀 타격이다.’


폐쇄된 병원 지하.

은별이 추적한 미세한 에너지 신호는 서울 외곽의 버려진 병원으로 이어졌다.

지오, 은별, 레오는 어둠을 뚫고 지하로 잠입했다.

낡은 문을 열자,

그들의 눈앞에 믿을 수 없는 광경이 펼쳐졌다.


PROJECT PHASE 4: TARGETED ASSASSINATION

OBJECTIVE: ELIMINATION OF “RESISTANCE FACTORS”

METHOD: NEURO-SYNAPTIC PRECISION STRIKE


그곳은 리처드 리의 연구소보다 더 진보된 장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책상 위에 놓인 연구 노트에는 소름 끼치는 문구가 적혀 있었다.

“리 박사는 99%를 통제하려다 실패했다.

나는 99%를 지배하는 1%만 통제한다.”


함정


철컥.

육중한 철문이 내려와 출구를 막았다.

스피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차분하고, 지적이며, 소름 끼치도록 냉정한 목소리.


“너무 일찍 오셨군요. 한지오 씨.”

유리벽 너머로 윤세라 박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더 이상 친절한 의사가 아니었다.


“당신이었군.”

“리 박사님은 훌륭한 스승이었지만, 너무 이상주의자였죠.

그는 모두를 구하려 했지만, 세상은 그렇게 바뀌지 않아요.

리더들만 바꾸면, 대중은 알아서 따라오게 되어 있죠.”

그녀가 페이즈 4의 리더이자, 리 박사가 숨겨둔 진짜 후계자였다.


WARNING: AEROSOL DISPERSAL INITIATED

SUBSTANCE: E.E.S. COMPOUND TYPE-4


천장의 통풍구에서 쉭하는 소리와 함께 무색무취의 가스가 뿜어져 나왔다.

은별이 다급하게 패널을 해킹하려 했지만, 시스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걱정 말아요. 죽지는 않습니다.

그저... 좀 더 협조적인 사람이 될 뿐이죠.”

지오는 시야가 흐려지는 것을 느꼈다.

분노도, 공포도, 서서히 마비되어 갔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하며 차가운 논리만이 남기 시작했다.


EMOTIONAL OVERRIDE IN

PROGRESS STATUS: 30%... 45%...


레오가 환풍구를 부수려다 쓰려졌다.

은별도 바닥에 주저앉았다.

지오는 마지막 힘을 짜내 유리벽을 향해 손을 뻗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그의 눈동자에서 생기가 사라지고 있었다.

모니터 속의 수치가 80%를 넘어섰다.


“환영해요, 한지오 씨. 페이즈 4에 오신 것을.”

윤세라의 미소가 지오의 흐려지는 의식 속에서 악마처럼 번졌다.

“이제 당신은 나와 함께, 세상을 바꾸게 될 겁니다.”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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