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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Feb 04. 2021

부다페스트는 과연 '야경이 예술'이었다

여행 12일차: 부다페스트, 캄캄한 밤이 낭만을 부르는 곳

2019.10.03 여행 12일차 헝가리 부다페스트

세체니 다리
세체니 다리
세체니 다리에서 본 부다페스트 전경
세체니 다리에서 본 페스트 지구
세체니 다리에서 본 부다 지구

새벽에 배가 아파서 여러 번 깼다가 8시 반에 기상했다. 컨디션이 좋지 않았지만 마냥 숙소에만 있을 수 없어 일단 외출 준비를 했다. 샤워를 하고 그동안 밀린 빨래도 하니 어느덧 11시였다. 밖으로 나와 거센 바람을 이겨내며 세체니 다리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태풍과 맞먹는 수준의 칼바람이 휘몰아쳤다. 잘못하면 몸이 날아갈 것 같아서 손잡이를 꽉 붙잡고 다리를 건넜다. 강풍이 부는 와중에도 세체니 다리에서 보는 도시의 전경은 아름다웠다. 푸른 다뉴브강과 고풍스러운 건축물이 어우러져 이국적인 풍경이 연출됐다.

부다페스트 맛집 BORZE
부다페스트 맛집 BORZE에서 먹은 굴라시
부다페스트 맛집 BORZE에서 먹은 치킨 홈메이드 파스타

페스트 지구로 넘어와서 OTP은행 ATM을 들렀다. 한화 10만원 가량의 돈을 헝가리 화폐로 찾은 뒤 아침 겸 점심을 먹으러 헝가리쿰 비스트로에 갔다. 평일 낮에는 예약 손님이 많지 않을 거라 생각했는데 웬걸, 예약이 꽉 찼다는 이유로 전날 저녁에 이어 또 한 번 퇴짜를 맞았다. 얼마나 맛있길래 매번 만석일까? 궁금증만 떠안은 채 발길을 돌렸다. 


길을 다니며 다른 식당을 찾다가 인테리어가 마음에 드는 곳을 발견했다. 식당 이름은 BORZE였는데, 구글 평점이 높고 블로그 후기도 좋아서 안으로 들어갔다. 식당에 있는 수많은 와인병과 대리석 테이블은 고급스러운 분위기를 자아냈다. 곳곳에 식물이 많고 좌석이 다닥다닥 붙어 있어서 트렌디한 카페 느낌도 났다. 나는 헝가리 전통 음식인 굴라시와 치킨 홈메이드 파스타를 시켰다. 굴라시는 소고기를 감자, 당근 등과 함께 볶은 뒤 토마토와 와인을 넣고 푹 끓인 음식이다. 매운 고추로 양념하기 때문에 유럽 음식치고 매콤한 편에 속하는데, 실제로 먹어보니 맑은 육개장 같았다. 홈메이드 파스타는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넓은 면에 트러플 소스가 배여 있어서 맛있게 먹었다. 위에 올라간 치킨도 겉은 바삭하고 속은 촉촉해서 순식간에 해치웠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성 이슈트반 대성당 돔 천장(왼쪽)과 미라 상태로 보관된 이슈트반의 오른손
젤라또 로사
젤라또 로사
젤라또 로사

다 먹고 성 이슈트반 대성당으로 걸어갔다. 성 이슈트반 대성당은 헝가리에 기독교를 전파한 이슈트반 성왕을 기리기 위해 지어진 르네상스 양식의 성당이다. 성당 내부는 붉은 대리석 기둥과 녹색 벽면으로 채워져 있어서 이색적이었다. 성당보다는 오래된 궁전 혹은 호텔 같다는 느낌을 받았다. 천장은 화려한 금박 장식과 프레스코화로 꾸며져 있었다. 중앙제단 뒤편 유리관에는 이슈트반의 오른손이 안치돼 관광객들의 이목을 끌었다. 미라 상태로 보존된 이슈트반의 오른손을 두 눈으로 직접 보니 마음이 경건해졌다. 갑자기 피로가 몰려와서 대성당 의자에 앉아 쉬다가 장미 아이스크림으로 유명한 젤라또 로사를 갔다. 여러 가지 맛 중 망고와 딸기를 선택했는데, 시원하고 달달해서 정신이 바짝 들었다. 

K-마트
다뉴브강의 신발들
다뉴브강의 신발들
다뉴브강의 신발들
다뉴브강의 신발들

숙소에서 간단히 먹을 수 있는 식량을 구입하기 위해 K-마트를 방문했다. 타지에 한국 식료품이 가득 쌓인 것을 보니 신기하면서도 반가웠다. 고심 끝에 밀키스와 컵라면 2개, 컵비빔밥을 산 뒤 다뉴브강의 신발들로 향했다. 다뉴브강의 신발들은 2차 세계대전 때 일어났던 유대인 학살을 추모하는 조형물이다. 당시 나치는 유대인들의 신발을 벗기고 총살한 뒤 다뉴브 강가에 밀어 넣었다고 한다. 멋진 경관을 자랑하는 다뉴브강이 이토록 슬픈 역사를 간직하고 있을 줄이야. 역시 겉으로 보이는 게 다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강가를 따라 남자·여자·아이 구두가 쭉 있는 것을 보니 가슴이 아팠다. 구두 옆에는 추모를 위한 꽃과 촛불이 놓여 있었는데, 아이 구두 안에 들어있는 사탕을 본 순간 울컥했다. 아무 것도 모르는 순수한 아이들을 총으로 쏴서 죽이다니. 이런 일이 재발되지 않기를 마음 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부다페스트 시내를 지나는 노란색 트램
부다페스트 시내를 지나는 노란색 트램
헝가리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있는 관광객들
헝가리 국회의사당
페스트 지구에서 본 부다 왕궁
페스트 지구에서 본 노을 전경
페스트 지구에서 본 노을 전경

지하철역 방향으로 이동하다가 연두색 잔디밭 뒤로 노란색 트램이 지나가는 풍경이 아름다워서 발걸음을 멈췄다. 그 자리에서 몇 대의 트램을 보내며 한참을 구경한 후 지하철을 타고 숙소 근처 역에서 내렸다. 슈퍼에 들러 맥주 두 병과 물을 산 뒤 숙소로 복귀하니 오후 4시 30분이었다. 침대에 누워 쉬다가 M과 저녁 약속이 있어서 다시 밖으로 나섰다. 메리어트 호텔 옆 스타벅스에 도착해 M을 기다리는 동안 노을이 지는 전경을 바라봤다. 점차 어두워지는 하늘과 밝아지는 건축물의 조명이 대조를 이뤄 한 폭의 낭만적인 그림을 완성했다. 

헝가리 IPA(왼쪽), 립

M과 함께 사전에 알아본 식당을 찾아갔는데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식사가 불가능하다는 통보를 받았다. 다른 식당에서도 같은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그냥 지나가다 보이는 이름 모를 에 들어갔다. 현지 맥주를 맛보고 싶어서 헝가리 IPA를 먼저 주문했다. 한 모금 들이켜자 청량감이 확 느껴지면서 피로가 말끔히 씻기는 기분이 들었다. 메인 메뉴로 시킨 립은 바비큐 소스가 감칠맛 나고 고기가 부드러워서 맛있었다. 우연히 마주친 식당이라 기대치가 높지 않았는데, 음식 맛이 좋아서 행복했다. 감성적인 라이브 연주도 들으며 즐겁게 식사를 마쳤다. 


밖에 나오니 저녁 공기가 차서 쌀쌀했다. 내가 얇은 외투 하나만 걸치고 있어서 덜덜 떨자 M이 "언니 패딩 하나 사야할 것 같아요"라고 말했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M은 나를 데리고 H&M으로 갔다. 눈에 들어오는 옷이 없어서 ZARA로 장소를 옮겨 네이비색 잠바를 8만원에 구매했다. 계획에 없던 돈을 쓰게 돼서 조금 부담스러웠지만, 10월 중순까지 여행을 하려면 두꺼운 외투가 있어야 하기 때문에 필요한 소비였다고 합리화했다. 막상 새 잠바를 입으니 춥지 않고 따뜻해서 사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부다페스트 야경

M은 부다페스트에서 이미 며칠을 지내서 야경 명소를 꿰뚫고 있었다. 나는 여행 가이드처럼 믿음직스러운 M을 따라 부다 왕궁으로 갔다. 부다 왕궁은 13세기 몽고 침입 후 에스테르곰에서 피신 온 벨라 4세가 방어를 위해 지은 요새 겸 성이다. 현재는 국립미술관, 역사박물관, 도서관 등으로 쓰이고 있다. 언덕에 위치한 부다 왕궁에서 부다페스트 시내를 바라보니 전망이 환상적이었다. 도시의 모든 건축물들이 야경을 위해 존재하는 것처럼 반짝반짝 빛났다. 그 중에서도 다뉴브강을 가로지르는 세체니 다리와 높이 솟은 성 이슈트반 대성당이 단연 돋보였다. 강가에 은은하게 비친 불빛들은 부다페스트의 야경을 더욱 황홀하게 만들었다. 

마차시 성당
어부의 요새
헝가리 국회의사당 야경
헝가리 국회의사당 야경
헝가리 국회의사당 야경

부다 왕궁에서 쭉 걸으니 마차시 성당과 어부의 요새가 나왔다. 13세기 벨라 4세에 의해 건축된 마차시 성당은 갈색과 하늘색의 모자이크 지붕이 매력적이었다. 오스트리아 빈에 있던 슈테판 성당의 지붕 모자이크가 톡톡 튀면서도 모던한 느낌이었다면, 마차시 성당의 모자이크 타일은 차분하면서도 고급스러운 느낌이었다. 어부의 요새는 19세기에 어부들이 강을 건너 기습하는 적의 침입을 막은 데서 이름이 붙여졌다고 한다. 흰색 성벽, 원뿔 모양의 탑 등 독특한 외관은 신비로움을 자아냈다. 아치 모양의 창 사이로 보이는 국회의사당의 야경은 정말 예뻤다. 황금색 조명으로 물든 국회의사당을 배경으로 사진을 남기기 위해 많은 관광객들이 줄을 서 있었다. 나도 차례를 기다렸다가 M이 알려주는 각도와 포즈로 사진을 찍었다. 

헝가리 국회의사당 야경
숙소 베란다에서 본 국회의사당

야경 투어를 끝내고 계단을 내려가니 숙소 근방의 거리가 나왔다. 나는 M에게 "에어비앤비 숙소에 묵고 있는데 가까우니까 같이 가볼래?"라고 물었다. M은 흔쾌히 나의 제안을 받아들였고, 우리는 숙소에 함께 입성했다. 베란다에서 국회의사당을 뒤로 하고 서로의 사진을 찍어준 뒤 수다를 떨다가 시간이 늦어져 M과 작별 인사를 했다. 아침만 해도 컨디션 난조로 무기력했는데, 활기차게 하루를 보내게 해준 M에게 고마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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