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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Feb 10. 2021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에 다녀왔습니다

여행 13일차: 부다페스트에서 '뉴욕 카페'를 찾은 이유

2019.10.04 여행 13일차 헝가리 부다페스트

아침에 숙소 베란다에서 컵라면을 먹으며 바라본 풍경

아침 8시 반에 일어나 전날 K-마트에서 사온 컵비빔밥을 먹었다. 다 먹었는데도 양이 부족해서 컵라면을 꺼냈다. 숙소 부엌을 아무리 뒤져도 젓가락이 보이지 않아서 컵비빔밥에 들어 있던 플라스틱 숟가락으로 라면을 떠먹었다. 베란다에서 예쁜 하늘을 보며 먹다가 추워서 안으로 들어왔다. 외국에서 한국 음식을 먹으니 평소보다 더 맛있었다. 


원래 이날의 계획은 부다페스트 근교에 있는 예술가 마을 센텐드레에 다녀오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른 나라에서 소도시 관광을 몇 차례 한데다 기차를 타고 이동하는 게 귀찮아서 가지 않기로 했다. 시간이 남아서 숙소에서 여유를 부리며 꾸물대다가 12시가 되기 전에 밖으로 나왔다. 

라임 전동킥보드
머르기트 다리

숙소 앞 거리에는 유독 전동킥보드를 타고 지나가는 관광객들이 많았다. 나도 타보고 싶어서 라임 앱을 설치하고 결제할 카드를 등록한 후 전동킥보드를 이용했다. 발로 땅을 한 번 차고 오른쪽 손잡이 아래의 레버를 누르니 킥보드가 쌩하고 앞으로 갔다. 생각보다 속도가 빨라서 넘어지지 않기 위해 손잡이를 꽉 잡았다. 평지는 안정적이어서 재밌었는데, 울퉁불퉁한 벽돌길은 온몸이 덜덜 떨려서 힘들었다. 그래도 바람을 가르며 거리를 누비니 기분이 남다르고 좋았다. 요금은 비쌌지만 새로운 경험을 해서 뿌듯했다.  

유람선 사고 추모 공간
유람선 사고 추모 공간
유람선 사고 추모 공간
헝가리 아이가 한글로 남긴 추모글(왼쪽)과 그림

길가에 킥보드를 주차하고 머르기트 다리 부근에 있는 유람선 사고 추모 공간을 들렀다. 2019년 5월, 부다페스트 다뉴브강에서 한국인 단체 관광객을 태운 유람선이 크루즈선과 충돌해 침몰하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 사고로 25명의 한국인과 2명의 현지 승무원이 사망하고 한국인 1명이 실종됐다. 부모님을 위해 효도 여행을 떠난 가족, 사진작가의 꿈을 품고 헝가리로 떠난 20대 청년 등 희생자들의 구구절절한 사연은 가슴을 아프게 했다. 나처럼 평범하게 여행을 하던 사람들이 불과 몇 달 전에 이 곳에서 유명을 달리한 게 마음이 쓰여 추모 공간을 찾아갔다. 


가로등에 걸린 작은 태극기는 내가 추모 공간에 잘 찾아왔음을 알려주었다. 가로등 아래에는 하트 모양의 캔들과 꽃이 놓여 있었고, 머르기트 다리 벽면에는 사고 희생자들을 추모하는 글과 그림이 붙어 있었다. 한 희생자의 지인이 덤덤하게 쓴 작별 편지를 읽는 순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헝가리 아이가 서툰 한글로 쓴 추모글과 천사가 유람선을 지키는 그림은 가슴을 찡하게 만들었다. 다뉴브 강가의 아름다운 풍경을 보니 비극적인 사건이 더욱 안타깝게 느껴졌다. 운명하신 분들의 평안을 빌며 추모글을 작성한 뒤 자리를 떴다. 

유람선 사고 추모 공간에서 국회의사당으로 가는 길
올림픽공원 조형물
헝가리 국회의사당
헝가리 국회의사당 입장을 기다리는 사람들

머르기트 다리 밑에서 산책로를 따라 걸으니 국회의사당이 나왔다. 국회의사당 내부도 외관만큼 웅장할지 궁금해서 안으로 들어갔다. 국회의사당 곳곳을 둘러보려면 시간대별로 판매하는 가이드 투어 입장권을 사야 했는데, 가까운 시간대의 표는 이미 다 매진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내부 관람을 포기하고, 기분 전환을 위해 젤라또 로사로 향했다. 

부다페스트 거리를 지나는 트램
부다페스트 거리를 지나는 트램
자유 광장 소비에트 전쟁 기념비
자유 광장 분수대 앞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듣고 있는 자전거 투어 관광객들(왼쪽)

국회의사당에서 젤라또 로사로 가는 길에 자유 광장이 보여서 잠시 구경을 했다. 자유 광장은 제2차 세계대전 때 나치 정권에 의해 희생됐던 유대인들과 나치 정권으로부터 헝가리를 해방시켜준 소련군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진 곳이다. 자전거 투어를 하는 외국인 관광객들이 자유 광장에서 가이드의 설명을 열심히 듣고 있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젤라또 로사
젤라또 로사
젤라또 로사에서 산 키위바나나+자두 젤라또

젤라또 로사에 도착해 오늘은 어떤 젤라또를 먹을까 고민했다. 여태껏 먹어보지 않았던 새로운 맛을 시도해보고 싶어서 장고 끝에 키위바나나와 자두를 골랐다. 키위바나나를 선택한 건 '신의 한 수'였다. 자두의 신맛과 씹히는 식감을 키위바나나가 부드럽게 잡아줘 맛이 기가 막혔다. 한국에도 키위바나나 젤라또를 파는 곳이 있는지 알아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파울라너 맥주 축제
파울라너 맥주 축제

3시에 뉴욕 카페에서 M을 만나기 위해 지하철을 타러 가다가 파울라너 맥주 축제가 열리는 현장을 목격했다. 대낮인데도 많은 사람들이 야외에서 지인들과 편안하게 맥주를 즐기고 있었다. 한국과는 다른 자유분방한 분위기가 낯설기도 하고 부럽기도 했다. 

뉴욕 카페
뉴욕 카페 메뉴(왼쪽), 뉴욕라떼 마끼아또
뉴욕라떼 마끼아또
뉴욕 카페
뉴욕 카페
뉴욕 카페

1894년에 오픈한 뉴욕 카페는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카페로 꼽히는 곳이다. 부다페스트에 위치하고 있지만 이름이 '뉴욕'인 이유는 카페가 처음 문을 열었던 당시 건물에 뉴욕 보험회사 지점이 있었기 때문이다. 뉴욕 카페는 명성에 걸맞게 손님이 가득했다. 줄을 서서 30분을 기다린 후에야 직원의 안내를 받았는데, 아쉽게도 우리는 아래층 구석 자리에 앉게 됐다. 


뉴욕 카페의 내부는 화려함의 극치였다. 샹들리에, 대리석 기둥, 천장의 금빛 장식과 프레스코화 등 인테리어에서 고급스러움이 잔뜩 묻어나 카페가 아닌 궁전 같았다. 연주가의 피아노와 바이올린 선율은 클래식한 분위기를 한껏 돋웠다. 나는 뉴욕 카페의 시그니처 메뉴인 뉴욕라떼 마끼아또를, M은 아이스크림을 시켰다. 잠시 후 커피가 물, 초콜릿과 함께 나왔다. 모래시계 모양 잔에 담겨 커피 양이 꽤 많았지만, 만 원이 넘는 가격을 고려하면 특별한 맛은 아니었다. 그래도 호화로운 카페에서 커피 한 잔 하는 기분이 짜릿해 한 번쯤 올 만하다고 생각했다. 

기념품점(왼쪽), 메리어트 호텔 스타벅스

M과 카페에서 긴 시간 대화를 나눈 뒤 기념품을 사기 위해 거리로 나섰다. M이 '악마의 발톱' 연고가 관절에 좋다고 적극 추천해줘서 드럭스토어 dm을 먼저 방문했다. 엄마 선물로 악마의 발톱 2개를 사고 근처 기념품점을 돌아다녔다. 몇 군데를 전전하다가 마음에 드는 기념품점을 발견했다. 컵, 엽서, 스카프, 지갑, 가방 등 기념품 종류가 다양하고 디자인도 전부 예뻤다. 크게 쓸모가 있는 건 아니지만 탐나는 물건이 많았다. 한국에서 가져온 여행일기장을 다 써서 우선 수첩 하나를 고르고, 여행할 때마다 모으는 마그넷을 하나 집었다. 컵도 사고 싶었지만 나중에 짐이 될 것 같아서 생각에만 그쳤다.  

 

기념품 쇼핑을 마치자 M이 "저는 이제 숙소로 갈게요"라고 말했다. 나는 "그래, 너무 즐거웠어. 남은 여행 잘 하고 한국에서 보자"며 다음 만남을 약속했다. 이번 여행의 큰 수확 중 하나는 M을 알게 된 것이다. 혼자 여행을 하면 멋진 풍경 혹은 그것을 보며 느낀 감정을 공유할 사람이 없다는 게 안타깝게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럴 때 M은 잘츠부르크에서 먼저 손을 내밀며 나의 여행 파트너가 되어주었다. 젊은 날의 소중한 추억을 함께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겨서, 그 사람이 착하고 순수한 M이라서 참 감사했다. 

다뉴브 강변 풍경
다뉴브 강변 풍경
다뉴브 강변 풍경
다뉴브 강변 풍경
다뉴브 강변 풍경
Dunacorso
Dunacorso
Dunacorso에서 시킨 헝가리 IPA
Dunacorso에서 시킨 헝가리 IPA와 닭가슴살 구이

M을 보낸 후 메리어트 호텔 스타벅스 앞에서 노을을 구경했다. 시시각각 변하는 풍경에 푹 빠져 있다가 배가 고파서 식당을 찾았다. 어디를 갈지 고민하다가 야외 테이블에서 야경을 볼 수 있는 Dunacorso에 갔다. 헝가리 IPA와 닭가슴살 구이를 주문했는데 음식 맛은 평범했다. 하지만 황금빛 부다 왕궁이 보이는 아름다운 전망과 3인조 악단의 라이브 연주 덕분에 로맨틱한 분위기 속에서 만족스럽게 식사를 할 수 있었다. 

부다페스트 야경
부다페스트 야경
부다페스트 야경
부다페스트 야경
부다페스트 야경
부다페스트 야경
부다페스트 야경

국회의사당 야경을 가까이에서 보고 싶어서 국회의사당 방면 트램이 다니는 정거장으로 걸어갔다. 트램을 기다리는 동안 눈앞에 펼쳐진 정경을 감상했는데 아무리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깊은 어둠을 뚫고 노랗게 떠 있는 보름달과 다뉴브 강변을 달리는 트램, 금색 물감을 칠한 듯 반짝반짝 빛나는 건물들은 멋들어진 운치를 자아냈다. 예쁜 야경을 보니까 부다페스트에서 마지막 밤인 게 더욱 아쉬웠다. 트램을 타고 국회의사당 앞에 내리니 하늘에 어마어마한 박쥐 떼가 모여 있었다. 태어나서 처음 보는 진풍경에 입이 떡 벌어졌다. 국회의사당 주변을 걷다가 점점 추워져서 지하철을 타고 숙소로 향했다. 

부다페스트 야경

지하철 역에서 숙소로 가는 길에 있는 뷰 포인트는 오늘도 여행객들로 북적였다. 나도 여행객들 사이에 껴서 다뉴브강 너머로 보이는 국회의사당을 바라봤다. 그때 누가 갑자기 뒤에서 "워!"하며 나를 놀래켰다. 뒤돌아보니 아까 저녁 먹기 전에 헤어졌던 M이었다. 당황한 내가 "아니, 너가 왜 여기서 나와?"라고 묻자 M은 "혼자 센티하게 이어폰 꽂고 노래를 들으면서 야경을 보고 있었어요. 이렇게 또 만난 거 보니까 저희 아무래도 인연인가 봐요"라며 웃었다. M과 뜻밖의 재회의 시간을 가진 후 다시 작별 인사를 하고 숙소로 복귀했다. 


부다페스트를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보면 '야경 말고 딱히 볼 게 없다'는 내용이 주를 이뤘는데, 결론적으로 맞는 말이었다. 거꾸로 생각하면 다른 볼거리가 필요 없을 만큼 야경이 아름다웠고, 관광지가 많지 않아서 어딜 꼭 가야 한다는 강박에 시달리지 않고 발걸음이 닿는 대로 편안하게 여행을 즐길 수 있었다. 내일이면 정든 부다페스트를 떠나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지만, 다른 도시에 가면 금세 또 "여기 좋네"라고 할 게 뻔했기 때문에 기대감을 안고 하루를 마무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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