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 25일차: 시간이 멈춘 두브로브니크 성벽에서 절경을 만끽하다
아침 8시에 눈을 떠 오른편을 바라보니 그림처럼 아름다운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발코니에서 맑은 공기를 마시며 바닷가의 경치를 만끽하니 기분이 산뜻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니카 할머니가 "아침 먹으러 나와요"라고 불러 거실 테라스로 나갔다. 테이블에는 다른 숙박객 두 명이 같이 아침을 먹기 위해 앉아 있었다. 모두 한국인이어서 반갑게 인사를 나눈 뒤 다니카가 준비한 과일차와 식빵을 먹으면서 대화를 나눴다.
30대 여성인 A는 의류 매장을 운영하고 있는 자영업자였다. 그녀는 "머리 좀 식히려고 크로아티아 2주 여행을 왔는데, 일 때문에 계속 연락하느라 제대로 못 쉬고 있어요"라고 말했다. 내가 "그래도 사장님이라 좋은 점도 있지 않아요?"라고 묻자 A는 "아휴, 저는 따박따박 월급 받는 월급쟁이가 너무 부러워요"라며 웃어 보였다.
20대 남성인 B는 나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여행을 온 퇴사자였다. B는 "한 달 넘게 그리스, 터키, 이집트, 크로아티아를 돌아다녔어요. 내일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가요"라고 말했다. B가 언급한 국가 중 내가 안 가본 곳이 많아서 그의 여행 이야기를 들으며 대리 만족을 느꼈다. B는 "모든 나라가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터키가 가장 기억에 남아요. 다음에 꼭 한 번 가보세요"라고 권했다.
B의 말을 듣던 A는 "여행 기간이 길었는데 별 일 없으셨어요? 저는 소매치기도 당하고 버스에서 가방도 잃어버렸어요"라고 말했다. 그러자 B는 "저는 렌터카를 타다가 사고가 나서 예상치 못하게 큰돈을 날렸어요"라고 털어놨다. 나는 그들과 달리 여행하는 동안 큰 사건사고가 없었다. 유럽에서 혼자 무탈하게 한 달을 지낸 것이 참 감사한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탁 트인 전망을 즐기며 여유롭게 아침을 보내다가 구시가지로 향했다. 두브로브니크 관광의 하이라이트인 성벽 투어를 하는 날이라 마음이 설렜다. 입장료를 내고 계단을 오르니 성벽에 둘러싸인 좁은 돌길이 나왔다. 먼저 눈에 띈 건 성벽의 두께였다. 해안 쪽은 최대 3m, 내륙 쪽은 최대 6m의 두꺼운 성벽이 붉은 지붕의 마을을 촘촘히 감싸고 있었다. 중세 시대의 모습을 고이 간직하고 있어서 시간이 과거에 멈춘 듯한 느낌을 받았다.
성벽을 따라 시계 반대 방향으로 천천히 돌기 시작했다. 유서 깊은 마을의 전경을 조감하며 성벽 위를 걸으니 마치 고전 영화 속 주인공이 된 것만 같았다. 로브리예나츠 요새 앞 바다에는 세찬 파도를 가르며 카약을 타는 사람들이 많았다. 푸른 바다에 빨간색과 노란색 카약이 떠 있어서 색감이 예뻤다. 나도 카약 체험을 하고 싶었지만, 물에 빠질까봐 걱정이 돼서 감히 엄두를 내진 못했다. 아드리아해를 가까이에서 만나기 위해 어느 정도의 위험은 감수하는 사람들의 용기가 부러웠다.
투명한 옥빛 바다를 끼고 느긋하게 성벽길을 걷다 보니 어느새 2시간이 지나 있었다. 잠시 쉬어 가고 싶어서 전망 좋은 부자 바를 찾아갔다. 돌담으로 뒤덮인 골목을 누빈 끝에 'COLD DRINKS(차가운 음료)'라 써진 입구를 발견했다. 구멍처럼 생긴 문을 통과하니 바다와 맞닿은 곳에 테이블이 마련돼 있었다. 나는 빈 곳에 자리를 잡고 오렌지 주스를 주문했다. 따스한 햇살이 내리쬐는 바다 앞에서 시원한 음료를 마시는 기분은 정말 최고였다. 바다 위를 다니는 보트와 한가롭게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면서 편안히 휴식을 취했다.
30분간 쉬다가 점심을 먹으러 Konoba Jezuite에 방문했다. 성 이그나티우스 성당이 정면으로 보이는 곳에 위치한 식당이라 분위기가 고풍스러웠다. 먼저 식전빵과 비스킷이 나왔는데, 비스킷에 찍어먹는 참치가 신선해서 눈이 번쩍 뜨였다. 화이트 와인과 함께 시킨 갑오징어 먹물리조또는 간이 살짝 짰지만, 보들보들한 식감의 갑오징어가 많이 들어가 있어서 입맛에 맞았다.
식사를 마무리하고 다시 성벽을 거닐었다. 다른 일정이 없어서 느릿느릿 산책하며 수려한 경관을 온몸으로 느꼈다. 반환점인 올드 포트를 돌아 직진하자 구시가지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민세타 요새가 모습을 드러냈다. 가파른 계단을 올라 요새 꼭대기에 발을 딛으니 붉은 지붕의 마을과 드넓은 바다가 한눈에 담겼다. 일몰 무렵의 풍경은 '이 세상 것이 아니다'라는 생각이 들 만큼 장관이었다.
요새에서 내려가다가 성곽 아래에 있는 농구 코트를 발견했다. 몇몇 아이들이 축구 골대를 향해 공을 차며 놀고 있었다. 건물이 빼곡히 들어찬 아담한 마을에 꽤나 큰 체육 시설이 있어서 놀라웠다. 언제나 자유롭게 운동할 수 있는 환경이 잘 마련되어 있는 것 같아 부럽기도 했다. '이래서 크로아티아가 축구 강국이고, 루카 모드리치 같은 세계적인 축구선수가 나오는구나' 싶었다. 2km 길이의 성벽을 한 바퀴 다 돌고 나니 유구한 역사로 빚어진 구시가지를 제대로 탐방한 기분이 들어 뿌듯했다.
저녁을 먹기 위해 로브리예나츠 요새 근처에 위치한 식당 두브라브카로 이동했다. 점심을 늦게 먹어서 간단히 문어 샐러드와 맥주만 시켰다. 평소 샐러드를 좋아하지 않지만, 두브로브니크 대표 음식 중 하나가 문어 샐러드여서 과감하게 선택했다. 모험의 결과는 대성공이었다. 문어가 엄청 싱싱하고 부드러운 데다 소스도 고소해서 만족스러운 한 끼였다.
저녁 식사 후 구시가지를 구석구석 돌아봤다. 골목에 여러 상점들이 늘어서 있었는데, 그 중에서 크리스마스 장식품을 판매하는 곳이 눈에 들어왔다. 가게 안으로 입장하자 흥겨운 캐럴과 화려한 크리스마스 장식들이 나를 맞이했다. 크리스마스를 두 달이나 앞두고 벌써부터 축제 분위기를 느낄 수 있어서 이색적이었다.
구경을 마치고 저녁 9시에 숙소로 복귀했다. 이제 하룻밤만 더 지나면 한국에 간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슬로베니아 피란에서 아팠을 때 중도 귀국을 고민했는데, 포기하지 않고 크로아티아까지 오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동안 여행하면서 좋았던 기억들을 더듬으며 잠을 청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