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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Feb 16. 2021

류블랴나에 나만의 우주선이 생겼다

여행 14일차: 슬로베니아 류블랴나에서 캡슐호텔을 처음 경험하다

2019.10.05 여행 14일차 헝가리 부다페스트-슬로베니아 류블랴나

부다페스트 에어비앤비 숙소에서 떠나기 전 찍은 풍경

기상 알람을 끄고 다시 잠들었다가 눈을 뜨니 오전 8시였다. 9시 25분에 출발하는 류블랴나행 버스를 타려면 시간이 촉박했다. 후다닥 씻고 캐리어에 짐을 챙긴 뒤 베란다에서 마지막으로 풍경 사진을 찍었다. 아침 식사용으로 구비한 컵라면은 호스트가 먹을 수 있게 그대로 두고 숙소를 나왔다. 플릭스버스(Flixbus) 정류장에 가기 위해 숙소 앞 Batthyany역에서 지하철 2호선을 탔다. Deak역에서 하차해 3호선 타는 곳으로 이동하려는데, 하필 환승 통로에 설치된 에스컬레이터가 정비 중이었다. 계단이 없고 에스컬레이터로만 올라가는 공간이라 환승이 불가능했다.


너무 당황스러웠지만 늦지 않으려면 빨리 대안을 찾아야 했다. 지하철로는 갈 수 있는 방법이 없어서 2호선 출구로 빠져나와 택시를 잡았다. 혹시 늦지는 않을까 걱정돼 기사님께 "9시 25분까지 갈 수 있을까요?"라고 물었더니 기사님이 "충분해요. 여유 있어요"라며 나를 안심시켰다. 다행히 택시는 버스 출발 15분 전에 부다페스트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위기를 잘 넘겼다고 생각하던 찰나에 또다시 문제가 발생했다. 택시비 계산을 위해 카드를 내밀자 기사님이 "카드 결제는 안 돼요. 현금으로 주셔야 해요"라고 말했다. 헝가리 화폐를 다 써버린 나에게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발을 동동 구르다가 "근처에 ATM이 있는지 확인해보고 올게요"라고 말하고 택시에서 내렸다. 부랴부랴 버스 터미널 안으로 뛰어가 내부를 둘러보니 지하 1층에 ATM이 있었다. 돈을 인출해서 택시 기사님께 갖다 드리고 내가 타야 하는 버스를 찾아서 탑승했다. 가까운 거리였는데 택시비가 무려 4만원이 나온 것도, 택시비를 현금으로만 받는 것도 모두 수상했지만 버스를 놓치지 않고 탄 것만으로 그저 감사했다.  


부다페스트에서 류블랴나까지 예상 소요시간은 6시간 30분이었다. 버스 안에서 지루하진 않을까 걱정이 됐는데, 잠을 자다가 MBC '나 혼자 산다' 영상을 몇 편 보니 시간이 빠르게 지나갔다. '슬로베니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라는 휴대폰 통신사의 문자는 내가 새로운 나라에 발을 디뎠음을 알려주었다. 건물 광고판에 루카 돈치치(슬로베니아 출신 NBA 선수)의 사진이 걸린 것을 보니 슬로베니아에 온 게 실감이 났다. 오후 4시가 되자 목적지인 류블랴나 버스 터미널에 도착했다. 

류블랴나 센트럴 호텔 프런트가 위치한 7층

버스에서 내려 류블랴나 숙소인 센트럴 호텔을 찾아갔다. 호텔 간판을 보고 들어갔는데 로비가 없고 엘리베이터만 달랑 있었다. 안내 문구에 '프런트는 7층입니다'라고 써 있어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7층으로 올라갔다. 체크인을 마치자 직원이 "이건 저희 호텔 숙박객에게 드리는 기념품입니다"라며 예쁜 흰색 보틀을 건넸다. 이어 "라운지에 있는 커피와 음료는 언제든지 무료로 드실 수 있습니다. 그때 이 보틀을 사용하시면 돼요"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뜻밖의 환대를 받으니 '이 호텔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면서 기분이 좋았다. 

캡슐침대가 모여 있는 방 입구(왼쪽)와 내가 배정받은 캡슐침대
캡슐침대 내부 모습

내가 머무를 방은 캡슐침대가 여러 대 모여 있는 방이었다. 유튜브로 일본 캡슐호텔 영상을 본 후 실제로 어떨지 궁금증이 생겨서 캡슐침대를 예약했다. 직원이 직접 방을 안내했는데 10명이 함께 쓰는 공간이라 넓었다. 화장실 겸 샤워실이 3개나 있고, 캡슐침대마다 출입문 카드키가 있어서 생각보다 불편하지 않을 것 같았다. 배정된 캡슐침대에 카드키를 대니 문이 철커덕 열렸다. 이내 SF영화에 나올 법한 우주선 모양의 내부가 모습을 드러냈다. 작은 캡슐 안에 침대, TV, 시계, USB단자, 옷걸이 등 없는 게 없어서 신기했다. 이것저것 만져보며 구경하다가 호텔을 나왔다. 

류블랴나 한식당 오감 메뉴(왼쪽)와 김치찌개

당장 번화가로 가서 도시의 분위기를 느끼고 싶었으나 하루 종일 한 끼도 먹지 않아 근처 한식당 오감을 먼저 방문했다. 메뉴판을 보고 무엇을 먹을까 고민하다가 매콤한 음식이 땡겨서 김치찌개를 시켰다. 배가 고파서 정신이 몽롱해지고 반쯤 미쳐버릴 때쯤 나를 구원해줄 김치찌개가 등장했다. 수저로 국물을 몇 번 떠먹으니 익숙한 맛이라 반가웠다. 찌개 안에 돼지고기 양이 적은 게 아쉬웠지만 맛있게 먹었다. 

프레셰렌 광장으로 가는 길에 보이는 프란치스카 성당
트리플 브릿지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한 류블랴나 성

여행의 시작점이자 구시가지의 중심인 프레셰렌 광장에는 개성 있는 젊은이들이 많았다. 노래하는 사람, 호루라기를 불며 춤추는 사람, 그 모습을 보며 박수를 치는 사람 등 가지각색이었다. 며칠 전에 내가 "류블랴나 어땠어?"라고 물었을 때 M이 "엄청 힙하던데요"라고 말했는데, 왜 그렇게 이야기했는지 단번에 이해가 갔다. 분홍빛의 프란치스카 성당은 도시에 역동적인 느낌을 불어넣었다. 


트리플 브릿지를 건너자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류블랴나 성이 눈에 띄었다. 1144년에 건축된 류블랴나 성은 15세기 합스부르크 왕국의 지배를 받던 시절 오스만투르크의 침략을 막기 위해 재건됐다. 이후 군사병원, 무기고, 감옥 등으로 사용됐으나 지금은 역사 전시관 및 전망대로 쓰이고 있다. 성에 올라가 시내를 조망하고 싶었지만 시간이 늦어서 다음으로 미뤘다. 

류블랴나 시청
류블랴나 시청 앞 거리
류블랴나 기념품점에서 판매하는 프로폴리스 연고

류블랴나 성이 보이는 곳에서 오른쪽으로 꺾으니 푸른 시계탑이 있는 시청이 나왔다. 15세기에 재판소로 지은 건물인데, 18세기에 재건되면서 시청사로 용도가 변경됐다고 한다. 흰색과 회색 레고 블록을 조립한 듯한 외관이 인상적이었다. 발길을 돌려 성 니콜라스 대성당 방향으로 걷다가 비가 쏟아져서 기념품점으로 대피했다. 유럽 최대 규모의 양봉업을 자랑하는 슬로베니아답게 대부분의 기념품이 꿀과 관련된 제품들이었다. 프로폴리스 연고, 꿀술 등 특산품을 둘러보다가 비가 어느 정도 그친 것 같아서 관광을 재개했다.

용의 다리
용의 다리
노천 레스토랑
푸줏간 다리
푸줏간 다리
노천 레스토랑에서 바라본 풍경
노천 레스토랑

정처 없이 걷다보니 류블랴니차강을 가로지르는 용의 다리를 마주했다. 다리 귀퉁이마다 류블랴나를 상징하는 용 조각이 세워져 있었다. 용의 다리를 넘어 푸줏간 다리에 이르니 강줄기를 따라 노천 카페와 레스토랑이 늘어서 있었다. 식당 테라스의 은은한 조명은 반대편 중앙시장 아케이드의 조명과 어우러져 낭만적인 분위기를 연출했다. 푸줏간 다리 위에서는 연인들이 사랑의 자물쇠를 채우며 달달함을 과시했다. 

트리플 브릿지
프레셰렌 광장과 프란치스카 성당
환하게 떠 있는 달
구름에 감춰진 달
다시 모습을 드러낸 달

다시 돌아온 프레셰렌 광장 거리 공연을 하는 사람들로 가득했다. '아베 마리아'를 부르는 한 여인의 고운 목소리는 도시에 감성을 더해주었다. 노래를 듣다가 무심코 하늘을 올려다봤는데 달이 정말 예뻤다. 구름에 감춰진 상태에서도 달은 여전히 빛을 내뿜고 있었다. 달이 가장 아름다워 보인 순간은 구름에 가려져 있다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낼 때였다. 문득 사람도 달과 다를 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난과 역경 속에서도 우리는 계속 빛나고 있다. 다만 구름에 가려 그 빛이 희미할 뿐이다. 시간이 흘러 먹구름이 지나가면 최고로 환하게 빛날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저 어떤 상황에서도 희망을 놓지 않고 빛을 계속 유지하면 된다.    

간격이 띄워진 분리수거통

류블랴나를 짧게 구경했는데 도시 전체가 깨끗한 환경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도심에서는 차량 운행을 금지시키고 곳곳에 자전거 대여소를 설치해 시민들의 자전거 이용을 장려하고 있었다. 또 분리수거를 철저히 할 수 있도록 종이, 유리, 패키지 쓰레기통을 다른 색깔로 구분하고 사이에 간격을 두고 있었다. 호텔에서 보틀을 준 것도 일회용품을 줄이고자 하는 친환경 정책의 일환이었다. 왜 EU(유럽연합)가 2016년에 류블랴나를 친환경 도시로 선정했는지 납득이 갔다. 인구 30만명의 작은 도시인데, 많은 사람들이 자유롭게 뒤섞여서 활기가 넘치는 것도 인상깊었다.   

류블랴나 센트럴 호텔
캡슐침대 내부 모습
캡슐침대 내부 모습

숙소 방에 들어와 씻고 캡슐침대에 누웠는데 무척 아늑했다. 개인실이 아닌데도 외부와 차단되고 사생활이 보장돼서 좋았다. 침대에서 뒹굴거리며 나만의 우주선을 마음껏 즐기다가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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