짧지 않은 기간 동안 만난 사람과 헤어졌다.
내 인생에서 가장 아끼던 사람이었고, 마지막까지 서로에게 좋은 말을 해주며 끝났다.
미국에서 같은 학교 석사를 하며 만났던 사람이었고, 졸업을 하고 각자의 커리어에 대한 계획이 깊어질수록, 각자가 그리는 미래에 서로를 포함할 수가 없게 되었다.
장거리 연애는, 특히 서로의 국적이 다른 경우에는, 한쪽의 "희생"을 통해서만 함께할 수 있게 된다. 혼인신고를 통해 한쪽 국가에서 거주할 수 있는 비자를 취득하는 것, 커리어가 가장 중요한 둘에게 이것은 "희생"이라 치부되었다.
미국을 떠나면서 근무 환경과 연차 사용이 더 자유로운 회사에서 일하는 상대방이 분기마다 만나자는 제안을 했고, 서로 그 목표를 위해 열심히 여행 계획을 세웠었다. 실제로도 헤어지기 전까지는 올해 두 번 더 만날 계획이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재회하는 횟수가 아니었다.
우리는 서로가 비슷하다고 생각하며 관계를 시작했다. 적어도 나는 그렇다. 이제는 서로에게 비슷한 결도 있지만, 살아온 배경이나 앞으로 나아갈 방향성과 가치관이 확연하게 다르다는 것을 안다. 만나기 전과 헤어진 후의 시간은 다르게 흐르지만, 만났던 시점에는 같은 시간대를 살아가서 가능했던 인연이었다.
처음 만난 날, 서로 싫어하는 것이 일치함을 느끼며 서로에게 마음을 조금씩 열기 시작했다. 아이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고 출산은 의무가 아니라고 생각하는 점, 생각 없이 살아가는 사람들에 대한 비판적인 태도 등, 단순히 싫어하는 것이 아니라 가치관과 연결되는 지점이 있는 내용이라 더 크게 동질감을 느꼈다.
만나면서는 서로의 다른 점을 존중해 주고, 한쪽이 관심 있는 것을 같이 하자고 강요하지는 않았지만, 공동의 관심사가 있으면 같이 시간을 보냈다. 자연스레 서로의 취향이 각자의 삶에 스며들었고, 각자가 서로의 일부가 되었다.
이제 나는 살면서 운동이 얼마나 중요한지 몸소 느끼게 되었고, 중식을 한식보다 좋아하게 되었고, 예전보다 체계적인 사람이 되었다. 상대방은 케이팝 콘서트를 다닐 만큼 케이팝을 듣게 되었으며, 전에는 손에도 대지 않았던 디저트를 가끔 먹기도 하고, 예전보다 독립적인 사람이 되었다. 그리고 둘 다 아직은 결혼보다 각자의 커리어가 중요하기 때문에 다른 길을 걷기로 마음먹었다.
몇 가지 장벽이 없었으면 문제가 될 것 없는 사이였지만, 애초에 그런 성향 차이로 인해 장거리가 시작되었다. 나는 미국이 아니어도 괜찮은 대안이 있었으나, 상대방에게는 미국이 아닌 대안들은 매력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나는 미국 사회에 대한 불만이 개인적인 불만으로 이어졌지만, 상대방은 비슷한 불만을 개인의 문제와는 별개로 여겼다.
우리는 싸운 적이 거의 없다. 둘 다 불필요한 감정 소모를 지양하는 편이고, 생각이 많고 예민하면서도 감정적으로 행동하지 않는 편이다. 그렇다고 미적지근한 연애를 한 것은 절대 아니다. 그저 말을 안 해도 상대가 어떤 상태인지, 어떤 생각을 하는지 잘 파악하게 되었고, 이해할 수 있는 관계가 되었다.
그렇기에 우리는 마음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에서 헤어지자는 결심을 했다. 장거리 연애에서 오는 피로감과 불안감이 더욱더 높아진 상태에서 다투며 헤어지는 것은 서로에게 좋지 않다는 생각이 일치했기 때문이다. 당장의 이별이 주는 아픔이 클 것은 알지만, 지금 끝을 내야 장기적으로 이 관계를 좋은 기억으로 남길 수 있다는 것도 알기 때문이다.
상대는 헤어지기 며칠 전 나는 몇 년 전 처음 봤을 때와 크게 달라진 것이 없지만, 자기 자신은 많이 바뀐 것 같다고 했다.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았지만, 생각해 보면 나도 그 사이에 많이 바뀐 것 같다.
요즘 김영하의 신간, "단 한 번의 삶"을 읽고 있다. 작가는 본인을 포함한 사람이 얼마나 많이 바뀌게 되는지 성찰한다. 과거의 그는 현재의 그를 알아보지 못할 것이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라고 서술한다.
이 관계를 시작하기 전의 내 모습, 혹은 상대방의 모습을 보게 된다면, 아직 못 알아볼 정도로 달라지지는 않은 것 같다. 그러나 우리 모두 가치관부터 생활 습관까지 바뀐 것은 정말 많고, 서로가 헤어진 상태에서 더 긴 시간을 따로 보내면, 먼 미래에 만나더라도 서로를 전혀 못 알아볼 수도 있을 것 같다.
이런 생각을 하면 슬프다기보다는 이제 거의 묘하다. 마치 나 자신이 아니라 제3자의 입장에서 영화를 보는 느낌이다.
원래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지만, 평소에는 과거에 있었던 일을 무더기로 기억하는 일은 잘 없다. 머릿속에 없던 일도 가끔 떠올랐다가 다시 까먹는 것이 일반적이라면, 최근에 이별을 겪고 나서는 상대방과의 기억이 상당히 자주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현상을 겪고 있다.
얼마 전에 전 직장동료와 거의 1년 만에 재회를 했다. 그 전 직장을 다닐 당시 너무 힘들어서 그런지, 동료가 어떤 이야기를 해주면 기억은 하는데, 생각해 보니 같이 갔던 동네 이름이나 백화점 이름이 하나도 기억나지 않았다. 불과 1-2년 전만 해도 정말 자주 갔던 곳인데 얼마나 잊고 싶었던 시절이면 기억을 못 할까 싶었다. 하지만 그 시기에 애인이 거의 달마다 찾아와서 쌓은 추억이 있어서 그런지, 최근에는 그 까먹었던 백화점 이름도 갑자기 생각이 났다.
그때는 서로 다른 곳에 살더라도 같은 시간과 비슷한 길을 걷는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모든 것이 달라졌다. 사는 곳, 각자의 삶을 살아가는 방식, 그리고 이별을 추억하는 속도까지 아마 다를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