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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에 깊이를 더하는 가장 간단한 방법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말고 다른 말은 어떻게 해요?

by 파은

스페인으로 한 학기 교환학생을 다녀온 적이 있다. 이 얘기를 하면 다들 물어본다.

“그러면 스페인어 할 줄 알아요?”

그러면 나는 못한다고 대답했다. 한 마디도 못하는 건 아니었는데, 내가 쓰는 스페인어는 이런 것뿐이었다.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

화장실은 어디인가요?

치즈를 파는 곳은 어디인가요?

봉투 필요 없어요.

옆방 애들이 청소를 안 해요.

저는 스페인어 못해요.


그 나라에서 사용하는 언어를 하나도 모르고 반년 가까이 체류한 것이었는데, 크게 불편하지는 않았다. 마드리드는 수도라 영어 소통이 가능했고, 학교에서도 수업은 영어로 들었다. 스페인어가 필요한 상황에서는 구글 번역기가 있었다. 스페인어를 시간 내서 배울 필요는 없었다.


다만 나는 저 짧은 스페인어를 쓸 때 기분이 좋았다. 현지의 삶에 녹아든 느낌이 들기도 하고. 또 외국인이 자국어를 쓰는 걸 보는 현지인들을 보는 것도 좋고. 내가 스페인어를 하는 줄 알고 더 말을 거는 사람들한테는 꼬리를 내리게 됐지만. 저는 스페인어 못해요!


그래서인지 지금은 교환학생을 준비할 때보다 열심히 스페인어를 공부하고 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면서 공부하고 있는데, 진작 학교 다닐 때 했으면 더 편했겠다는 생각을 한다. 공부에 대한 특별한 목표는 없다. 문득 스페인이나 남미로 여행을 가게 되었을 때, 그 나라 언어를 쓸 수 있으면 좋겠다 정도.


회사를 다니면서 언어를 배우는 속도는 아주 더디다. 일이 년 정도 집중적으로 했는데, 아직 유치원생 정도의 어휘다. 적어도 발화자의 뉘앙스를 더듬더듬 따라가는 정도는 되었다는 데에 위안을 삼기로 했다. 그리고 언젠가 떠나게 되었을 때, 여행을 더 즐겁게 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감이 생겼다.




앞에서도 한 번 이야기했지만, 몽골에서는 러시아 키릴 문자를 사용한다. 언어는 몽골어지만 서술할 때에는 키릴 문자를 쓴다. 외국인이 많이 오는 울란바토르나 주요 관광지에서는 영어와 한국어를 쓰는 사람들이 보이지만, 우리가 가는 곳은 첩첩산중 아니, 평평 평야라 언어가 통하지 않았다.


내가 몽골 여행 전 외워온 몽골어는 안녕하세요(예의 바르게는 센베노, 친한 사이끼리는 세노, 하고 인사한다.). 그리고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 감사합니다 뿐이었다. 낯선 몽골 사람들을 만난다면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로 체면치레는 하겠지만, 마트에서 장을 봐야 할 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안녕하세요, 인사로 내가 원하는 과자를 찾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없고 또 정작 ‘안녕하세요’라고 적혀있더라도 내가 읽을 수 없으니까. 더군다나 몽골어는 사용자가 적어서인지, 앱으로 번역을 하더라도 발음이 지원되지 않는 경우가 허다했다. 그것조차 핸드폰 데이터가 터지지 않는 곳이 많아 사용이 어려웠다. 몽골은 정말이지 뚜벅이로 여행하기 난이도 극악인 나라다.


때문에 대부분의 소통은 몽골인인 투메와 바여라가 맡았다. 두 사람은 한국에서 살았던 경험 때문에 우리와 몽골 현지인 사이에서 양방향 통역을 맡았다. 다만 바여라는 종종 자리를 비웠고, 투메는 말의 반에 뻥을 섞었다. 우리가 믿을 구석은 신비뿐이었다.


동행장 신비는 몽골이 너무 좋아 몽골어를 배웠다고 했다. 한국에서 뉴질랜드로 해외 취업을 한 신비는 긴 휴가를 내고 한국으로 온 참이었다. 휴가 중 한국과 가까운 나라로 여행을 계획했고, 그게 몽골이었다. 신비는 첫 번째 몽골 여행이 끝나자마자 두 번째 세 번째 여행을 잡았다. 우리와 떠나온 자브항은 신비의 두 번째 여행이었다.


신비가 몽골에 처음 발을 디딘 건 한 달 전이었지만, 신비의 몽골어는 꽤나 수준급이었다. (적어도 우리 눈에는!) 아기들한테 이름을 물어볼 수 있었고, 가장 맛있는 음료수가 뭔지 찾을 수 있었고, 또 우리가 먹는 게 어떤 음식인지 메뉴판을 읽을 수 있었다. 한 달 안 되는 시간 동안 배웠다고는 믿기지 않는 실력이었다.


비록 우리의 몽골 여행은 거진 패키지였지만, 또 우리가 가는 곳에는 여행객을 비롯해 몽골 현지인도 없었지만, 신비의 몽골어 덕분에 우리 여행은 더 풍성해졌다. 수테차를 맛 보여준 것도, ‘덜러!’하고 외치는 법을 알려준 것도 신비였다. 신비는 몽골어로 읽고 듣고 배운 것들을 우리에게 공유해 줬다. 신비는 짧은 언어라고 부끄러워했지만, 우리가 몽골을 만끽할 수 있었던 건 다 신비 덕분이었다.



촐로트 협곡에 도착했을 때였다. 우리는 투메의 가이드를 따라 협곡을 마주했지만, 그 모습은 조금 실망스러웠다. 깎아지른 절벽 아래로 흐르는 강. 멋진 풍경이기는 했지만 차를 달리며 마주했던 초원과 온천지역 계곡에 비하면 생각보다 작았다. 협곡에는 사람이 떨어지지 않도록 철제 울타리가 쳐져 있었는데 그것 때문에 어딘가 한국스러운 분위기가 났다.


그래, 모든 여행지가 만족스러울 순 없지, 하루 만에 우리의 눈이 높아진 거겠지. 그렇게 돌아서려고 했는데, 나무 그늘 아래에 쉬고 있는 큰 개를 발견했다. 사람이 오가도 불안해하는 것 없이, 검은 개는 혀를 빼물고 헥헥대며 낯선 이들의 손길을 즐겼다. 신비가 개를 보며 몽골 개에 대해 소개해줬다.


몽골의 전통 개인 ‘방카르’는 사람만 한 삽살개처럼 생긴 용맹한 목축견이다. 유목민들이 가축을 몰 때 이를 돕기도 하고, 밤에 늑대나 침략자들이 오면 경계하고 내쫓기도 한다고. 유목민들은 밤에 방카르가 짖는 소리가 들리지 않으면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방카르는 몽골 사람과 뗄 수 없는 존재다.


비록 우리가 만난 개는 방카르가 아니었지만, 신비는 개를 앞에 두고 우리에게 방카르에 대해 설명해 줬다. 촐로트 협곡은 비록 우리의 기대에 미치지 못했지만, 앞으로의 여행에서 만나게 될 방카르는 충분히 우리 가슴을 두근거리게 했다. 우리는 방카르 이야기를 하며 신나게 차에 탔다.


신비의 이야기를 들으며, 문득 나의 교환학생 시절 일들이 떠올랐다. 영어로도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지만, 스페인어를 조금 더 했으면 그 시기가 더 반짝거렸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와서 아쉽다는 얘기는 아니지만, 지금 하고 있는 스페인어 공부가 조금 더 특별해졌다. 언젠가 내 여행을 더 깊이 있게 만들 준비니까.


한 편으로는 조금 아쉽기도 했다. 몽골 가이드가 한국말을 할 줄 안다고 해서 안녕하세요, 감사합니다만 외워왔는데, 조금 더 다양한 말을 익혔으면 좋았을 것 같았다. 신비는 동행장이지만, 우리와 함께 여행 온 여행자이기도 하니까. 신비한테는 지금도 고마움과 미안함이 있다. 거의 투메 만큼이나 우리 여행을 잘 챙겨준 고마운 신비.


촐로트 협곡을 떠나와 도착한 곳은 우리의 두 번째 숙소였다. 이번 숙소는 테르힝 차강 호수 바로 옆에 있는 게르 캠프였는데, 어딘가 낯설지 않은 생물이 우리를 반겼다. 앉아도 사람 배꼽까지 오는 키. 푹신하고 긴 털. 방카르였다. 몽골에 오기 전까지 방카르의 존재를 몰랐지만, 신비의 설명만으로 나는 방카르를 알아볼 수 있었다. 방카르는 정말이지 푹신하고 따뜻하고 순둥하고 귀여운 개였다.


나는 방카르를 쓰다듬으며 한국말로 예쁜 말을 속삭였다. 사랑스러운 개들에게 으레 해주는 그런 말들. 실컷 방카르를 예뻐해 주면서도 나는 몽골에 다시 오게 될 때 꼭 몽골말을 더 알아와야겠다고 다짐했다. 신비처럼 여행을 더 깊이 있고 신나게 즐길 수 있게. 또 이렇게 귀여운 개가 알아들을 수 있는 예쁜 말을 잔뜩 해줄 수 있게.



촐로트 협곡의 개. 순둥하고 귀엽고 커다랬다.
숙소에서 만난 방카르. 왕크니까 왕귀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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