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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라노 May 22. 2021

여행 마지막날은 현지인처럼 놀아볼까?

여행 26일차: 관광객보다 현지인이 많이 찾는 두브로브니크 신시가지

2019.10.17 여행 26일차 크로아티아 두브로브니크

두브로브니크 숙소 테라스에서 본 풍경
두브로브니크 숙소에서 본 풍경

아침 9시에 일어나 거실로 나가니 혼자 TV를 보던 다니카 할머니가 반갑게 인사했다.

"좋은 아침! 잘 잤어요?"

"네, 신경써주신 덕분에 잘 잤습니다. 다른 숙박객들은 어디에 있나요?"

"B는 오늘 한국 가는 날이라 비행기 타러 일찍 떠났고, A는 아직 방에서 자고 있어요"

"아, 그럼 저 혼자 아침을 먹어야겠네요"


전날에는 셋이서 수다 꽃을 피우며 아침을 보냈지만, 이날은 넓은 테라스를 독차지하며 조용한 아침을 보냈다. 따뜻한 과일차를 마시면서 아드리아해를 품은 두브로브니크의 전경을 감상하니 마음이 넉넉해졌다. 잠시 후 다니카 할머니가 다가와 물었다.

"오늘 여행 계획은 어떻게 돼요?"

"아직 정해진 게 없어요. 어제 구시가지 관광을 마쳐서 오늘은 어디로 가야하나 고민 중이에요"

"그러면 라파드랑 바빈쿡 지구를 가보세요. 현지인들이 자주 찾는 곳인데 해안 산책로가 정말 예뻐요"

"진짜요? 현지인이 가는 곳이라니 기대가 되네요. 감사합니다!"


다니카가 추천한 라파드와 바빈쿡을 인터넷에 검색해봤다.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살펴보니 '구시가지에서 떨어져 있어서 북적거리지 않고 여유로웠다', '아름다운 해변에서 조용히 쉬다 올 수 있었다' 등 칭찬 일색이었다. 남들은 잘 모르는 숨겨진 명소를 발견한 것 같아서 조금 흥분됐다.

두브로브니크 라파드 맛집 Pantarul
두브로브니크 라파드 맛집 Pantarul에서 먹은 스테이크

들뜬 마음을 안고 숙소를 나섰다. 구시가지에서 버스를 갈아탄 뒤 라파드 중심가인 삼거리 시계탑에서 내렸다. 아침을 간단하게 먹은 탓에 배가 고파서 먼저 식당 Pantarul에 들렀다. 레드 와인과 함께 이 곳의 대표 메뉴인 트러플 스테이크를 주문하고 음식이 나오기만을 기다렸다. 잠시 후 매쉬 포테이토가 가득한 스테이크가 등장했다. 고기가 살짝 달았는데 매쉬 포테이토와 번갈아 먹으니 간이 딱 맞았다. 양이 푸짐해서 고기를 크게 썰어 먹으며 쫄깃한 식감을 즐겼다.  

선셋 비치
선셋 비치
선셋 비치

배부르게 먹고 나서 선셋 비치로 걸어갔다. 해변에는 맨살이 드러난 수영복을 입고 한가롭게 시간을 보내는 사람들이 많았다. 선베드에 누워 태닝하는 사람, 바다에서 수영하는 사람, 공놀이를 하는 사람 등 모두 각자의 방법으로 해변을 누리고 있었다. 나도 시원하게 바다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여분의 옷이 없어서 그저 바라만 봤다. 어린 아이를 둔 가족이 서로 물을 튀기면서 화목하게 노는 모습을 보니 '그래, 저게 행복이지! 행복이 뭐 별거 있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선셋 비치
선셋 비치

선셋 비치를 떠나려는 순간 한 남자가 다가와 아는 척을 했다.

"여기서 또 만나네요"

얼굴을 보니 전날 구시가지에서 나에게 일본어로 인사했던 호주인이었다. 그는 말을 이어갔다.

"같이 케이브 바 모어 갈래요?"

케이브 바 모어는 이 지역에서 유명한 동굴 카페로, 나 또한 방문하려던 곳이었다. 하지만 그가 왠지 미심쩍어서 핑계를 대고 거절 의사를 밝혔다.  

"괜찮아요. 저는 해변에 더 있고 싶어요"

"알겠어요. 그럼 여행 재미있게 하세요"

"네, 안녕히 계세요"

그렇게 그를 보내고 원 없이 바다 구경을 한 후 산책길로 향했다.

해안 산책로
해안 산책로
해안 산책로
해안 산책로
해안 산책로

나무들 사이에 나 있는 오솔길을 따라 천천히 걸었다. 한 발씩 내딛을 때마다 풍경이 시야에서 사라지는 게 아쉬워서 뒤로 돌아가 다시 걷기를 반복했다. 산책로에 사람이 거의 없어서 오랫동안 바다를 응시하며 평온함을 누릴 수 있었다. 이렇게 멋진 곳을 알려준 다니카 할머니에게 무척 감사했다. 가는 길 중간중간에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이 있었는데, 목이 말라서 우선 케이브 바 모어를 찾아갔다.

케이브 바 모어
케이브 바 모어
케이브 바 모어

케이브 바 모어에 도착하자 선택의 갈림길에 섰다. 깊숙한 동굴 안과 바다 전망의 테라스 중 어디에 앉을지 고민이 됐다. 동굴 안이 독특해서 끌리긴 했지만, 어두운 조명 때문에 답답함이 느껴져서 테라스에 자리를 잡았다. 마실 음료를 정하고 직원이 오기만을 기다리는데, 한참이 흘러도 감감무소식이었다. 직원들은 내가 있는 방향으로 지나가는데도 나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큰 소리로 불렀지만, 아무 대꾸도 없었다. 대놓고 인종차별을 당한 것 같아서 기분이 너무 나빴다. 분노가 치밀어 올라 자리를 박차고 카페를 빠져나왔다.

해안 산책로
해안 산책로에서 본 풍경
해안 산책로에서 본 풍경

여행 마지막 날이라 좋은 기억만 남기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래서 좀 전에 겪은 황당한 사건도 '직원이 진짜 나를 못 봤을 수도 있어', '음료는 못 마셨지만 공짜로 화장실을 이용했으니 그걸로 충분해'라며 애써 합리화했다. 산책로를 걷다 보니 수려한 경관 덕분에 화가 금세 누그러졌다. 계속 직진하자 고급 레스토랑과 호텔이 줄지어 나타났다. 오션 뷰에 개인 전용 수영장까지 있는 호텔을 보고 '다음에 두브로브니크에 오면 저 곳에 묵어야겠다'고 다짐했다. 한 호텔 앞에 선베드가 잔뜩 깔려 있어서 나도 잠시 누워 햇살에 반짝이는 바다를 바라봤다. 몸에 긴장이 점점 풀리면서 심신의 안정이 찾아왔다. 평온한 상태가 지속되는 지금 이대로만 살고 싶었다.

바다로 내려가는 계단
아드리아해
아드리아해

산책로가 끊겨서 길을 되돌아가다 바다로 이어지는 계단을 발견했다. 영롱한 에메랄드빛 바다에 발이라도 한번 담그고 싶어서 아래로 내려갔다. 바위에 앉아 신발과 양말을 벗고 물 속에 발을 넣은 순간 온몸이 시원해지면서 더위가 싹 가셨다. 속이 훤히 비칠 정도로 청정한 바다에 몸을 맡기니 체내 독소가 다 빠져 한층 건강해진 기분이 들었다. 요란스럽게 물장구를 치면서 아드리아해를 만끽한 후 다시 산책에 나섰다.

선셋 비치
라파드 거리
라파드 거리

선셋 비치를 지나 쭉 걷자 레스토랑과 바가 모여 있는 번화가가 나왔다. 양쪽에 몸통이 두꺼운 나무들이 늘어서 있어서 길이 예뻤다. 여기저기 둘러보며 구경을 하는데, 몇 시간 전 선셋 비치에서 봤던 호주 남자를 또 만났다. 이틀 동안 세 번이나 마주치니 이제는 소름이 끼쳤다. '혹시 이 사람이 몰래 나의 뒤를 밟는 건 아닐까?'하는 의구심마저 들었다.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말을 걸었다.


"안녕하세요! 혹시 이따 같이 저녁 먹을래요? 숙소 갔다가 씻고 바로 나올게요"

"죄송해요, 저는 지금 구시가지로 가야 해서요"

얼른 자리를 피하고 싶어서 그의 대답은 듣지도 않고 뒤돌아서 빠르게 걸었다. 버스를 타고 구시가지로 이동한 후에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로브리예나츠 요새에서 본 풍경
로브리예나츠 요새에서 본 풍경
로브리예나츠 요새에서 본 풍경
로브리예나츠 요새에서 본 풍경

구시가지 입구에서 내려 로브리예나츠 요새를 올라갔다. 계단을 오를수록 시야가 탁 트이면서 멋진 풍광이 펼쳐졌다. 견고하게 지어진 성벽과 겹겹이 쌓인 붉은 지붕은 조화를 이루며 절경을 뽐냈다. 반대편에는 다양한 색깔로 꾸며진 힐튼 임페리얼 호텔이 단연 돋보였다. 화려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외관에 시선이 집중됐다. 입장 마감 시간이 지나서 요새 꼭대기까지 올라가지는 못했지만, 중턱에서도 볼거리가 많아 크게 아쉽지는 않았다.

두브로브니크 식당 루친 칸툰
두브로브니크 식당 루친 칸툰

날이 서서히 어두워져서 요새를 내려와 식당 루친 칸툰을 찾았다. 은은한 조명이 비치는 골목에 테이블이 있어서 분위기가 좋았다. 먼저 시원한 레몬 맥주를 시켰는데, 역대 마셔본 맥주 중 손에 꼽을 만큼 맛있었다. 문어 요리는 토마토 소스가 달아서 먹을수록 물렸지만, 양이 많지 않아 접시를 깨끗하게 비웠다. 식사를 하는 동안 골목 풍경을 사진으로 담는 관광객들과 자꾸 눈이 마주쳤다. 마치 내가 동물원의 원숭이가 된 느낌이었다. 매일 누군가가 카메라를 들이대는 상황을 맞는 연예인의 삶도 쉽지만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두브로브니크 그림
두브로브니크 구시가지

계산을 하고 구시가지를 한 바퀴 돌다가 그림이 전시된 곳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내 방에 두브로브니크 그림을 두면, 여행하면서 행복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오를 것 같아서 구매하기로 결정했다. 걸려 있는 그림이 다 예뻐서 장고에 장고를 거듭한 끝에 하나를 골랐다. 기념품점에서 열쇠고리와 엽서를 구입하고, 광장에서 거리 공연도 즐기면서 여행 마지막 밤을 알차게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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