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문화 수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Albert 이홍규 Apr 24. 2020

[원서 서평] 『최후의 결투』, 에릭 재거

중세 기사도의 종언과도 같았던 두 기사의 결투에 대한 생생한 기록

[2021.07.21 수정 관련]

글을 올려놓고 잊고 있었는데, 리들리 스콧 감독의 〈라스트 듀얼〉 예고편이 공개되면서 다시 읽어보고나니, 아직 공개되지는 않았지만 영화의 스포일러로 느껴질만한 부분들이 존재한다고 판단했습니다. 때문에 글의 내용을 작품의 배경에 대한 설명과 스포일러 항목으로 분리하였습니다.


프랑스 파리. 1386년 12월 29일. 일 년의 마지막 축제인 성 토마스 베켓의 축일. 떠들썩해야 마땅한 날이지만 천 명이 넘는 파리의 시민들은 추위도 잊은 채 생마르탱 성당 앞에 설치된 결투장에 모여 숨을 죽인 채로 두 명의 기사가 결투를 하는 모습을 보고 있었다.


청년 시절부터 친구였던 둘은 어느덧 마흔 중반에 들어 젊은 시절의 패기는 사라졌을지 몰라도, 완숙한 노련함으로 상대의 목숨을 끊기 위하여 치열하게 공방을 주고받았다. 당시 그들은 모르고 있었지만 이 결투는 프랑스에서 마지막으로 윤허된 합법적 결투 재판(judicial duel, trial by combat)이었다. 이 결투 이후에도 국가의 승인 없이 진행된 개인 간의 결투는 18-19세기까지 계속되었으나, 국가의 승인을 받고 공적인 명분과 함께한 결투는 이 두 악우 간의 싸움이 마지막이었다.


에릭 재거의 『최후의 결투』에 대해 알게 된 것은 리들리 스콧 감독의 신작 〈라스트 듀얼〉 소식을 통해서다. 스콧 감독의 작품 대부분을 좋아하지만 나폴레옹 전쟁 시대의 <결투자들>, 십자군 전쟁 배경의 〈킹덤 오브 헤븐〉 감독판은 영화사에 남을 작이라 생각하는데, 차기작에서 다시 중세 배경으로 맷 데이먼, 벤 에플렉, 아담 드라이버라는 걸출한 배우들을 캐스팅했다는 기사를 접했다.


스콧 감독과 궁합이 좋은 다리우스 월스키 촬영 감독의 영상미도 기대되지만, 97년 〈굿 윌 헌팅〉 이후로 23년 만에 맷 데이먼과 벤 에플렉이 각본을 집필한다는 뉴스가 눈에 띄었다. 이제는 베테랑이 된 두 배우를 다시 모이게 한 원작이 궁금해졌다.


14세기 중반 노르망디의 유서 깊은 호족 가문 출신 장 드 카루즈(Jean de Carrouges, 맷 데이먼)와 신흥 호족 자크 르 그리(Jacques Le Gris, 아담 드라이버)는 정식 기사가 되기 전인 지주(Squire) 시절부터 막역한 친구로, 카루즈는 그리에게 자신의 장남의 대부가 되어주기를 요청하였을 정도로 관계가 끈끈했다. 하지만 그들의 주군 피에르 달랑송 백작(벤 에플렉)이 카루즈가 원하던 영지를 그리에게 하사함으로 관계는 악화되기 시작된다.


카루즈의 아내와 아들(즉, 그리의 대자)이 어린 나이에 요절하고는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처럼 보였던 두 친구는 카루즈의 재혼 후 한 연회장에서 극적으로 화해한다. 카루즈의 젊고 아름다운 새 아내 마그리트(조디 코머)는 프랑스 국왕에게 두 번이나 반기를 들고도 살아남은 로베르 드 티부빌의 무남독녀로 가문은 부유하였지만 명성은 부친의 반역 때문에 흠이 있는 상태였다.


카루즈는 그리와 화해하였지만 달랑송의 마음을 돌리기에는 부족했고, 부를 가져다주었지만 가문의 명성을 깎은 결혼 때문에 프랑스 내에서는 본인이 신분 상승을 꿈꿀 수 있는 계기가 없다는 사실을 깨닫는다. 그는 자녀가 없이 결혼 4년 차 되던 해, 국외에서 기회를 찾고자 프랑스-스코틀랜드 연합의 잉글랜드 정복 전쟁에 참가한다. 용맹하게 싸웠지만 전쟁은 프랑스의 대패로 끝나고 카루즈는 빈털털이가 되어 고향으로 돌아온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카루즈는 마그리트와 함께 귀향 인사를 위해 모친의 저택에 들리고, 부인 마그리트를 남겨둔 채 공무를 처리하기 위하여 파리로 여행을 떠난다. 파리에서 돌아온 그는 안색이 달라져 있는 부인의 얼굴을 보고 연유를 캐묻는다.


마그리트는 남편이 출장을 떠난 와중 시어머니가 자리를 비운 어느 하루, 그리와 그의 수하가 저택에 들이닥쳐 그녀의 의지에 상관없이 성폭행을 했다고 눈물을 흘리며 고백한다. 분노한 카루즈는 자신과 아내의 명예를 지키기 위하여 국왕에게까지 나서 그리에게 결투 재판을 신청하고, 그리는 끝까지 본인의 결백을 주장한다.


작가는 14세기 말에 와서는 결투 재판이 거의 사라졌다 명시한다. 결투 재판은 전지전능한 신이라면 죄인이 결투를 승리하게 두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명제로 진행이 되는데, 이 제도는 당연히 강자가 약자의 재물 및 영토를 착취하는데 악용이 되었기에 봉건제도의 뿌리를 위협하기 시작했다. 심지어 기사와 평민 간의 불공평한 결투가 아니더라도, 두 명의 기사가 싸워 한 명만 남는다면 이는 군사적 자원의 손실이었다.


결국 결투 재판이 성사되려면 까다로운 조건을 만족해야 했으며, 원고와 피고 모두가 결투 재판에 참가할 만큼 본인의 결백을 주장하려는 의지가 필요했다. 또한 작가는 두 사람의 오래된 관계, 카루즈가 과거에 공공연하게 그리를 욕하고 그의 성공과 영지에 질투를 하고 있었다는 배경 또한 주목한다. 때문에 심증적으로는 카루즈가 그리의 영지를 빼앗기 위하여 아내와 공모하여 사건을 꾸며낸 것이 아닐지 의심이 되기도 한다.


[아래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사건에 대한 엄밀한 조사가 진행된 후, 원고인 카루즈와 피고인 그리가 서로의 입장에 대해 물러서지 않자, 국왕 샤를 6세는 결투 재판을 윤허한다. 상술했다시피 이 시대에 이르러서는 거의 사장되다시피 했던 문화였기 때문에, 이 결투는 왕실을 포함하여 국가적인 관심을 받게 된다. 심지어 젊은 샤를 6세는 영국 원정과 결투 예정일이 겹치자 자신이 직접 관람할 수 있도록 결투 재판일을 연기할 것을 지시하기도 한다.


또한 이 사건은 카루즈의 아내 마그리트가 성폭행을 당했다 주장한 시기 즈음, 카루즈와의 결혼 5년 만에 임신을 함으로 더욱 복잡해졌다. 중세에는 임신은 남녀가 모두 절정을 느껴야지만 가능했다는, 21세기에 보기에는 어이가 없는 사상이 존재했다. 물론 당시에도 세간 모두 이러한 믿음을 공유하지는 않았기에 그녀의 임신 사실은 이 결투에 스캔들스러운 면을 더했다. 다시 말하면, 만약 남편 카루즈가 결투에서 그리에게 패배한다면 마그리트의 임신은 화간처럼 여겨질 수도 있고, 그녀는 억울하게 목숨을 잃고, 명예를 회복할 기회조차 주어지지 않는 상황이었다.


완벽한 물증은 없지만, 그 어떠한 결투보다 체계적인 문서 기록이 존재하는 이 재판과 결투에 대해 작가는 그리의 변호사가 남긴 클라이언트를 의심스러워하는 개인 기록, 마그리트의 고발이 그리 한 명이 아니라 그리의 동료까지 포함하였다는 사실을 들어 (하나가 아닌 둘의 알리바이를 모두 깨기는 더 어렵기 때문에) 정황상 실제로 성폭행이 일어났을 것이라 판단한다.


작가는 클라이막스인 결투 장면에서 자신의 목숨과 명예를 두고 벌어지는 전투에서 아무런 조치도 취하지 못하고 옆에서 관람만을 해야하는 마그리트의 심정을 적극적으로 조명한다. 만약 남편인 카루즈가 결투에서 패배하면, 마그리트는 남편의 죽음을 목도한 직후, 바로 위증죄로 사형대로 끌려가야 하는 상황이었다.


둘 사이의 결투는 마상 전투(jousting)로 시작되어 승부가 나지 않자 두 기사가 땅으로 내려와 무기를 들고 서로에게 달려드는 백병전으로 이어진다. 작가는 박빙의 결투를 묘사하면서도 그 결투를 바라보는 마그리트의 심정을 헤아려보는데, 중세 역사에 대한 건조한 미시 기록으로 끝날 수 있었던 본 작품에 문학적인 일면을 부여한 부분이 바로 이 지점이 아닐까.


둘의 치열한 결투는 결국 카루즈의 승리로 끝나게 된다. 만약 작가 재거의 연구 결과 및 일반 시민의 시점을 따르자면 다행히 정의가 승리하였고, 신은 올바른 선택을 내린 형국이다. 하지만, 재거가 강조하고자 한 부분은 결투의 결과가 아니다. 승패가 정해지기 직전까지의 마그리트가 느꼈을 감정이다. 작가는 엄연한 진실이 존재하는데, 그 진실을 주장하기 위해서 종교라는 미명으로 주사위를 던져야 하는, 심지어 그 결과에 어떠한 영향도 미치지 못하는 마그리트의 절망감에 공감해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The Last Duel』은 인물들이 살던 지방과 걸었던 길을 실제로 걷고, 환경과 계절까지 묘사하며 책을 집필한 작가의 고증에 대한 집착 때문에 탁월한 현장감을 선사한다. 또한 다루고 있는 사건이 가진 다면성과 위반되는 증언 사이에 존재하는 진실을 밝혀가는 구성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라쇼몽』 연상된다. 다만 미시 역사와 거시 역사의 관계 및 현대에 와서 가지는 시사성에 대한 통찰력이 흥미로운 서사에 비해 부족하다는 사실이 옥에 티 정도로 아쉬울 뿐이다.


(끝)


『The Last Duel』(2004), Eric Jager

https://www.goodreads.com/book/show/438538.The_Last_Duel


매거진의 이전글 할리우드를 대표하는 촬영감독 소개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