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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리라 Aug 07. 2021

나의 답답함이 너에게 가 닿기를 1

남편에게 말로는 못하겠어서 글로 쓰는 외침

남편은 절약이 몸에 밴 사람이다.

절약은 나쁜게 아니다. 나도 내 나름의 절약을 하고 가성비를 따진다. 다만, 절약에 대한 기준과 방식이 사람마다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남편의 방식은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8살 4살 두아이와 함께 4인가족이 식당을 가면 보통 몇인분을 시킬까?

3인분? 4인분? 보통은 그렇게 시키지 않을까 싶다


지난주말 포천의 계곡이 있는 캠핑장에서 돌아오는 길에 출발전 근처에서 점심을 먹기로 했다. 미리 검색해 둔 중국집이 있어서 거기를 찾아갔더니 사람이 너무 많았고 대기를 해도 1시간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그냥 근처의 어딘가로 가려고 했는데 하필 중국집이 위치한 그쪽 길목이 다 포천이동갈비가 유명한 곳이었다.

다른 중국집을 검색해서 이동하려고 했는데 전화를 걸어보니 거기도 대기가 많다고 했다.

그래서 결국 눈앞의 호객행위를 따라 갈비집에 들어갔다

내가 원하지 않는 패턴의 식당이다.



포천은 이동갈비가 유명하다. 나는 당연히 그걸 알고 있었지만 굳이 그 메뉴를 고르지 않았다. 굳이 남편이 묻지도 않았지만 대답할 이유로는 표면적으로는 애들 데리고 불 있는데서 굽고 뭐하고 하는거 귀찮아 라는 것이어고, 이런식으로 인분당 주문해서 가는 식당은 어쩌면 지금 겪을 상황을 예상할 수 있었기에 피하고 싶었던거 같다.



남편이 물었다. “얼마나 시켜?”

나는 대답했다. “그래도 3인분은 시켜야지 않아?”

왜 물어보는건지 모르겠을 정도로 남편 입에서 나온 답변은 내 생각을 빗나가지 않았다.

“2인분만 시키자 1인분에 400그람이니까”

거기서부터 별로 대화하고 싶지 않았다.

항상 이런식이다.

중국집에 갔다면 탕수육 한개에 식사2개를 시킬 수 있었을텐데.. 그럼 이렇게 4명이 식당에 가서 내 존재가 작아지는 기분을 느끼는 일은 또 겪지 않아도 됐을텐데..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1인분에 36,000원하는 갈비가격이 싸다거나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 아들들은 그렇게 많이 먹는 타입은 아니니 2인분만 시켜도 괜찮겠지라고 생각하고 넘길수도 있다.

아니, 사실 넘길수 없다. 나는 이런식의 외식이 너무 싫었다.


남편은 이렇게 일상생활에서 아주 사소한 것에서부터 나의 존재를 작고 초라하게 느껴지도록 만든다.

아무리 또래에 비해 적게 먹는 아이들이라해도(사실 요즘 큰애가 많이 먹어서 우리 집애들도 그렇게 적게 먹는 아이들도 아니다) 1인분을 아이 둘이 나눠먹으면 그럼 고작 1인분을 성인남녀 둘이어서 나눠먹는다는 계산이 나온다.

공깃밥도 시키고 된장찌개도 시킨다. 그렇게 그냥 먹으면 됐지 뭐 어떠냐고 말할 수도 있고 어느 순간에는 나도 동의할때도 있다. 하지만 매번 이럴때면 나도 진짜 신물이 나는 기분이 든다.


고깃집에서 2인분을 시키면 일단 굽는 족족 애들부터 먹인다. 혹시나 맛있어서 더 달라고 할까봐 일단 나는 고기 먹기를 시작하지 않고 그냥 맛만 본다. 젠장, 괜히 맛집이 아니었다. 고기가 맛있었다.

너무 맛있다고. 많이 먹으라고 아들한테 말하면서 고기도 올려주고 뜨거운 된장찌개 후후 불어 아들한테 먹여주면서도 여전히 남편과는 한마디 대화도 하지 않았고, 눈도 마주치지 않았다.

2인분의 고기를 나눠먹는 가족은 결국 부모입장에서는 뜨겁고 맛있을때 아이들 먹이고, 더 먹겠다고 할까봐 익은 고기들 잘 식혀두고, 아이들이 다 먹은 눈치가 보이면 남은 걸 먹게 된다. 결국 그 맛있는 고기가 다 식은 채로 마치 잔반처리담당 처럼 먹게 되는 것이다.


그냥 3인분 시켜서, 멀리 나와서 맛있는곳에서 기분좋게 다같이 맛있게 먹으면 될껄 남편은 꼭 이런식이다. 이런 과정이 내가 나 스스로를 얼마나 초라하게 느껴지게 만드는지 부인의 마음같은 헤아려 볼 생각도 하지 않고 본인과 같은 경제관념을 갖지 않는 내가 헤프다는 눈빛과 뉘앙스를 보내온다.(그렇다고 우리가 3인분을 못 먹을 정도로 가난하지도 않다. 외식이 버거울 정도로 가난하면 갈비집을 오지 말고 항상 그렇듯 돈까스집이나 찾아갔어야지)


남편은 어쩌면 한결같은 것일 수 있다. 좋게 표현해서 한결같은 거고 나쁘게 표현하면 발전이 없는 것이다. 결혼해서 8년을 누군가와 함께 살면서 발전이 없다는 것은 본인의 성격을 고칠 의지가 없는 것이고, 그건 내가 굳이 너 불편하다고 나를 바꿀 이유가 뭐니?라는 식의 식어버린 애정도와 이기적인 모습의 증거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의 이 성향이 최근에 생긴 것이 아니라는게 다행이다 싶다가도 변화없음에 너무 화가 나면서 말해 뭐해 체념식으로 마음은 널뛴다.


한결같은 남편과 연애하고 결혼한 초기에는 저런 성향을 보여도 내가 돈을 잘 벌었기에 마냥 기특하게 느껴졌다.

부인이 돈을 많이 벌어오면 씀씀이가 헤퍼지는 남편들도 있다는데 한결같이 최저가를 찾고 10년된 면도기가 고장나서 좀 더 싸게 사기 위해 용산 전자상가에 갔다가 사서 돌아오는 길에 버스안에서 동일제품의 더 싼 최저가를 인터넷에서 찾아냈기에 다시 1시간을 들여 전자상가로 환불하러 다녀올때도 귀엽게만 느껴져서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때는 그런 남편의 행동으로 내 자존감이 떨어지지 않았다. 남편의 최저가만 찾는 행동이 내 성향과는 안 맞긴 했지만 나에게 피해를 주는 건 아니었으니.


그게 처음으로 짜증나기 시작한 것은 큰 아이가 태어나고도 계속 반복되는 절약을 명분으로 하는 남편의 패턴 때문이었다. 나는 점점 시간과 체력이 돈보다 중요해 지는 나이와 상황이 되어 있었고 비단 나의 체력과 시간 뿐 아니라 가족공동체인 남편의 시간과 체력도 아까웠다. 하지만 남편은 그때도 여전히 1시간이면 후딱 다녀오는 마트가 있는데 조금 더 비싸게 문앞까지 배달해 주는 쓱배송을 쓰는 걸 못했고, 나한테 하라고 하는거 아니고 자기가 할꺼니 신경쓰지 말라고 했다


망하고 나서 남편의 절약정신은 더 투철해 졌다. 그리고 그럴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기에 나도 잘 맞춰가긴 했지만 왠지 모르게 나의 감정은 점점 깊은 바다로 들어가는 일이 있었다. 사실 망하기 전 시절에도 나는 별로 과소비가 심한 타입이 아니었다. 그냥 남편은 절대 안 사먹는 스타벅스 카페라떼 하나씩 매일 마시고 일주일에 2~3번 외식할때 남편처럼 간단하게 국밥한그릇 먹는 걸 별로 안 좋아하고 예쁜 파스타집도 가고 싶던 그런 워킹맘의 라이프였다. 그래서 빡빡한 절약이 막 되게 어렵지만은 않았다.

소득은 팍 줄었는데 아이는 두명이 되니 당연히 아끼게 되었다. 외출할때는 물부터 시작해서 애들 간식은 모두 싸가지고 다녔기에 짐은 항상 바리바리 많았다. 가난하다고 해서 아이들의 추억이 줄어들 필요는 없다고 다짐 했기에 최대한 무료시설 잘 이용해가며 망한 이후에도 아이들과 계절마다 많이 돌아다니고 경험도 많이 했다.


그럴때마다 우리는 외식을 할때면 이렇게 2인분이었던 것이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나서 이제는 아이들이 컸는데도, 이제는 멀리 외식나왔을때 마음껏 한번 먹을 수 있는 정도로 회복이 되었음에도 남편은 이렇게 여전하다.


“배 안 불러? 냉면시켜줄까?”라고 말하는 남편 목소리에 고개를 저었다.

그냥 이 곳을 빨리 나가고 싶었을 뿐이었다.

어찌되었든 꾸역꾸역 배는 불렀지만 마음은 착잡했다.


절약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다. 내가 결정해서 내가 2인분을 시켰다면 나는 이렇게까지 초라한 기분이 들지는 않았을꺼다. 남편이 나의 양해를 반강제로 구하고 결정하는 저런 방식은 나에 대한 존중이 전혀 없게 느껴지고 이런게 애정의 척도라고 나는 생각하게 된다.

그에게 나는 맛있는 걸 먹으면 생각나거나 더 주고싶은 그런 사람이 아니라, 그저 입 하나 더 있는 존재인듯 한지는 상당히 오래되었다.


이런 얘기를 누군가 에게 하면

“그냥 니가 먹고싶으면 니가 1인분 더 시켜먹어”라고 할 수 있다는 것도 안다.

그러지 못해서 억울하다 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던게 아니다.

절약이라는 명분하에 나라는 존재는 뒷전이 되는 남편에게 느끼는 소소한 마음다침을 이야기 하고 싶었다.

왜냐면 이런 소소한 상황들이 너무 많은데 하나같이 입밖으로 꺼내자니 막상 좀 너무 작아서 치사한 듯 하고, 말하는 내가 더 이상해 질 수도 있는데

나는 상처받고, 초라해지고, 계속 이런식의 대접을 남편한테 받음으로써 나의 자존감은 낮아져 갔다.


내가 자라는 동안 내 부모님이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았고

밖에 나가서 만나는 사람도 나를 이렇게 대하지 않고

나도 나스스로를 이렇게 초라하게 취급하지 않는데

사랑해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은 남편은 나를 함부로 대한다.


이런 사람과 나는 왜 같이 살아야 할까?

이런 식으로 생활에서 작고 사소하게 낮은 취급을 당하면서 보내는 시간들이 쌓여서 나의 자존감은 한없이 무너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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