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에 어딘가에 제출했던 글
흔히들 혼자 살 때 아프면 서럽다는 이야기를 한다. 사실 혼자 살게 된 기간이 상당히 오래되었지만, 공감하는 말은 아니다. 귀찮은 성격 탓에 아프면 아픈 대로 일을 꾸역꾸역 해내기보다는, 아픔을 쉼의 계기로 삼는다. 이 과정에서 서럽다기보다는 통증에 신경이 쓰여 복잡했던 머릿속이 오히려 가벼워지는 기분마저 든다. 외출이 잦은 생활 속에서 아플 때야말로 온전히 나만의 공간에서 혼자 있는 시간을 보내게 되는 것이 나쁘지만은 않다.
하지만 때로는 정말 괴로워 외부의 도움이 절실해지는 상황이 오기도 한다. 몇 년 전 유행이 끝나갈 무렵 코로나에 걸렸고, 회복이 되자마자 목감기를 앓았다. 면역력이 낮아진 탓에 단순 목감기였는데 오히려 코로나보다 고통스러웠다. 당시 유학 중이었는데, 아픈 몸을 간신히 이끌고 간 학교 병원에서 받은 건 사탕과 캔 음료뿐이었고, 근처 병원에서는 목감기라는 진단을 받기 위해 7만 원 넘게 지불했다. 저렴한 가격에 바로 약처방까지 해주는 한국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스스로를 돌보려고 했건만 분노만 얻고 감기는 감기대로 오래 지속되었다. 이렇듯 해외에서는 아플 때 그다지 협조적이지 않은 의료 시스템 때문에 ‘돌봄’의 난이도가 높아진다. 그러나 몸보다 마음이 힘들 때는 오히려 도움받기가 수월할 수도 있다는 것을 경험하게 된 일이 있었다.
졸업 후 구한 직장에서는 대학 시절부터 앓아오던 우울증과 불안이 심해졌다. 그전까지는 스트레스를 받아도 몸으로 직접적인 영향이 드러나지는 않았는데, 이때는 몸까지 힘들어졌다. 아침에 일어나서 출근할 생각을 하면 심장 소리가 귀까지 울렸고, 가끔은 숨 쉬는 것도 불편해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조차 버거웠다.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않고 그저 버티는 것만으로는 도저히 미래가 그려지지 않았다.
단순히 신체적인 증상을 없애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원인을 해결하고 싶어 정신과 말고 심리 상담을 알아보게 되었다. 다행히 회사 보험으로 무료 심리 상담 3회를 받을 수 있었고, 그 이후로도 저렴하게 상담을 이어갈 수 있었다. 상담 전에는 건강보험 웹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상담사들의 짤막한 프로필을 훑어보며 신중하게 나의 문제들을 토로할 사람을 선별했다. 그 사회의 주류가 아니면서도 나와 다른 배경도 이해해 줄 수 있는 사람인지를 살폈다. 직장 생활에서 오는 스트레스에 어느 정도 기여한 것은 회사 사람들과 배경과 가치관이 너무 다른 것도 있어서 이런 것도 고려하여 상담사를 알아보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상담은 성공적이었다.
감정에 무딘 데다 표현에도 매우 서투른 나의 감정은 강요하지 않은 채, 상담사는 내가 가지고 있던 막연한 불안과 우울을 잠재워줬다. 여러 차례의 대화를 통해 나의 사고방식이 어떻게 더 큰 불안을 자초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내 생각 회로를 어떻게 바꿀지 연습을 하며 상태가 많이 호전되었다. 약처방이 아닌 대화만으로 다시 사람이 건강한 사고를 할 수 있게 변했고,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가슴 통증과 그 외에 느끼던 불편함도 점차 사라지게 되었다.
오늘날의 사회는 자기 자신을 돌보는 것의 중요성을 많이 강조한다. 돌본다는 것은 관심과 애정을 필요로 하는 동시에 책임을 요구하는 일이다. 자신을 돌본다는 것은 본인이 좋아하는 음식을 먹고 취미생활을 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어떤 상태인지 솔직하게 들여다보며 객관적인 판단을 하는 것에서 시작된다. 전 직장에서 힘들어했던 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었으나, 다른 동료들은 상담이나 정신과를 이용하는 것에 대한 막연한 장벽, 그리고 이것저것 핑계를 대며 자신의 문제를 회피하려 했다. 내가 그들의 문제에 대해 왈가왈부할 처지는 아니지만, 자기 자신이 문제를 회피하는 것이 스스로를 돌보는 것을 포기한 것처럼 비쳤다.
그렇다면 한국은 정신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왜곡된 시선 없이 자유롭게 나눌 수 있는 사회인가? 가까운 친구들에게는 자주 이야기하지만, 다른 곳에는 말하는 순간 편견의 대상이 될까 봐, 혹은 어떠한 방식으로 불이익을 받게 될까 봐 토로하기 어려워진다. 그래서 이곳에서도 익명으로 글을 작성하고 있다.
그간의 경험으로 아직까지는 귀국한 이후 나 자신을 돌보는 것이 어렵지 않았지만, 또다시 힘든 상황에 직면하면, 그때는 또 다른 방식으로 나를 돌보는 방법을 찾아내지 않을까. 스스로를 돌본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지만, 본인과 맞는 방식을 찾아내는 또 하나의 배움의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