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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M씽크 2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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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재주 Jun 18. 2019

낯선 예능에서
우리 집의 냄새가 난다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 눈치보는 남편같은 예능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이상적인 시월드, 그 예시는?

 

안혜상씨의 희망 사항. 아영 정태 부부는 얼마나 변했나요?

“아영, 정태 부부처럼 저희도 변할 거라고 생각합니다.”

 안혜상씨의 말이다. 최근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 합류한 안혜상씨는 시어머니와의 갈등과 남편의 무관심이 바뀔 수 있을 거라는 믿음을 드러냈다. 그렇게 예시를 든 것이 백아영, 오정태 부부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방영 초기부터 수많은 질타와 비판을 받아온 이들은 남편 오정태의 달라진 모습을 보여주며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하지만, 이들이 달라진 시월드의 예시로서 자격이 있을까?


 다음은 백아영, 오정태 부부의 최근 에피소드 내용이다.

 휴일, 시어머니의 연락을 받은 백아영, 오정태 부부는 시누이의 집으로 향한다. 파김치를 담그고 있는 시어머니와 시누이를 거드는 백아영씨. 오정태씨는 백아영씨 대신 시어머니를 돕는다.


 언뜻 보면 훈훈한 가족 이야기 같지만, 뜯어 보면 아니다. 시어머니는 며느리가 요리를 못한다며 뒷담화 같은 푸념을 늘어 놓는다. 며느리 백아영씨는 시누이가 갑작스레 자리를 비운 후에도 시어머니와 파김치를 담근다. 아무리 남편 오정태씨가 김장을 돕는다고 해도, 애초에 빼앗긴 휴일은 돌아오지 않는다. 고질적 문제는 변함이 없다.


오자마자 일 시작하는 아영씨. 휴일은 어디로 갔나요?


 이 모습은 우리가 알고 있는 보편적 가정의 모습이다. 많은 이들이 며느리의 고충에 공감하며 시어머니의 행동에 분노하는 이유는 저 모습이 ‘우리 집’의 모습과 닮아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렇듯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많은 이들에게 사랑과 공감을 얻고 있다. 하지만, 프로그램이 가지는 의의는 서러움이나 답답함만큼 시청자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는다. 마치 ‘우리 집’의 모습과 같다. 며느리의 시월드에 문제가 있다는 사실은 알고 있지만, 그것을 해결할 방법이 없다.


[어느 편에도 서지 못하는, 욕먹는 남편 같은 방송]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의 갈등에서 응당 중재자 역할을 해야 하는 이는 남편이다. 아들이자 남편으로서 두 사람 사이의 완충 지대가 되어야 한다. 그런 역할을 제대로 해내는 이가 드물기는 해도 말이다. 보통의 남편은 이쪽 편도 저쪽 편도 제대로 해내지 못해 양 쪽에서 시달린다고 한다. (결혼은 안 해봤지만, 주변피셜 그렇다고 한다…!) 이를 보고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꼴이라고 한다나? 하지만 이 비유는 잘못됐다. 남편이 받는 스트레스는 응당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한 후폭풍이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가 딱 그 모습이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를 보면서 얻는 것은 스트레스뿐이다. ‘내가 왜 이걸 보고 있지?’ 싶을 만큼 억울하고 답답한 일 투성이. 시집살이에 시달리는 며느리의 모습에 차라리 설정이고 대본이기를 바랄 정도다.


 대한민국 며느리들의 일상을 관찰하며 며느리한테만 강요되는 ‘도리와 희생’에 대해 의문을 던지고 며느리이기 때문에 받아왔던 불공평한 대우와 억압에 대한 내용을 며느리의! 며느리에 의한! 며느리를 위한! 전지적 며느리 시점으로 풀어낸다! 서로 달랐던 ‘이상한 나라’에서 다름을 인정하고 비로소 ‘행복의 나라’로 가게 되는 이 시대의 ‘진정한 가족’ 이야기! 대한민국을 발칵 뒤집을 며느리들의 발칙한 모험담이 펼쳐진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프로그램 소개 中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어느 누구의 편도 대변하지 못한다. 프로그램 소개에서도 알 수 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그리는 ‘진정한 가족’은 다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며느리의 행복과 진정한 가족을 묶어 놓았다. 프로그램이 가지는 근본적인 문제점이다.


 이 현상은 시어머니와 며느리가 생각하는 가족의 역할이 다르기 때문에 벌어진다. 시어머니가 꾸려온 가족과, 며느리가 만들려고 하는 가족은 다르게 기능한다.

 시대는 변한다. 더불어 가족의 역할도 변한다. 가족만이 할 수 있던 양육과 사회화 등을 국가와 기타 기관이 나눠 가지고 있다. 하다못해 제사 음식이나 반찬도 이제는 사 먹을 수 있다. 가족의 기능이 축소된 만큼 구성원은 자유로워질 수 있다. 다만, 이 자유를 온전한 자유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가 갈등의 핵심이다. 가족의 역할이 많았던 시기를 거쳤던 시어머니 연령층은 그 자유를 방임으로 받아들일 여지가 충분하다. 시어머니 세대에서는 가족의 역할이었던 일들을 내팽개치는 꼴이니 말이다.


 특히 이 갈등은 핵가족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한 때에 유년기를 보낸 이들이 결혼적령기를 맞은 지금, 두드러진다. 현재 며느리 세대는 세기말의 IMF와 밀레니얼에 유년을 보냈다. 핵가족화가 이루어지고 대가족의 기능이 약화되던 시기와 일치한다. 삶에서 중요한 요소가 개인인가, 가족인가? 이에 대한 명확한 해답은 내릴 수 없어도 시어머니 세대와 며느리 세대의 마음이 어느 쪽으로 쏠리는 지는 모두 알고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남편이자 아들의 역할이 중요하다. 여전히 부계 중심적 가족관을 유지하고 있는 대한민국에서 원래의 가족을 유지하려는 시어머니와 새로운 가족을 만들려고 하는 며느리 사이의 공통분모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남편은 원래의 가족과의 관계를 유지하는 한 편, 독립적인 가족의 건설을 위해 힘써야 한다. 이 과정에서 시어머니와 며느리 중 누구의 편을 든다는 것은 사실 말도 안된다. 다만, 두 편의 완충 지대가 되어 이해 관계를 유지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이것은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가 나아가야 할 방향과도 같다.


낯선 예능에서 우리 집의 냄새가 난다.

 현재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의 카메라는 며느리의 시선에 중점을 둔다. 시집살이를 당연시하는 시어머니와 사위의 등쌀 아래 삼켜야 하는 며느리의 눈물을 인터뷰에 담는다. 평범한 시월드의 일상을 담아 내기도 한다. 이 과정에 카메라는 철저히 며느리의 편이다. 하지만, 며느리의 상황을 시청자에게 전달할 뿐, 그 이상의 역할을 하지는 않는다. ‘며느리의 시월드 노동은 부당하다.’라는 전 국민이 (적어도 며느리는) 다 아는 사실을 매주 보여주고 있다. 의미가 없다. 우리 집에서 매일 보는 광경이다.

 그렇다고 해서 고부 갈등에 솔루션을 제시하지도 않는다. 관찰 프로그램을 표방하는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그저 지켜볼 뿐이다. 시어머니가 시집살이를 시키는 것에 대한 포장도 하지 않으며 며느리의 고생을 여과 없이 보여준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출연진들에게 악플과 비판이 쏟아지는 것이 이상한 일도 아니다. 이 비난은 사실, 프로그램을 향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마음 고생하는 안혜상씨, 그리고 시어머니 사이에서 남편은 무엇을 하고 있나요? 프로그램은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 건가요?


가만히 있으면 양쪽에서 욕먹는다, 명절의 남편

 그래서 이런 결론을 내렸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남편 같은 프로그램이다. 시어머니 편도 며느리 편도 들지 않아 양쪽에서 욕먹는 프로그램이라는 뜻이다. 한 편으로는, 이 갈등을 종식시킬 수 있는 위치에 있다는 말이다. 

 우선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프로그램 지향점을 명확히 해야 한다. 며느리의 행복과, 가족 전체의 행복은 동일하지 않다.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현재의 고부갈등 속 며느리의 상황을 ‘이상한 나라’라고 규정했다. 그렇다면 ‘이상한 나라’를 빠져나가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를 제시하는 것 역시 프로그램의 역할이다.

 현재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시월드의 불편함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제시하고 있지 않다. 며느리의 불필요한 노동을 문제로 제기한 후, 결과로 제시하는 것은 선물이나 이벤트를 통한 일시적 행복일 뿐이다. 예능이 아닌, 시사/교양 프로그램으로서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한 가정 너머에 메시지를 던져야 한다. 며느리의 행복을 바란다면 시어머니의 관점을 변화시키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혈연을 나누지 않은 며느리의 가족 통합을 바란다면 며느리와 시어머니가 서로를 이해할 수 있도록 의견을 조절해야 할 것이다.


 어느 방향이던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시어머니와 며느리 사이에서 안절부절하는 남편이 되어서는 안된다. 가정의 평화를 위해서 남편이자 아들의 노력이 필요하듯,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에도 변화가 필요하다.

 낯선 예능에서 풍기는 ‘우리 집’의 냄새.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는 ‘우리 집’에 대한 공감을 유도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야 한다. 며느리의 행복과 가족의 화합을 위한 명확한 솔루션을 제시하고, 그 변화 과정을 보여줄 수 있어야 한다. 이상한 나라였던 ‘우리 집’이 행복한 ‘우리 가족’이 될 수 있는 해법을 제시하는 것이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의 프로그램 의도에 적합하지 않을까?

 그렇게 답답하던 오정태씨를 변화시킨 것은 방송을 통해 스스로를 타자화 한 경험과 시청자의 비판이다. 아직 훌륭하지는 않지만, 오정태씨는 더 나아지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처럼,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 역시 시청자들의 비판을 발판 삼아 ‘이상한 나라’의 며느리들을 행복한 가정으로 데려다 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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