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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이틀차, 가이드한테 사기당한 사실을 알게 된다면

깊고 넓은 호수에는 파도가 친다

by 파은

깊고 넓은 호수에는 파도가 친다. 나는 그 사실을 테르힝 차강 호수에서 알게 되었다. 파도가 백사장을 때리는 소리가 울렸다. 간간이 갈매기가 울었다. 흐린 날씨 때문에 호수 건너편에는 안개가 껴있었다. 반대편이 보이지 않는 호수는 더더욱 바다처럼 느껴졌다. 호수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상쾌했다.


“아, 여기서 라면 끓여 먹으면 딱이다.”


우기의 제안에 모두 솔깃했다. 호수로 넘어가는 해를 보며 신라면 국물을 들이켜면 꿀맛일 것 같았다. 마침 저녁을 먹으러 돌아가야 할 시간이었다. 우리는 저녁을 먹고 다시 돌산에 돌아오기로 했다. 라면과 보드카를 가지고.



저녁을 먹던 중 약간의 문제가 생겼다. 돈 문제였다. 시작은 보드카였다. 밥을 먹으면서 돌산에 가져갈 물건을 가늠하던 중이었다. 커다란 곰솥 냄비, 부르스타와 부탄가스, 각각 사용할 앞접시와 젓가락, 돗자리. 마트에서 사 온 라면과 끓일 물. 다섯 명이 먹을 양을 체크했는데 아무래도 보드카가 모자랄 것 같았다. 술을 마시지 않는 내가 마실 음료는 있었지만 술은 네 명이 먹기 부족했다. 이미 해가 졌고, 게르 캠프 주변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신비는 투메에게 술을 부탁해 보겠다고 했다. 투메는 흔쾌히 술을 사다 주겠다고 했고. 신비는 투메에게 카드를 넘겼다. 보드카를 사다 달라며.


우리는 밥 먹은 식기를 정리하고 짐을 싸서 투메를 기다렸다. 술만 받으면 바로 출발할 수 있도록. 한 시간이 안 되어 돌아온 투메는 신비에게 보드카와 카드를 건넸다. 영수증도. 아니, 그건 영수증이 아니라 ATM 출금 영수증이었다. 꽤나 찝찝한 일이었다. 투메한테 뭔가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투메는 이미 자리를 뜬 후였다. 해는 어느새 지고 있었고, 돌산은 꽤 멀어서 우리도 출발해야 했다. 우리는 짐을 바리바리 안고 돌산으로 향했다. 마음이 편하지는 않았다.


돌산을 향해 걷는 30분 동안, 우리의 마음은 뒤숭숭했다.

왜 마트에서 카드로 결제하지 않았을까? 정전 때문에 포스기가 먹통이었을 수도 있지. 그러면 어떻게 ATM을 썼을까? 가끔 포스기에서 카드 비밀번호를 누르라고 할 때가 있어서 투메한테 비밀번호를 알려줬대. 그럼 거스름돈은 왜 주지 않았을까? 보드카 값과 딱 떨어지는 금액이었을까? 보드카 값 기억나는 사람?

우리의 여행은 여행사를 통한 것이 아니었다. 가이드 투메가 짠 프라이빗 여행에서 우리의 믿을 구석은 투메 뿐이었다. 그런데 투메가 의뭉스럽다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가장 혼란스러웠던 사람은 신비였다. 신비는 투메와 여행을 이야기하고 계획을 전달하며 우리를 모은 동행장이었으니까. 보드카로 시작된 걱정은 여행의 진행에 대한 우려로 바뀌었다. 우리는 애써 걱정을 억누르려고 대화의 화제를 돌렸지만, 온 정신은 딴 데 가있었기에 이야기는 자꾸 돌고 돌아 투메와 보드카로 돌아왔다.


일단 돌산에 가자. 라면을 먹자. 우리는 애써 걸었다. 돌산까지 걷는 30분 동안 마음은 편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여행은 고작 이틀차였고, 우리한테는 닷새가 더 남아있었다. 다행히 노을 지는 돌산은 충분히 예뻤다. 우리는 라면을 끓일 곳을 골라 움직였다. 저녁이라 바람이 거센 탓에 우리는 바람이 불지 않는 위치를 찾아 돌산을 빙빙 돌아야만 했다. 마침내 우리가 자리 잡은 곳은 돌산 바로 아래, 호수와 맞닿은 백사장이었다.


돗자리를 펴고 가스를 부르스타에 넣고 냄비에 물을 넣고… 야호는 핸드팬을 꺼내 연주했고, 우리는 평화를 즐겼다. 아니, 즐기려고 했다. 신비의 불안은 가라앉지 않았다. 우리는 신비를 진정시키려 했지만, 노력은 신비에게 먹히지 않았다. 투메가 쓴 카드가 신비의 것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신비는 투메의 여행에 우리를 모은 당사자로서, 여행에 대한 미안함을 느끼고 있었다. 만약 투메가 나쁜 사람이라면, 신비는 우리한테 미안해서 쓰러져 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신비는 선언했다.


“안 되겠어. 나, 투메한테 가서 물어봐야겠어.”


다들 신비를 말렸다. 돈 문제도 예민한 문제였지만, 신뢰는 더 큰 문제였다. 하지만 신비는 이미 마음을 굳힌 후였다. 우리는 그러면 투메한테 같이 가겠다고 했다. 신비는 단호하게 거절했다. 혼자, 혼자 가서 투메랑 이야기하겠다고. 이미 물에 스프를 풀어 부르스타에 올린 상태였고, 게르 캠프로 돌아가려면 다시 30분을 걸어야 했다. 신비는 그 길을 혼자 가서 투메와 이야기하겠다고 했다. 우리는 여행을 즐기라고. 여행을 불편하게 만들어서 미안하다고.


신비를 말리던 다른 동행들은 신비의 강한 태도에 한 발 물러섰다. 하지만 나는 신비를 혼자 보낼 수 없었다. 캠프에는 투메와 바여라, 둘 뿐이었다. 그 둘은 신비보다 두 배는 더 컸고, 분명 신비가 할 이야기를 탐탁지 않아 할 게 분명했다. 그 불편한 상황에 신비를 혼자 보낼 수는 없었다. 아직 일어나지 않은, 하지만 만약에 만약을 더하면 일어날 수도 있을 법한 일들이 떠올라 신비를 보낼 수 없었다.


신비를 말리던 동행들은 이제 나를 말렸다. 신비는 동행장이니까 신비가 원하는 대로 해 주자고. 이 이야기를 하지 않으면 남은 닷새의 여행 동안 신비는 내내 불편할 거라고. 그 말에 나도 결국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길고 먼 여행을 온 우리에게는 하루하루가 소중했다. 게다가 이 여행을 위해 뉴질랜드에서 날아온 신비에게는 이 시간이 더더욱 소중하겠지. 신비는 우리를 안심시키고 홀로 돌산을 떠났다. 다시 돌아오겠다는 말과 함께. 우리는 도착하면, 혹은 무슨 일 생기면 바로 연락하라고 꼭꼭 당부를 한 뒤 신비를 떠나보냈다.



신비가 떠난 뒤, 우리는 가라앉은 분위기를 타파하기 위해 움직였다. 야호는 핸드팬을 꺼내 연주했고, 우기와 손이한테 핸드팬 치는 법도 가르쳐줬다. 신비를 기다리며, 우리(물론 나 빼고)는 맥주를 꺼내 마셨다. 어느새 하늘은 푸르스름해져 있었다. 바람이 더 강하게 불며 쌀쌀해지자, 손이가 호수에 발을 담갔다. 물이 더 따뜻하다는 말에 우리는 손이를 따라 신발을 벗고 호수에 발을 담갔다. 발로 축축한 흰모래를 모아쌓으며 모래성 놀이를 하기도 하고, 핸드팬 연주를 따라 흥얼거리기도 하고. 날이 흐려 별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미지근한 물이 발목을 간지르는 기분이 좋았다. 문득 우기가 물었다.


“다들 어쩌다 몽골에 오게 된 거야?”


우기와 손이는 신기하게도 새 출발을 앞두고 있었다. 우기는 새로운 곳의 트레이너로 일하기 전에, 손이는 군 제대 후 하던 일을 잠깐 멈추고 다시 취업 준비를 하기 전에. 이야기를 할수록 몽골이 아니라면 나와 만나지 못했을 결의 사람이라는 게 느껴졌다. 또 한 편으로는, 이렇게 다르게 살아온 우리지만 비슷한 마음으로 몽골에 온 것이 신기했다.


마침 손이가 준비하는 일은 내가 하고 있는 일과 비슷했다. 손이와 나는 조금 더 깊은 이야기를 나눌 수 있었다. 손이가 하는 취업에 대한 고민, 진로와 방향에 대한 고민은 내가 고작 몇 년 전에 하던 것과 같은 고민이었다. 이미 내 삶에서는 그 일들이 다 지나가 버렸는데, 손이한테는 여전히 큰 일이라는 게 기분이 이상했다. 손이는 나와 똑같은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또 내가 정답 중의 정답만 골라 살아온 사람이 아니기 때문에 손이한테 해줄 말은 많지 않았다. 하지만 손이가 하는 어렴풋한 걱정을 조물조물 만져 윤곽을 잡아줄 수는 있었다. 문득 내가 진짜 서른을 앞두고 있다는 게 실감 났다.


10대, 20대, 그리고 30대를 앞둔 몽골에서까지도 내 삶은 걱정 투성이었다. 어른이 되어 아는 게 많아지면 걱정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쉽게도 그런 일은 없었다. 내가 아직 걱정을 걷어낼 만큼 철든 사람이 아니라서 그런 줄 알았다. 그런데 이제 보니까, 어른은 걱정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걱정의 형태를 아는 사람인 것 같다. 분명 해결할 수 없을 것만 같았던 일도 시간이 지나면 풀려있고, 그러면 막연했던 걱정은 형태를 찾았다. 비록 걱정을 근원째 없애버릴 수는 없지만, 나는 이제 뭘 걱정해야 하고 뭐가 쓸모없는 걱정인지 안다. 닥치는 새로운 것들은 여전히 어렴풋할지라도, 적어도 지나온 일들은 그렇다.


깊고 넓은 호수에는 파도가 친다. 옛날이랑 똑같이 넘실대는 불안에 흔들리는 줄로만 알았던 나는 더 깊어지고 넓어지는 중인지도 모른다. 파도는 계속 백사장을 때리지만, 호수는 더 넓고 깊어져 간다. 나는 손이의 취업과 신비의 독대가 걱정되지만, 그 두 사람의 파도를 응원하기로 했다. 모두 깊어지는 중이니까.

손이를 응원하면서도 나는 신비를 기다렸다. 신비의 독대가 잘 마무리되기를 바라면서.



하지만 왜인지 신비는 돌아오지 않았다. 해는 어느새 다 져버려서 핸드폰 플래시 없이는 앞도 잘 보이지 않았다. 문득 우기가 물었다.


“그런데 물은 왜 안 끓는 거야?”


곰솥에 부은 2L 페트병 두 개짜리 스프 푼 물이 여전히 그대로였다. 바람이 불어서 불이 꺼진 건가 했는데, 가스가 없었다. 기다림에 비해 허망한 결과였다. 우리는 결국 풀었던 짐을 바리바리 싸서 다시 게르로 돌아가기로 했다. 돌아오지 않는 신비를 찾으러. 일어나기 위해 짐을 정리하는데, 돌산을 잠깐 비춰봤던 손이가 소리를 질렀다. 뭔가가 득시글했다고 했다. 그걸 목격한 게 내가 아니라서 정말 다행이었다.


돌아오는 길은 또 자갈밭이라서, 우리는 발아래를 비추며 걸어야 했다. 밝은 플래시 앞에는 낮에 보이지 않던 날벌레들이 모여들었다. 플래시 문제만은 아닌 것 같은 게, 플래시를 발아래 깔아도 얼굴로 날벌레들이 날아들었다. 벌레 혐오 인간인 나는 걸으면서 온몸을 흔들었다. 소리도 질렀다. 그야말로 아비규환이었다. 벌레를 미워하는 사람이 오는 지옥 같은 느낌. 신비와 이야기했던 몽골 웹툰이 떠올랐다. 테르힝 차강 호수, 날벌레와 거머리 많은 곳. 웹툰은 사실이었다.


가는 길에 다른 게르 캠프가 있어서, 우리는 머리를 맞대고 우리 게르 캠프를 찾아야 했다. 게르들은 다 비슷하게 생겼고, 또 캠프를 분리하는 건 두 줄짜리 나무 울타리뿐이었다. 그래도 게르 캠프 쪽에는 커다란 조명이 있어서 우리는 날벌레처럼 그 빛을 향해 걸었다. 우리 뒤로 그림자가 길게 질 정도로 밝은 곳에 가까워지자 핸드폰이 울렸다. 신비였다.


신비는 우리가 게르를 찾지 못할까 봐 위치를 알려주었다. 돌산이 너무 외져서 아무래도 데이터가 터지지 않은 것 같았다. 우리는 막판에 길을 확인하고 무사히 게르로 돌아왔다. 신비는 조금 운 것 같았지만, 개운하다고 했다.


투메와의 대화는 잘 풀렸다고 했다. 두 사람은 바여라의 차에 앉아 남은 술을 마시며 여행에 대해 길게 이야기를 나눴다고 했다. 금액은 오해가 맞았고, 투메에게는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투메는 신비가 왜 이렇게 걱정하는 지도 이해했다. 신비의 얼굴이 아까보다 밝았다. 더 깊어진 모습이 보였다.



우리의 라면은 부탄가스를 찾아 게르 안에서 끓기 시작했다. 부글거리는 소리가 아주 힘찼다. 라면이 익기까지 우리는 아주 경건히 기다렸다.


“와, 진짜 너무 맛있어.”


우리는 라면 첫 입을 우기에게 양보했다. 우기는 여행을 오기 전까지 보디빌딩 대회를 준비하느라 라면을 몇 달이나 끊고 있었다고 했다. 우기는 라면을 먹으며 거의 울었다. 살면서 본 어떤 먹방보다도 진실해 보였다. 빨리 먹으라는 우기의 손짓에 우리는 너나 할 것 없이 냄비로 달려들었다. 정말 맛있는 라면이었다. 하루 종일 걷고 뛰어서 그런 건지, 아니면 뚜껑 없이 가져온 냄비에 날벌레 단백질이 섞여서인지. 우리는 곰솥 냄비를 게눈 감추듯 비웠다.


호수처럼 깊고 넓은 곰솥 냄비는 금세 비었다. 우리는 라면으로 배를 채운 후, 만족스럽게 이틀차 여행을 마무리했다. 비록 파도는 쳤지만 더 넓고 깊어진 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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