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필(Black Feel)

시즌 1 - 각성(Awakening)

by 이용주

26화: 저항


페이즈 4 오버라이드 진행 중.


지오의 의식은 하얀 안갯속을 부유하고 있었다.

차가운 논리의 파도가 계속해서 밀려왔지만,

어딘가 깊은 곳에 닻을 내린 것처럼 그는 완전히 휩쓸리지 않았다.


EMOTIONAL OVERRIDE: 80%... 85%...

ERROR: COMPLETION FAILED


유리벽 너머에서 윤세라 박사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녀는 모니터를 거칠게 조작했다.


“왜 완료되지 않는 거지? 수치가 90%를 넘지 않아.”

‘나는... 모든 것을 잃었어. 더 이상 뺏길 것도 없어.’


지오는 내면 깊은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것은 역설적이게도 그가 겪은 가장 고통스러운 기억들이었다.

지현의 죽음, 사라의 희생, 은별의 눈물.

그 끔찍한 고통과 죄책감이 그를 붙들고 있었다.

너무나 깊게 새겨진 상처는 인위적인 평온함으로도 덮을 수 없었다.


“오빠, 살아. 모든 걸 느끼면서 살아.”

지현의 마지막 유언.


STATUS: 85%... 82%... 87%... 84%...


서울 저항군 본부.

강민우가 윤세라의 숨겨진 프로필을 찾아냈다.

모니터에 떠오른 그녀의 과거는 충격적이었다.


“그녀는 10년 전, 리 박사의 수제자였어.”


민우의 목소리가 떨렸다.

화면에는 앳된 소년의 사진이 있었다.


“윤세라의 남동생이야. 페이즈 1 초기 실험체였지.

‘감정 과잉’으로 인한 쇼크사... 그녀는 동생의 죽음을 감정 탓으로 돌렸어.”


그녀의 동기는 이상주의가 아니었다.

그것은 차가운 복수심이자 허무주의였다.


“세상을 감정 없는 곳으로 만들려는 거야.

자신의 마음이 부서졌기 때문에.”

그때 정수아가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전 5개월 동안 조종당했어요.

그 느낌을 압니다. 어떻게 싸워야 하는지도요.”

전 보안팀장 강민지 또한 무기를 챙겼다.

“빚을 갚아야지. 2시간 남았어.

그전에 지오 뇌가 영구 손상되면 끝이야.”


폐병원 지하 연구소. 잠입 개시.

청소 용역으로 위장한 수아와 민지가 환풍구에 접근했다.

그들은 챙겨 온 역가스(counter-agent)를 투입했다.

하얀 연기가 챔버 안으로 스며들었다.

하지만 윤세라는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마스크를 쓰지 않았다.

그녀는 매일 미량의 가스를 흡입하여 면역이 되어 있었다.


“어리석군요. 나는 이미 준비되어 있습니다.”


민지가 윤세라를 향해 총구를 겨눴지만,

윤세라는 여유롭게 웃으며 화면을 가리켰다.


TREATED SUBJECTS: 200/200

TARGETS: GOVERNMENT OFFICIALS, CEOs, MEDIA LEADERS


“한국의 미래는 이미 결정됐어요.

그들은 자신의 내 계획을 따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모릅니다.”


가스 챔버 내부.

역가스가 효과를 발휘하기 시작했다.

은별이 기침을 하며 깨어났고, 이어 레오도 신음을 흘리며 일어났다.

하지만 지오는 여전히 멍한 눈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지오! 정신 차려! 돌아와!”

은별이 그의 어깨를 흔들었지만, 지오의 반응은 기계적이었다.


“난 괜찮아. 임무를 계속하자.”

목소리에 억양이라곤 없었다.

그는 84%의 상태, 즉 반쯤 좀비가 된 상태로 기능하고 있었다.

스피커를 통해 윤세라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거래를 하죠, 한지오 씨.

자발적으로 내게 합류하세요.

그럼 당신 친구들은 온전하게 내보내 주겠습니다.”

“...‘합류’의 정의는?”

“남은 저항군 지도자들의 치료를 도와주세요.

그럼 모두가 평화롭게 살 수 있습니다.”


은별이 비명을 질렀다. “안돼. 지오! 싸워야 해!”

지오의 내면에서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남은 16%의 인간성과 84%의 논리가 충돌하고 있었다.


임계점.

윤세라가 최후의 카드를 꺼냈다.

화면에 영상 하나가 재생되었다.

그것은 지오의 여동생. 지유가 죽기 직전의 CCTV 영상이었다.


“당신 동생의 죽음? 내가 리 박사에게 보고했기 때문이에요.

감정적인 사람들은 위험하니까, 제거해야 했죠.”


그 순간, 지오의 동공이 지진처럼 흔들렸다.

억눌려 있던 무언가가 임계점을 넘어섰다.


WARNING: EMOTIONAL SURGE DETECTED

ANGER LEVEL: 95%... 99%... OVERLOAD


시스템이 경고음을 토해냈다.

극도의 분노는 어떤 알고리즘으로도 통제할 수 없는 변수였다.


“으아아아아아악!”

지오가 짐승처럼 울부짖었다.

억눌렸던 슬픔, 분노, 고통이 한꺼번에 폭발했다.

댐이 무너지듯 오버라이드 수치가 곤두박질쳤다.


84% ⇒ 60% ⇒ 35% ⇒ 10% ⇒ 0%

OVERRIDE FAILURE


지오는 바닥에 쓰러졌다가, 눈물을 흘리며 비틀거리며 일어섰다.

그의 눈빛은 더 이상 죽어있지 않았다.

시퍼런 살기가 이글거리고 있었다.


“네가 내 동생을 죽였어... 내 고통을 이용했어...

날 무기로 만들려 했어...”


최후의 선택.

쨍그랑!

지오가 의자를 던져 강화 유리를 깨뜨렸다.

그가 윤세라에게 달려들어 목을 조르려 했다.

민지가 그를 말렸다.


“안돼! 죽이면 너도 그녀처럼 되는 거야!”

윤세라는 헐떡이면서도 붉은 버튼을 눌렀다. 비상 사이렌이 울렸다.

“내가 완벽한 세상을 가질 수 없다면, 아무도 가질 수 없어.”


!!! PROTOCOL OMEGA ACTIVATED!!!

FINAL COMMAND TRANSMISSION IN: 10:00

TARGET: START WORLD WAR Ⅲ


윤세라는 미친 듯이 웃었다.

“10분 뒤면,

내가 심어둔 200명의 리더들이 핵 미사일 발사 버튼을 누를 거예요.”

“전송을 막아야 해!”

은별이 콘솔로 달려갔다.

레오가 소리쳤다.

“선택해! 저 여자를 잡아서 족칠 건지,

아니면 프로토콜을 막을 건지!”

지오는 윤세라를 내려다보았다.

주먹이 부들부들 떨렸다. 복수인가, 구원인가.


은별이 애타게 그를 불렀다.

“지오! 나 혼자선 못 해! 네가 필요해!”

세상의 운명이 걸린 10분의 카운트다운이 시작되었다.


다음화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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