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국에서 피어난 음식 냄새 속의 문화 충돌과 화해
미국에서의 아파트 생활은 마치 작은 지구촌 같았다. 우리는 1층에 살았고, 옆집에는 인도 사람, 유럽 사람, 미국 백인, 그리고 2층에는 흑인 여성, 중국인, 아랍인 등 다양한 문화권의 사람들이 어우러져 살고 있었다.
한겨울보다 한여름이 되면 모든 문을 열어놓을 수 있어, 더욱 그리운 한국 음식을 자주 해 먹었다. 물론 각국의 독특한 향신료와 냄새가 가득한 곳이었지만, 주중에는 주로 빵이나 간단한 패스트푸드로 식사를 해결하다가도, 주말이면 가족 중심으로 전통적인 한식을 준비하곤 했다. 어린 시절부터 익숙한 고향의 맛을 쉽게 잊을 수는 없었기에, 특별한 날을 정해 한 상을 차렸다.
그러던 어느 날, 2층에 새로 이사 온 흑인 여성이 갑자기 우리 집 천장을 향해 마구 무언가를 던지고 두드리는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집수리하는 줄 알았지만, 그날따라 친정어머니가 방문하신 터라 더욱 신경 써서 고등어조림, 된장찌개, 감자볶음, 잡채, 물김치, 가지볶음, 불고기 등 정성껏 한식을 차리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요란스러운 노크 소리가 들렸다. 서둘러 냄새 강한 고등어조림과 된장찌개를 베란다로 숨기고, 상대적으로 순한 반찬들만 보이게 놓아두었다. 문을 열자, 그 여성은 마치 검열을 나온 듯 단숨에 집 안으로 들어와 부엌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냉장고를 열어보라고 요구했다.
당황스러웠다. 이게 대체 무슨 무례한 행동인가 싶어 따졌지만, 그녀는 고등어조림과 된장찌개의 냄새가 사라진 것에 당황한 듯 얼어붙었다. 나는 우리나라의 일반적인 식단을 보여주며 “너도 한번 같이 먹어보지 않겠냐?”라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녀는 멋쩍은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말하며 서서히 뒷걸음질 쳤다.
그러나 그 순간, 나는 이 문제를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하며 관리사무실을 찾아가 항의했다. 전해 듣기로, 우리 가족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던 직원들은 그녀의 불만을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했다.
나는 화가 치밀어 2층으로 올라가 그녀의 집 문을 쾅쾅 두드렸다. “당신은 대체 뭘 먹고 사는 거냐?”라고 따졌고, 식탁 위의 햄버거 세트를 보며 “밥 안 먹고 물만 먹고 사느냐?”라고 쏘아붙였다. 그러면서 “중국과 인도 음식도 냄새가 강한데 왜 나한테만 이러느냐?”라며 강하게 항의했다. 그러자 그녀는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당황한 듯 사과하기 시작했다. 문득 그녀의 부엌을 보니, 요리한 흔적 하나 없는 깨끗한 공간이 눈에 들어왔다. 그제야 조금 미안한 감정이 들었다.
결국 우리는 사과를 주고받으며 상황을 마무리했다. 하지만 그날 오후, 나는 감자볶음, 잡채, 물김치, 불고기 등을 조금씩 접시에 담아 그녀의 집을 다시 찾아갔다. 그녀는 예상과 달리 환하게 맞아주었고, 내가 내민 반찬을 먹어보겠다고 했다. 다음 날 그녀는 빈 그릇을 들고 와 잘 먹었다며 웃었다. 그 후로는 더 이상 불만을 제기하지 않았고, 오히려 맛있는 냄새가 나면 “어제 정말 배고팠다”라는 농담을 던지기도 했다.
지금 돌아보면, 그녀와 조금 더 친밀하게 지낼 수도 있었겠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타국에서 그리운 음식을 지키기 위해 서글픈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지만, 결국 모든 것은 이해와 배려 속에서 녹아들 수 있었다.
몇 달 후, 그녀는 말없이 이사를 떠났다. 혹시나 해, 앞집 인도 여성에게 우리 음식 냄새가 이상하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아무렇지 않다”라고 답했다. 사실 그녀 역시 강한 향신료를 쓰는 요리를 많이 했으니, 서로 불평할 입장은 아니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한국인의 저력을 다시금 느꼈다. 빵만 먹고 살 수는 없다. 그리고 삶은 그렇게 부딪히고, 이해하며, 서로를 배워가는 과정이라는 것도 깨닫게 되었다.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자연스럽게 미국 음식에 익숙해졌고, 주변 사람들은 “이제 너도 미국 사람 다 됐다”라고 농담을 던지곤 했다.
미국 생활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 모든 과정이 값진 터득이었고, 결국에는 좋은 추억으로 남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