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가올 여행을 위해, 운동하세요
우리를 맞이한 방카르는 오가는 사람이 익숙한 모양이었다. 긴 털에 흙먼지와 풀 들이 군데 군데 묻어 떡진 걸로 보아 어디서 신나게 놀고 온 것 같았는데, 우리가 다가가자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몸을 붙여왔다. 우리는 방카르에게 손 냄새를 맡게 해준 뒤 목과 턱을 긁어줬다. 방카르는 커다란 혓바닥을 내밀곤 엉덩이를 바닥에 착 붙이고 앉아 우리 손길을 즐겼다.
방카르는 특히 우기를 좋아했다. 우리가 슬슬 자리를 옮기려고 일어났는데 방카르기 우기 뒤를 슬슬 따라갔다. 우기가 방카르를 만지는 손길은 어딘가 거칠었지만, 방카르는 그래서인지 우기를 좋아했다. 방카르가 귀여우면서도 한편으로는 우기가 부러웠다. 디즈니 공주를 한 번이라도 꿈꿔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동물의 친구가 되기를 바라니까. 그리고 저 복슬복슬한 귀염둥이가 예뻐해 달라고 졸졸 따라오는데 누가 안 부러울까!
약간의 스포일러지만, 방카르는 우리가 도착하는 거의 모든 여행 캠프마다 우리를 반겼다. 그리고 방카르들은 늘 우기를 가장 좋아하고 따랐다.
우기한테 부러웠던 점이 하나 더 있다. 바로 타오르는 젊음, 건강!
동행 중 유일한 남자인 우기는 우리 중 가장 나이가 어렸다. 동행 중 가장 나이가 많은 나보다 다섯 살이 어렸는데 그것 때문에 막내를 하고 싶어했던 소은이가 꽤나 아쉬워했더랬다. 나이가 어려서인지 우기는 다른 동행보다 더 이곳 저곳 열심히 움직였다. 게다가 우기는 크로스핏 선수 겸 헬스 트레이너였다. 젊음에 건강이 더해 우기는 여행 내내 거진 현지인처럼 캠프와 마을을 누볐다.
이틀차 숙소 울타리 바깥에는 테르힝 차강 호수가 있었다. 나는 오는 차에서 신비와 대화하면서 호수에 대해 살짝 들었다.
“언니, [한 살이라도 어릴 때]라는 웹툰 알아? 그 호수가 여기 나온 호수야.”
신비의 말에 테르힝 차강 호수에 대해 바로 떠올릴 수 있었던 건, 내가 그 웹툰을 단순히 좋아했기 때문만은 아니다. 웹툰에서 테르힝 차강 호수가 맑고 아름다운, 그리고 날파리와 거머리가 우글우글한 곳으로 묘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깡시골 출신이지만 벌레에 면역없는 나는 마음을 강하게 먹고 호수로 나섰다.
다행인 건, 비 온 후라 그런지 날벌레는 걱정보다 없었다는 거다. 다만 넓고 맑다는 웹툰에서의 표현은 들어맞았다. 한강도 다른 주요 도시를 가로지르는 강에 비해 폭이 넓다고 들었는데, 테르힝 차강 호수는 한강보다도 더 넓게 느껴졌다. 호수 반대편이 까마득해 수평선처럼 느껴지는 호수 위로는 갈매기도 날아다녔다. 호수 주변 풀밭에는 말인지 소인지 양인지 모를 가축의 똥이 즐비했는데, 날파리들은 그 위로만 맴돌았다. 몽골 여행을 시작한지 이틀째 되니까 그정도 똥은 익숙했다.
호수의 맑은 물 아래로 손가락 마디정도 크기의 작은 자갈과 수초 이끼들이 보였다. 물은 딱 손을 담그기 알맞을 정도로 시원했다. 같이 내려온 손이와 우기가 자갈로 물수제비를 뜨길래, 나는 호수 밑에서 납작한 돌을 고르고 있었다. 몇 개의 돌을 주웠다 내렸다 하다가 딱 알맞은 넓이의 돌을 발견했다. 이거다, 싶어 돌을 주웠는데… 손가락 끝에서 뭔가를 느끼고 말았다. 그 감촉을 느꼈으면 얼른 돌을 던져 버렸어야 했는데… 손끝의 감각이 뇌로 연결되는 속도보다 돌을 집어올려 뒤집는 속도가 더 빨랐다. 그리고 발견했다. 돌 뒤에 착 붙어있는 검은 거머리를.
“끄아아아아아!!!”
뇌는 시각 정보가 들어오자 그제야 밀린 촉각 정보도 처리했다. 나는 돌을 저 멀리 던지고 혼비백산하며 뒤돌아 호수를 등지고 뛰었다. 호수로 내려가는 길은 경사가 져 있었는데 너무 급하게 뛰는 바람에 그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뛰었다. 내 비명에 놀란 손이와 우기가 다가왔다. 거머리를 봤다고 호들갑을 떨며 설명해줬는데, 애들이 놀란 건 그것 때문이 아니었다.
“언니, 지금 그게 최고 속도로 달린 거야?”
아주 억울했다. 놀란 가슴을 부여잡고 그게 할 말이냐고 떽떽거리고 싶었지만, 손이와 우기는 깔깔 웃고 있었다. 나는 거의 생명의 위협을 느꼈다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해도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소름이 돋는다. 하지만 손이와 우기는 내 말이 안중에도 없었다. 운동 좀 하라는 잔소리가 쏟아졌다. 어쩐지 우리 식수용 5L 페트병을 드는 데. 팔이 떨렸다느니, 앉아만 있으면 근육이 녹는다느니… 헬스 트레이너 우기의 잔소리에 전직 군인 손이가 말을 얹었다. 너희가 나보다 어려서 그래! 하고 변명해보았지만 걔들한테는 씨알도 안 먹히는 소리였다. 그때 우리 뒤에서 신비가 나타났다.
“날씨가 해 없이 흐린데 비가 안 와서 뛰기 딱 좋아. 난 좀 뛸게.”
그렇게 신비는 헤드폰을 끼고 호숫가 런닝을 시작했다. 신비가 뛰어가는 곳 저 멀리 거대한 돌산이 보였다. 신비가 뛰기 시작하자 손이와 우기도 따라 뛰기 시작했다. 우기는 여행을 위한 고프로를 가져왔고, 손이는 여행 브이로그를 찍기 위해 꾸준히 촬영을 하고 있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찍어주기 위해 서로 카메라를 들어주며 신비를 따라 멀어졌다. 내 곁에 남은 건 나와 동갑 동창이지만 자기는 빠른이라 한 살 어리다는 되도 않는 소리를 늘어놓는 야호 뿐이었다. 그래, 야호가 옆에 있어서 다행이었다.
야호도 나처럼 뛸 생각이 전혀 없었다. 우리는 설렁설렁 걸었다. 야호와 내가 똥을 피해 걷는 동안 신비는 시선 밖으로 사라져 있었고, 우기는 촬영을 한다며 웃통을 벗어 제낀채 뛰어다니고 있었다. 괜히 다들 운동하는 것 같아 뛰어야 한다는 압박감이 생겼다. 슬쩍 야호한테 물었다.
“우리도 뛸까?”
“너 뛸 생각 없잖아.”
야호는 나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애들 참 젊다~ 하면서 뒤를 따라 걸었지만, 사실 젊음의 문제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나는 어렸을 때에도 운동을 그닥 좋아하는 아이가 아니었다. 중고등학생 때, 한창 점심을 먹고 나면 학생들한테 회전초밥처럼 운동장을 돌게 시키던 시기가 있었다. 나는 그때 어떻게든 운동장을 덜 돌아볼까 하고 선생님과 학생부의 눈을 피하던 사람이었다. (심지어 학생부였는데도!) 어렸을 때에도 빠릿빠릿하게 움직이지 않던 느림보였는데, 이제와서 단번에 빠릿해볼까 하는 것도 강도같은 생각이다.
그래도 조금은 부럽기도 했다. 호숫가를 뛰는 우기와 손이의 모습이 정말 여느 방송에 나오는 ‘청춘’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청춘을 미디어에서는 끊임없이 도전하고 불타오르는 것처럼 포장해서 그렇다. 나는 그러한 ‘청춘’의 포장에 반대하는 조금은 사카스틱한 젊은이다. 하지만 막상 멀리까지 온 여행지에서 체력 걱정 없이 하고 싶은 것 다 하면서 움직이는 애들을 보니까 운동을 조금이라도 해볼걸, 싶었다. 물론 늦은 생각은 아니다. 난 아직 젊고, 또 지금 시기에 하는 운동은 30대, 40대의 나를 지탱하는 힘이 되어 줄테니까. 여기서 말하는 ‘지탱하는 힘’은 비유적 표현이 아니라 정말 물리적인 힘이다. 근육이 붙어 있어야 허리를 세우고 걸어다닐 수 있으니까.
나와 야호가 늦어지자, 손이와 우기가 다시 우리 쪽으로 뛰어왔다.
“언니들 멀리서 보니까 사이 좋은 노부부 같아.”
그렇게 말하며 손이는 양 팔에 우리 어깨를 감싸고 밝고 희망찬 설정 인서트를 찍어갔다. 비록 우리가 손이의 브이로그에 에너지 넘치는 모습으로는 등장하기 어려울지 몰라도, 시키는 대로 깔깔깔 웃으며 몸을 앞뒤로 흔드는 설정샷은 자신 있었다. 촬영을 마친 손이는 다시 우기와 함께 돌산으로 뛰었고, 우리는 천천히 그 뒤를 따랐다.
신비와 우기, 손이보다 조금 늦기는 했지만, 우리도 돌산 앞에 도착했다. 가까이에서 본 돌산은 거의 3층 짜리 건물 높이였다. 돌산 너머에도 테르힝 차강 호수가 이어졌는데, 아까의 호숫가는 강가 느낌이었다면 돌산 앞은 정말 바다 같았다. 호숫가는 흰 모래로 덮여 있었고, 바람따라 파도도 쳤다.
속도는 달랐지만 우리는 모두 한 군데에 멈춰 같은 풍경을 바라보았다. 평화로운 오후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