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안개와 명암으로 다시 쓴 셰익스피어

거미집의 성 (1957)

by Albert 이홍규

https://movie.daum.net/moviedb/main?movieId=39733


첫 번째 마녀:
우리 셋은 다시 언제 만날 수 있을까요?
천둥이 칠 때, 번개가 번쩍일 때, 아니면 비가 올 때요?

출처: <맥베스>, 1막 1장


다분히 현학적이고 쓸데없는 질문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셰익스피어 영화"가 무엇인지에 대한 고민을 자주 하게 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기반으로 한 영화들은 원전이 되는 작품의 제목을 그대로 가져오고, 대사의 형태를 그대로 사용하지만, 대부분 4시간에 육박하는 원작의 길이를 감안하여, 대사를 편집하는 경우가 많다. 그렇기 때문에 케네스 브래너의 <햄릿 (1996)>은 처음으로 셰익스피어의 원작 <햄릿>을 원문 그대로 무편집 영상화해서, 4시간이 넘는 상영 시간을 기록했다는 사실만으로도 유명했다.


하지만 셰익스피어에서 단순히 모티브만을 차용했다면 그것을 셰익스피어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예를 들면, 디즈니의 <라이온 킹 (1994)> 제작자들은 이 걸작 애니메이션의 서사 구조가 <햄릿>에서 영감을 받았다는 사실을 밝히는데 주저함이 없다 (출처). 아니면 현대적인 로맨틱 코미디 문법으로 <말괄량이 길들이기>를 재해석한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 (1999)>는 어떨까? 히스 레저와 조셉 고든 레빗을 할리우드의 청춘스타로 키워준 이 영화는 셰익스피어의 대사를 하나도 사용하지 않으며, 현대적인 감성으로 보면 성차별에 가까운 원작의 내용을 편집하고 순화시켰지만, 원작을 존중하는 서사 구조를 지키는 데 성공했다. 이를 셰익스피어 영화라고 부를 수 있을까?


굳이 셰익스피어 영화의 정의에 대한 고찰을 하는 이유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의 존재 가치에서 서사와 대사 중 어느 쪽에 더 큰 비중을 두고 있는지에 대한 고민과도 연결되어 있다. 만약 이러한 논의가 탁상공론처럼 느껴진다면 저작권리와 해당 법적인 시선에서 바라본다면 조금 더 이해가 쉬울 수 있다.


만약 셰익스피어가 20세기의 인물이고, <라이온 킹>과 <내가 널 사랑할 수 없는 10가지 이유>가 개봉하였을 때 살아있었다면 이 작품들을 만들기 전 셰익스피어와 저작권 관련 협의를 해야 했을까? 대사를 하나도 차용하지 않았으며, 내용도 크게 편집이 되어있는데도? 개별 상황마다 다르겠지만, 한국의 저작권법은 "보도, 비평, 교육, 연구"를 위한 인용 외에는 줄거리 또한 저작권의 범주에 포함하고 있다 (출처). 물론, 이 글에서 셰익스피어를 저작권법적인 면에서 다루지는 않겠지만, 작품의 정체성을 성립하는 요소에 대한 고민은 생각보다 형이상학에 국한된 주제가 아니라는 주장을 하고 싶다.


한편 내적으로는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읽으면서 독자가 느끼는 감정을 검토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 나는 그 작품의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일까, 아니면 소리 내어 읽어보면 시처럼 아름다운 운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삶에 대한 깊은 통찰을 내포한 그 대사를 좋아하는 것일까?


대문호가 타계한 지 4세기가 넘었지만, 이 질문은 지금도 셰익스피어 애호가들에게는 열띤 토론을 불러일으키는 주제이다. 미국의 워싱턴 D.C. 에 위치한 세계 최대 규모의 셰익스피어 장서관인 폴저 셰익스피어 도서관(Folder Shakespeare Library)에서는 셰익스피어 언리미티드(Shakespeare Unlimited)라는 제목의 팟캐스트를 진행하고 있는데, "셰익스피어 각색하기"라는 제목의 에피소드를 통해 이 주제를 다루기도 하였다 (출처). 이 글은 해당 팟캐스트에서 논의된 내용에서 영감을 받았음을 미리 밝힌다.


영미권에서 활동하고 있는 세 명의 창작가들이 "무엇이 셰익스피어인가?"라는 주제를 가지고 논의하는 모습을 보면서 문득 아이러니하게도 이 주제에 대해서 이야기하기에 가장 좋은 이들은 어쩌면 비영어권의 창작가일 수도 있다는 감상이 들었다. 모국어인 원문으로 셰익스피어를 배워온 영미권의 작가들은 그의 작품의 형태(대사)와 내용(서사)을 분리해서 판단하는 기획이 어려울 수도 있지만, 번역이나 각색으로 셰익스피어를 접해, 한 발짝 떨어져서 그의 작품을 관망할 수 있는 이들은 독특하고 객관적인 시선을 유지할 수 있지 않을까.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이 전국시대 일본을 배경으로 <맥베스>를 각색한 <거미집의 성(1957)>을 몇 년 만에 다시 관람하게 된 것은 주제가 아니라, 형식적인 면에서 접근하였을 때 "무엇이 셰익스피어인가?"라는 질문을 대답하기 위함이었다.


아류의 예술

미후네 토시로 (와시즈 타케토키 / 맥베스 역), <거미집의 성 (1957)>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짧은 분량을 가지고 있는 <맥베스>는 그의 여느 작품과 다름없이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 아일랜드의 역사를 기록한 <홀린쉐드 연대기 (Holinshed's Chronicles)>에서 서사의 대부분을 차용하였다. 뿐만 아니라 <리어왕>, <심벨린>, 그리고 셰익스피어의 역사극 대부분은 작품의 뿌리를 홀린쉐드의 연대기에서 찾을 수 있다. 한편 고대 로마를 배경으로 한 <코리올라누스>, <줄리우스 시저>, <안토니와 클레오파트라>와 같은 작품들은 <플루타르코스 영웅전>에서 뿌리를 찾을 수 있다.


지금은 셰익스피어의 작품들이 원전이 된 작품들보다 더 유명해져서 그의 작품이 원전처럼 여기지고 있지만, 우리가 대문호의 작품을 재창조하는 것처럼, 대문호 또한 과거의 고전을 각색하는 것이 주특기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현대적으로 해석해 보자면, 딱딱하게 느껴질 수도 있는 역사서의 내용을 대중이 알기 쉽도록 무대화시키는 기획이었으며, 당시 그의 공연을 보러 가는 행위는 현대의 대중이 리들리 스콧 감독의 <글래디에이터>나, 피터 잭슨 감독의 <반지의 제왕>을 보기 위하여 영화관으로 향하며 느끼는 기분과 비슷하지 않았을까 짐작해볼 수 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대중성과 예술성은 상호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다. 우리는 역사의 이야기, 또는 위대한 환상소설, SF소설의 영상화에 대하여 대중적인 노선을 선택했다는 이유로 그 작품성을 평가절하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몇천 년 전의 이야기, 존재하지 않는 상상의 이야기 속의 인물들에서 인류 보편적인 메시지를 담아내, 해당 작품을 통해 지금의 세상을 이해하는 시야를 확보할 수 있다.


"셰익스피어 각색하기" 팟캐스트에 참가한 워싱턴 포스트 출신의 칼럼니스트 알렉산드라 페트리는 온라인 팬픽션 세상을 무대로 다시 만든 <햄릿>인 <Tell My Story - Hamlet>을 집필하면서 셰익스피어의 작품과 현대의 팬픽션 사이의 유사성에 집중했다. 팬픽션이라는 키워드는 아류작이라는 감상을 내포하고 있으며, 전적으로 이에 집중하여 예술적 가치가 떨어진다고 판단하는 이들도 있지만, 사실 셰익스피어 또한 서사를 고전에서 빌려 왔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서사의 독창성과 예술성 또한 상호 배타적인 가치가 아니라고 짐작할 수 있다. 페트리가 언급한 예시는 조지프 콘래드의 소설인 <암흑의 핵심>의 배경을 베트남 전쟁으로 옮겨 각색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아포칼립스 나우>였다.


같은 팟캐스트에 참가한 각본가 크레이크 라이트는 한편 누벨바그의 거장 장 뤽 고다르가 각색한 <리어왕>에 대해 언급한다. 해당 작품에서 돈 리에로(Don Learo, 리어왕)는 노망과 추태를 부리면서, 딸인 코델리아에게 "나를 사랑하니?"라고 묻지만, 코델리아는 원작처럼 "나는 인내의 화신이 되어, 아무 말도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대답한다.


고다르는 실제로 원작 <리어왕>을 읽지는 않았지만, 작품 내에 "사랑해 달라"는 애정의 요구에 대해 대답하지 않는 소녀가 등장한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이 작품을 영상화했다고 말한다. 라이트는 고다르가 묘사하는 두 인물의 관계를 "문화(리어왕)"와 "예술가(코델리아)"의 소통으로 바라보면서, 문화가 예술가에게 "내 허영을 만족시켜달라"라고 요구하고, 예술가는 이 질문에 대해 능동적인 침묵을 선택했다고 해석한다. 고다르가 한 평생 대중문화와 예술, 영화에 대해 어떠한 태도를 견지해왔는지 생각해보면 적절한 해석으로 보인다.


어쩌면 이러한 각색 또한 고다르가 대사의 아름다움이나 원작에 매몰되지 않아서 가능하지 않았을까? 물론, 셰익스피어의 작품은 해석하기 나름이라지만, 대문호가 <리어왕>을 집필했을 때, 리어왕과 코델리아의 관계에 대중문화와 예술가의 소통을 의도적으로 함유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이는 고다르만의 해석이며, 온전히 고다르의 메시지인 것이다. 이렇듯 팬픽션이 원작을 대범하게 재해석할 때, 서사의 독창성과는 상관없이 별도의 존재 가치가 성립된다.


고다르의 작품은 <리어왕>의 영상화 중에는 가장 실험적이라고 분류할 수 있으며, 호불호가 상당히 갈리는 편이다. 그에 비해 비평적이나 대중적으로 가장 유명한 작품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란 (1985)>이라고 할 수 있다. 일본의 전국시대로 무대를 옮긴 이 작품에서 구로사와 감독은 셰익스피어의 원작에서 권력욕에 눈이 멀어 늙은 가주를 배신하는 가족의 모습과, 그로 인해 미쳐가는 노인을 그려내면서 자신의 우여곡절 넘치는 인생에 비교하였다. 셰익스피어의 작품 중 가장 스케일이 큰 작품을 가장 개인적인 이야기를 풀어내기 위해 사용한 그의 대담한 기획은 원작의 대사를 단 하나도 사용하지 않았음에도, 많은 평론가들에게 <란>이 <리어왕> 영상화 중 최고라고 꼽는 이유가 된다.


구로사와가 <란>을 제작하기 약 30여 년 전 감독한 <거미집의 성 (1957)> 또한 <맥베스> 영상화 중 가장 높은 평을 받고 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셰익스피어의 4대 비극 중 두 작품을 성공적으로 현지화하여 각색해낸 구로사와의 역량에 대해 감탄을 할 수밖에 없다.


"버넘 숲의 나무가 던시네인 앞까지 움직이지 않는다면"

야마다 이스즈 (와시즈 아사지 / 레이디 맥베스 역), <거미집의 성 (1957)>


세 번째 마녀:
사자의 기개로 자랑스러워해요, 그리고 무시하세요-
다른 이들이 애태우고, 조바심 내며, 음모를 꾸미더라도.
맥베스는 절대로 패배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큰 버넘 숲의 나무가 던시네인 앞까지 움직이지
않는다면 말이지요.

출처: <맥베스>, 4막 1장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은 원래 1940년대에 이미 <맥베스>를 일본 전국시대로 무대로 옮긴 작품을 영상화할 계획을 가지고 있었지만 1948년, 오슨 웰스의 <맥베스>가 개봉하면서 계획을 미뤄야 했다. 고다르가 그랬듯이, 구로사와는 마녀의 숫자와 같은 디테일한 형식이나 원전의 대사에서 자유로워지면서 <맥베스>의 본질에 대한 고민을 치밀하게 할 수 있었다.


만약 고다르가 <리어왕>에서 주목한 부분이 코델리아의 침묵이었다면, 구로사와가 <맥베스>에서 매료된 부분은 버넘 숲의 이동이 아니었을까 생각해본다. 나뭇가지를 든 병사들이 움직여, 마치 숲이 이동하는 것처럼 보인다는 이 장면은 맥베스에게는 마치 자연의 섭리마저 자신을 배반한 천재지변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유독 영상화가 많이 된 <맥베스>지만, 이 장면은 각 감독마다 다르게 연출했는데, 1948년 오슨 웰스의 경우는 나뭇가지를 든 병사들이 이미 성 아래까지 진격하여, 맥베스가 가까운 성벽 위에서 내려다보는 형태로 보여주었고, 1971년 로만 폴란스키는 멀리서 언덕을 올라와서 병사인지 나뭇가지인지 구분이 갈 수 없도록 연출하였다. 물론 웰스든 폴란스키든, 치열하게 고민하고 연출해낸 장면이었겠지만, 솔직한 감상으로는 이 두 작품에서 맥베스가 이 광경을 바라보며 "숲이 움직이고 있다"라고 진심으로 느낄 수 있는 연출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 그렇기 때문에 2015년 저스틴 커젤 감독은 아예 이 장면에서 숲을 불태우면서 숲이 아니라 그 불길이 성으로 움직였다는 독창적인 해석을 선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구로사와는 그 장면에서 실제로 천재지변을 연출하고 싶어 했다. 구로사와가 셰익스피어의 서사에서 집중한 부분이 자연 앞에서 무력한 기분을 느끼는 인간이라는 부분은 영화의 초반에 안개가 자욱한 숲과 벌판에서 길을 잃고 헤매는 주인공 와시즈(미후네 토시로)와 미키 장군의 모습을 통해 가늠할 수 있다.


외국의 침략에 맞서 풍전등화와 같은 상황에 놓인 상황을 이겨내고 대승을 거둘 정도로 뛰어난 무용을 가진 장군들이지만, 평생을 살아온 고향인 거미집의 숲에 안개가 자욱하게 걸리자 속수무책으로 사방팔방 헤매다 길을 잃는다.


이 숲에서 조우한 귀신과도 같은 노인에게 본인이 거미집의 성의 주인이 될 것이라는 예언을 듣고, 와시즈 장군의 충심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이후 원작 <맥베스>와 같은 형태로 이야기가 전개가 되어 와시즈는 부인의 도움으로 군주를 암살하고 거미집의 성의 군주로 오르게 된다. 거미집의 숲에서 만들어진 왕이었기 때문에, 그는 자신의 부하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다시 한번 거미집의 숲으로 돌아가 예언을 요구한다. 거미집의 숲의 노인은 그 숲이 움직이기 전까지는 와시즈는 안전하다고 예언한다. 와시즈는 자연의 섭리가 자신의 편이라는 사실에 안도한다.


하지만 원작을 읽은 사람은 미리 알 수 있지만, 반란군은 위장을 위하여 병사 하나하나에게 나무 가지를 들게 해서 거미집의 성 앞까지 이동한다. 안개가 자욱한 공간에서 숲이 움직이는 장면은 장엄한 스케일로 관객을 압도한다. 눈 앞을 가리는 안개, 방향감각을 어지럽히는 미로와도 같은 숲 안에 갇혀, 자연의 섭리 앞에 무력한 관객의 기분을 통해, 구로사와는 <맥베스>의 원전을 지배하고 있는 주제인 숙명을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의 한계를 그려낸다.


무대 공포증이 있는 가여운 배우와도 같은 인생

치아키 미노루 (미키 요시아키 / 뱅쿠오 역), <거미집의 성 (1957)>


맥베스:
내일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내일도,
이 한심한 속도로 기어 오는 매일매일은
역사가 끝나는 마지막 시간까지 이어지고,
지나간 시간들은 바보들에게 길을 밝혀
그들을 죽음으로 보내니. 꺼져라, 꺼져라 짧은 촛불아!
삶은 고작 걸어 다니는 그림자, 가여운 배우 같아서
무대에 등장하고는 내내 조바심 내고 실수하다가
어느 순간 퇴장해 버리는구나. 삶이란 마치
광대의 이야기와도 같아 소음과 분노로 가득 차
아무런 의미도 없네.

출처: <맥베스>, 5막 5장


셰익스피어의 대사 중 일반인들에게 가장 유명한 것은 <햄릿>의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 이겠지만, 문학평론적인 면에서 가장 유명한 대사는 바로 <맥베스>의 5막 5장에 나오는 "내일도, 그리고 내일도, 그리고 내일도"가 아닐까 생각한다. 이 10줄의 대사가 영미권에서 재사용된 경우가 너무 많아서 아예 위키피디아에는 전용 문서가 따로 만들어져 있을 정도이다 (출처). 이 중 한국에 출판되어 소개된 작품들을 아래에 소개해 본다.


커트 보니것 단편소설집 <몽키 하우스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에 포함된 단편소설 <내일, 내일, 그리고 또 내일 (Tomorrow and Tomorrow and Tomorrow)> (링크)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꺼져라, 꺼져라 (Out, Out-)> (링크)

윌리엄 포크너 <음향과 분노 (The Sound and the Fury)> (링크)

데이비드 포스터 월리스 단편소설집 <흉측한 남자들과의 짧은 인터뷰 (Brief Interviews with Hideous Men)>에 포함된 단편소설 <아무런 의미도 없네 (Signifying Nothing)>

올더스 헉슬리 단편소설집 <짧은 촛불 (Brief Candles)> (링크)


이 대사가 왜 그렇게 유명한지 설명하기는 어렵지만, 아마 삶에 대한 허무주의적인 감성을 시인성 풍부한 은유로 표현했기에 많은 이들에게 와 닿는 것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한편으로는, 희곡의 대사 내에서 희곡 배우를 은유한다는 점이 마치 두 개의 거울이 서로를 되비추는 효과를 내기도 하는데, 맥베스라는 주인공이 실제로 무대에 등장한 이후, 여기까지 단 한 번도 편안한 상황이 없었다는 사실을 상기해보면 이야기 내 축적된 불안감이 터져나가는 지점으로 볼 수도 있다.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 또한 이 대사를 좋아했었던 것일까, 그는 <거미집의 성>을 만들면서 원작인 <맥베스>가 기본적으로는 연극이라는 사실에 집중했다. 구로사와는 영감을 위해 셰익스피어 작품에 비견할 수 있는 일본의 전통 연극 "노가쿠", 그중에서도 "노"를 적극적으로 오마주 하였다.


"노(能)"는 14세기 가마쿠라 막부 시절부터 공연된 역사가 깊은 일본 전통 연극으로, "노멘"이라고 불리는 가면을 사용해 남성과 여성 역할 모두를 남성 배우들이 연기한다. 셰익스피어 시절에도 여성의 역할을 남자 배우가 맡았다는 사실을 생각해보면 재미있는 교차점이다. 한편, "노"를 상징하는 가면은 언뜻 보면 몹시 기괴하지만, 한편으로는 빛을 어떻게 비추어 음영이 드리우는지 따라 그 얼굴이 표현하고자 하는 감정이 다르게 보이는 특징이 있다. 이는 한국의 전통 가면인 하회탈에서도 보이는 특징으로, 해당 가면을 어떠한 각도에서 보는지, 어떠한 조명 아래서 보는지에 따라, 아니, 심지어 어떠한 극 상황에서 보는지에 따라 다른 감정을 표현할 수 있다.


나니와 치에코 (모노노케 요파 / 마녀 역), <거미집의 성 (1957)>


셰익스피어가 영미권의 전통 연극이라면, 일본의 전통 연극은 "노"라는 문화적 대칭을 찾은 구로사와는 <거미집의 숲>을 연출하면서 배우들에게 의도적으로 노멘을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표정 변화가 없는 연기를 요구하였고, 한편 일본 전통 연극 경험이 있는 야마다 이스즈를 맥베스 부인의 역할인 와시즈 부인에 캐스팅하였다. 배우들의 표정은 자칫하면 지루하거나 평면적이라고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정적이지만, 구로사와 감독은 카메라 워크, 조명 변화 등을 사용해 관객들이 직접 인물들의 감정을 짐작할 수 있게 만들어준다.


셰익스피어의 연극의 구조적 특징에서 자유로워진 순간, 구로사와 감독은 <맥베스>의 정수에 대해 고민을 할 수 있었고, 그 결과는 희곡이라는 같은 예술 형태를 바라보는 다른 두 문화의 해석 방안으로 재탄생하였다. 영어로 연기한다면 신묘한 운율과 발음적 쾌감을 내포한 셰익스피어 대사의 맛을 번역하기보다는, 안개와 명암으로 다시 써낸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결정은, 결국 원작의 구조적 형태를 거의 유지하지 않았음에도 움직이는 수묵화를 떠올리게 만들 정도로 아름다운 <거미집의 성>이 훌륭한 셰익스피어 영상화라는 평을 받게 만들었다. <거미집의 성>을 관람한 관객은, 이 작품이 대사를 그대로 살린 오슨 웰스, 로만 폴란스키, 저스틴 커젤의 각색만큼 훌륭한 셰익스피어 영화라는 해석에 도달하게 된다. 그리고 그때 만약 "왜 이 작품이 셰익스피어의 작품이며, 도대체 무엇이 셰익스피어인가?"라는 질문이 떠올랐다면, 영화의 역사와 함께 변화해 온 셰익스피어의 작품을 즐길 준비가 끝난 것이다.


셰익스피어 영상화 한줄평:

안개가 자욱한 숲 속에서 스멀스멀, 무언가 악한 것이 이 길로 다가오네




맺는말: 번역에 관하여

셰익스피어 작품의 일부분을 직접 한글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셰익스피어 작품은 약강 5보격(iambic pentameter)이라 불리는 운율을 지닌 운문(verse)인데, 운율까지 살리지는 못하지만, 최대한 행바꿈을 지킨 형태로 번역합니다.

MIT에서 호스팅하고 있는 셰익스피어 원서를 번역 대상으로 사용합니다.


<맥베스> 원서: http://shakespeare.mit.edu/macbeth/full.html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