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블로 이모탈 사건을 통해 생각해 본 인사이트의자격
2018년 11월, 게임 업계에서 두고두고 회자되는 사건이 발생한다. '블리자드'라는 회사에서 매 해 주최하는 블리즈컨은 새로운 게임 출시 계획과 같은 게이머들이 기대할만한 소식을 전달해주거나, 게임 직접 체험, 코스프레 등 게이머들에게는 하나의 거대한 축제 같은 개념으로 자리 잡혀 있다.
2018년, 게이머들은 디아블로라고 하는 굉장히 유명한 게임의 후속작 발표가 있을 것이라는 기대감에 부풀어 행사장을 찾았다. 디아블로에 대한 향후 계획을 전달하는 순서가 되고, 게임 총괄이 등장했다. PC 버전의 후속작을 기대했던 다수의 게이머들의 예상과 달리, 게임 총괄의 입에서 나온 것은 "모바일 버전"의 디아블로가 출시될 것이라는 선언이었다.
이후 보인 게이머들의 반응과 질의응답은 '웃프다'라고 표현하는 게 적절해 보인다. 게이머가 원하는 것을 철저하게 배신한 게임 총괄을 향해 게임 팬들은 거침없이 뼈 때리는 질문을 던진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영상을 보시길 바란다.
https://www.youtube.com/watch?v=FvhGYubgU40
당시 이 사건을 접한 후 "어떻게 이토록 처참하게 사용자의 인사이트를 잘못 해석할 수 있었을까.. 만약 내가 디아블로 모바일 개발을 앞두고 '모바일 출시에 대한 유저들의 인사이트는 무엇인가요?'라고 질문을 받았다면, 무슨 답변을 했었을까?" 등과 같은 생각에 잠겨 한참 동안 이 사건을 소화하려 노력했던 기억이 난다.
인사이트의 자격은 무엇인지를 고민하면서 다음과 같은 결론에 다다랐다.
1. 찬성 또는 반대가 가능할 것
2. 객관적인 근거가 존재할 것
3. 사용자와 시장의 실제 반응에 근접할 것
사용자/시장에 근접한 객관적인 근거들로 점철되어 있는 개인의 주장, 이것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인사이트의 정의이다. 하나씩 차근차근 살펴보도록 하자.
A : "리모컨의 전원 버튼을 누르면 TV가 켜지고, 전원 버튼을 한번 더 누르면 TV가 꺼진다"
위 문장은 단지 설계된 작동 원리를 선언하는 문장일 뿐, 인사이트는 아니다. 만약 전원을 눌렀는데 TV가 켜지지 않는다면, 그것은 나의 인사이트가 틀려서가 아니라, 어딘가 설계 상의 결함이 있기 때문이다. (예: 건전지가 없다던지)
이렇게 정해진 설계 구조 안에서, 인풋에 대한 아웃풋 값이 정해져 있는 상황에서는 정상작동, 오작동만 있을 뿐, 인사이트가 피어날 공간이 없다. 그렇다면 다음 문장은 어떨까?
A : "저는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면 반응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이 문장은 어떨까? 누군가는 동의를 할 수도 있지만, 동의를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리모컨의 전원을 누르면 TV가 켜진다는 것을 반대하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리모컨 동작과 다르게 사람들이 어떻게 반응할 지에 대한 정답은 존재하지 않는다. 좋아하는 사람이 있고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 것이 정상이다. 마찬가지로, 어떤 의사결정자는 디아블로 모바일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고, 어떤 의사결정자는 디아블로 모바일을 싫어하는 사람이 더 많을 것이라고 판단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찬성과 반대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저는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면 반응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는 인사이트가 가져야 할 첫 번째 자격을 갖추었다고 볼 수 있다.
디아블로 모바일 출시를 앞두고 아래와 같은 논의가 있었다고 생각해보자.
A : "저는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면 반응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찬반이 가능한 주장]
B :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상대방 주장에 대한 근거를 요구]
A : "그냥 핸드폰으로 편하게 게임하면 좋잖아요, 안 그러세요?" [주장에 대한 근거 제시]
A는 찬반이 가능한 주장을 제시함으로써 (아직 불완전한) 인사이트를 제시하였다. B는 A의 주장이 동의가 안되거나, 즉각적으로 동의가 되지 않으므로, 그렇게 생각하는 근거를 물어보며 A의 주장에 설득력을 더해달라는 요구를 한다. 이에 A는 근거를 제시하고 있기는 하나, 다소 주관적이면서 개인 취향에 기반한 느낌이 좀 더 강하다.
A가 근거 없는 주장을 했는가? 아니다. A는 분명 나름의 근거를 제시했다. 다만 그 근거의 성격이 '주관적이고 취향에 기반한' 근거일 뿐이다. 주관적이고 취향에 기반한 근거는 언제나 문제가 있는 근거인가? 딱히 그렇지도 않다. 문제가 하나 있다면 단지, 주관적이고 취향에 기반한 근거는 "설득력"이 약한 근거일 뿐이라는 점이다.
만약 상대방의 생각이나 입장을 바꾸거나 설득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면 얼마든지 주관적인 근거를 바탕으로 주장을 펼쳐도 된다. 하지만 만약 상대방의 생각이나 입장을 바꾸거나 설득시켜야 되는 것이 필요한 상황이라면, 그때는 주관적이고 취향에 기반한 근거로는 목적을 달성하거라 기대하기 어렵다.
인사이트의 존재 가치는 어디에 있을까? 흔히 우리가 "저 사람의 말은 정말 인사이트 있네"라고 표현을 할 때는, 다수 간의 의견 충돌이 있는 상황에서 대부분 본인들의 의견을 철회하고 흔쾌히 상대방의 의견에 동의하고 수긍하게 만들 정도로 심금을 울리는 주장이기 때문이 아닐까? 그 정도로 다수에게 공감받는 주장이 되려면 그 주장의 근거는 절대 주관적인 근거로 이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일단 난 이게 좋으니까, 그냥 더 이상 묻지 말고 이걸로 갑시다"라는 식의 주장을 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금도 꼰대라고 부르며 기피하고 있으니 말이다.
A : "저는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면 반응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찬반이 가능한 주장]
B :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상대방 주장에 대한 근거를 요구]
A : "일단 지난 몇 년 간 모바일 폰 보급량에 대한 정량 지표를 보면 약 70%의 게이머들이 모바일 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나아가서 1인당 핸드폰에 깔려있는 게임의 평균 숫자가 1인당 5개이며 하루 평균 모바일 게임을 하는 시간은 약 6시간 정도라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아블로와 같은 이미 PC로 충성도가 확보된 게임 IP를 모바일로 출시했을 때 엄청난 매출을 달성한 리니지 같은 사례도 존재합니다.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고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 제시]
이 정도면 훨씬 더 객관적인 근거가 제시되었다는 점에서 인사이트가 가져할 두 번째 자격을 갖추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직 인사이트가 되기 위한 세 번째, 그리고 가장 중요한 자격이 하나가 더 남아있다.
조직에서 의사결정은 주로 어디에서 어떻게 이루어지나? 회의실에서 똑똑하고 유능한 사람들이 모여 심도 있는 분석을 통해 최적의 결정을 내리는 것이 일반적이다. 대시보드 지표, 분서 보고서, 통계 자료 등등 활용할 수 있는 최대한의 객관적인 근거를 토대로 일련의 결정들을 내리고, 그 결정들이 전망한 대로 (가급적이면 긍정적인 방향으로) 결과가 나오기를 바란다.
문제는, 이런 과정이 자칫 잘못하면 한 개인의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기 위해 그럴듯해 보이는 데이터와 근거를 남발하여 상대방의 수긍을 강요하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상대방 주장이 객관적이고 타당한 근거는 분명히 있는데, 그렇다고 또 동의가 막 되지는 않고, 그런데 반박할 만한 근거가 딱히 없어서 할 수 없이 동의를 해버리는 그런 상황 말이다.
A : "저는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면 반응이 좋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찬반이 가능한 주장]
B : "왜 그렇게 생각하시나요?" [상대방 주장에 대한 근거를 요구]
A : "일단 지난 몇 년 간 모바일 폰 보급량에 대한 정량 지표를 보면 약 70%의 게이머들이 모바일 폰을 보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더 나아가서 1인당 핸드폰에 깔려있는 게임의 평균 숫자가 1인당 5개이며 하루 평균 모바일 게임을 하는 시간은 약 6시간 정도라는 조사 결과도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디아블로와 같은 이미 PC로 충성도가 확보된 게임 IP를 모바일로 출시했을 때 엄청난 매출을 달성한 리니지 같은 사례도 존재합니다. 디아블로를 모바일로 출시하는 것은 충분히 타당하고 해 볼 만하다고 생각합니다. [주장에 대한 근거 제시]
B : "실제 디아블로 유저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파악이 되었나요?" [사용자에 실제 반응에 근접한 근거 요구]
A가 제시하는 근거들이 실제 객관적이고 공신력 있는 기관에서 수집된 조사 결과라고 인정한다면, 그 사실관계에 있어서는 논란의 여지는 없을 것이다. 같은 자료를 보고 사람마다 해석을 다르게 할 수는 있겠다만, 지금 A가 제시하는 근거들에 빗대어 보면 디아블로 모바일이 반응이 좋을 것이라는 주장이 그다지 터무니없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하지만 A의 근거들이 과연 시장/사용자의 실제 반응에 근접해있는가를 따져볼 필요가 있다. 그래서 B는 다음 질문을 던진다
B : "실제 디아블로 유저들의 반응은 어떠한지 파악이 되었나요?"
과연 A는 디아블로 유저들을 직접 만나서 모바일 디아블로에 대한 반응을 파악하고 다니는 노력을 했을까? 그런 노력이 있었다면 분명 나름의 반응을 확인했을 것이고, B에게 공유가 가능할 것이다. 만약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았다면, 다른 그럴싸한 데이터를 제시하며 답변을 회피하려 할 것이다.
개인적인 경험에 미루어 보면, A는 실제 유저의 반응을 파악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사용자의 반응을 파악한다는 것은 직접 현장에 나가고, 처음 보는 사람을 만나 깊이 있는 대화를 이끌어나가야 하는, 어렵고 귀찮은 작업이기 때문이다. 힘들게 시간과 노력을 들였는데 유저들의 반응이 부정적일 경우, 그 진실을 과연 대범하게 마주할 수 있을지도 고민이 될 것이다.
물리적, 심리적 및 기타 이유로 실제 사용자/시장의 반응을 확인하는 작업이 결여된 채 실제로 매우 많은 의사결정이 이루어진다. 어떤 경우는 다행히 큰 반발 없이 지나가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의사결정의 경우 결과가 참혹스러운 경우도 있다. 디아블로 이모탈이 바로 그 예시라고 나는 생각한다. 실제로, 한 유저는 PC로 출시될 계획은 없는지 질문을 던졌다. 블리자드 담당자는 PC 출시 계획은 전혀 없다고 하자 청중에선 야유가 쏟아져 나왔고, 블리자드 담당자들은 이렇게 반응했다.
"다들 모바일 폰 있지 않아?
맞다, 아마 대부분 모바일 폰은 있을 것이다. 보급률이 높다는 자료도 분명 어딘가에서 확인했을 것이다. 그런데 모바일 폰을 가지고 있으면 디아블로를 모바일 폰에서 플레이하고 싶다는 말은 아니다. 디아블로를 모바일 폰에서 플레이하고 싶은지 여부를 알고 싶었다면 단순히 유저를 만나서 물어보면 파악이 가능했을 것이고, 블리즈컨 현장에서 게이머들이 보여줬던 그 냉담한 반응을 미리 파악했을 수 있었을 것이다.
만약 A가 사용자의 실제 반응을 미리 파악했다면 어떤 주장을 할 수 있었을까? 최소한 아래와 같은 주장을 해볼 수 있지 않았을까?
"높은 모바일 폰 보급률과 모바일 게임 플레이 행태는 친숙해지고 있는 추세 (객관적 근거)이지만, 디아블로를 즐기는 게이머들은 모바일보다는 PC에서 디아블로를 즐기려는 성향이 강합니다 (사용자 근거). 디아블로 모바일을 출시할 계획이라면, 어느 정도의 반발이 예상되며, 특히 PC에서의 디아블로 경험을 특별하게 만드는 요인을 더 정확하게 식별해서 모바일 환경에 담는 노력이 필요할 것 같다고 생각 (찬반이 가능한 개인의 주장) 합니다"
위 문장이 바로 내가 생각하는 모든 자격을 충족한 인사이트의 모습이다. 그렇다고 저 문장이 절대적으로 옳다는 것은 아니다. 인사이트 간에도 그 깊이의 차이가 있고, 또한 항상 성공적인 결과를 보장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개인의 견해, 근거 없는 주장 같은 것들이 인사이트로 포장되어 의사결정 자리를 혼란스럽게 하는 상황을 피하고, 타당성 있고 실제 시장/사용자의 반응을 고려해서 의사결정을 내리는 기본적인 문화가 자리 잡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이트의 식별 기준이라고 생각하는 자격 요건을 공유해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