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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사랑 귀인

타국에서 만난 귀인

by 이미숙

귀인(貴人): 삶의 중요한 순간에 다가와 큰 힘이 되어주고, 인생에 깊은 영향을 미치는 사람.


나는 오래전, 어린 두 자녀의 교육을 위해 이민을 결심했다. 타국에서 부모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 더 나은 미래를 꿈꾸며 모든 것을 걸고 도전했다.


하지만 현실은 생각보다 훨씬 가혹했다. 낯선 환경, 막막한 경제적 부담, 끝없이 이어지는 노동의 연속. 꿈을 이루기란 쉽지 않았지만, 두 아이만큼은 제대로 키워야 한다는 신념 하나로 이를 악물고 버텨냈다.


어린 나이에도 묵묵히 따라와 준 아이들이 기특하고 고마웠다.


"책값이 만만치 않다더라." 어느 날, 우연히 들은 한마디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국의 중·고등학교에서는 한국처럼 과외비나 추가 학습서가 필요 없을 거로 생각했다. 나는 그저 아이들 점심값만 해결하면 된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부모가 힘들어하는 걸 먼저 눈치채고, 스스로 방법을 찾아가고 있었다. 나는 미처 그것을 알지 못한 채 앞만 보고 달리고 있었다.


어느 날, 아들에게 물었다.

"너는 왜 책 살 돈을 달라고 한 번도 말하지 않았어? 공부 안 하니?"


그 순간, 아들의 대답에 가슴이 무너져 내렸다.


"엄마, 저 열심히 공부하고 있어요. 책은 서점에서 한 번 사서 일주일 안에 다 마스터한 후 깨끗이 반납하고, 다른 책으로 바꿔가며 그렇게 고등학교 3년을 공부했어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혔다.


처음엔 서점 주인님도 탐탁지 않게 생각하셨겠지. 하지만 아들은 정중히 양해를 구하고, 반납의 규칙을 철저히 지키며 그렇게 버텨왔다.


부모로서 너무 미안했고, 가슴이 아팠다. 그리고 서점 주인님께 죄송함과 동시에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내가 그분이었다면, 같은 상황에서 어떻게 반응했을까.


시간이 흘러, 아들은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날, 아들은 장미 두 송이를 손에 들고 있었다. 하나는 내게 주며 말했다.

"엄마, 고마워요."


그리고 남은 한 송이는 서점 주인님께 전했다.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주인님은 아들을 꼭 안아주시며 말했다.

"너 같은 학생은 처음이야. 좋은 대학에 가게 된 걸 정말 축하해."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


서점 주인님은 그저 한 학생을 배려해 주었을 뿐이었겠지만, 우리 가족에게는 잊을 수 없는 귀인이었다.


나는 지금도 그분의 건강을 기원하며, 우리 아이들도 받은 만큼 나누고 베푸는 사람이 되길 바란다.


삶은 절대 쉽지 않지만 그 안에서 따뜻한 손길을 만나며, 우리는 다시 한 걸음씩 나아갈 힘을 얻는다. 그리고 언젠가 우리도, 누군가에게 그런 귀인이 될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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