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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lbert 이홍규 Apr 27. 2021

대서사극, 경계에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야만의 경계선

클래식 서부극과 그 후에 온 서부극 변주 간 가장 큰 차이가 발생한 지점은 야만성, 또는 경계의 위치에 관한 해석이었다.


할리우드 황금기의 서부극에서 야만성은 '문명'을 상징하는 백인의 외부에 존재하여, 그것은 영화사에 중요 서부극으로 남아있는 작품들에 지속적으로 형태를 달리하며 표현되어 왔다. 리처드 그리피스 감독의 〈국가의 탄생〉(1915)에서는 인종적 프로파간다를 통해 기이하게 변형된 흑인들로, 존 포드 감독의 〈역마차〉(1939)에서는 미국 원주민들, 특히 자연재해처럼 묘사되는 아파치 부족으로, 같은 감독의 〈수색자〉(1956)에서는 코만치 부족으로, 개척정신은 이런 외부의 야만성을 정복하는 문명인의 의무였다.


노파심에 말하자면, 이는 그리피스 감독과 존 포드 감독이 같은 수준의 인종 차별적 시선을 견지하고 있다는 의미는 아니며, 또한 영화적 완성도에 대한 비평과도 관계없이, 해당 작품들에서 야만성이 어디에 위치해 있는지만을 해석한 의견일 뿐이다. 의도가 어쨌든, 한때 클래식 할리우드를 사로잡은 이 망령은 영화계에는 어떠한 원죄처럼 여겨지게 된다. 때문에 50년대 이후부터, 문명과 야만을 구분하던 경계를 인간 외부에 배치했던 클래식 서부극에서 한 발짝 나아간 고찰을 다루고 싶었던 영화인들은 경계선을 내부로 끌어당겨온다. 이를 편의상 '수정주의' 서부극이라고 부른다.


수정주의 서부극의 야만성은 집단적 백인의 내부에 존재하여, 이들은 법과 도덕성에 대해 씨름하거나, 개척이라는 미명 하에 실행된 저주받은 과거에 대한 회한을 담는다. 조지 로이 힐 감독의 〈내일을 향해 쏴라〉(1969)에서는 추적자들을 피해 점점 더 오지로 달아나 마침내 볼리비아로 향하는 두 무법자와 그 사이에 얽힌 여인이, 클린트 이스트우드 감독의 〈용서받지 못한 자〉(1992)에서는 자신을 쫓아온 잔인한 과거와 마주해야 하는 은퇴한 무법자가 백인 내부에 존재하는 야만성에 대해 다루고 있다.


물론, 수정주의 서부극을 만든 창작자들이 야만성을 일부러 '백인'에 한정해 인간 내면에 배치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수정주의 서부극에서는 평범한 인간도 내재된 야만성을 숨겨두고, 자신의 내부에 경계를 긋고 살아간다. 문명인들을 한 꺼풀 벗길 때 드러나는 야만성, 문명이라고 신봉되는 관습이 얼마나 취약한지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기에 이러한 작품들은 굳이 관객의 인종에 관계없이 보편적 공감을 얻을 수 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이 창작자들은 할리우드의 '원죄'에 대해 이해하고 있으며, '원죄'에는 백인이 다른 인종을 대하는 차별적인 목적성이 분명히 존재했다고 인정할 수밖에 없다. 때문에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자신의 내부에 자리 잡은 야만성을 붙들고 고뇌하는 인물들은 대부분 창작자들을 닮은 백인들이다.


80년대에 와서, 할리우드에서 서부극이라는 장르는 어느덧 여말선초를 다룬 사극과 같이 고루하게 느껴지게 된다. 때문에 2000년대가 넘어서 이를 현대적으로 해석하려는 시도가 계속되었다. 수정주의 서부극은 〈맥케이브와 밀러 부인〉(1971)이나, 〈비겁한 로버트 포드의 제시 제임스 암살〉(2007)과 같은 반-서부극으로 발전하기도 했지만, 한편 서부극의 무대 자체를 현대로 옮겨오는 시도 또한 "네오 웨스턴"이라는 장르를 통해 새로운 옷을 입게 된다.


네오 웨스턴은 현대에 제작된 서부극이라는 의미라기보다는, 서부극의 장르적 트로프, 또는 분위기를 2차 대전 이후의 경계지역으로 끌어와 재해석한 작품들을 가리킨다. 물론, 서부극의 트로프가 1950년대 이후 할리우드나 유럽 영화계에서 누아르로 재해석되면서 21세기 이후에 와서 돌아보면 그 작품이 네오 웨스턴일 수도 있겠다는 감상이 드는 작품들은 존재한다. 오슨 웰스의 〈악의 손길〉(1958)이나, 장-피에르 멜빌 감독의 네오 누아르 작품들은 서부극의 특징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다.


누아르라는 장르에 의상의 특징이 존재한다는 인상 자체부터 서부극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카우보이 모자는 페도라로 대체되었고, 카우보이 셔츠와 가죽 재킷, 청바지를 입고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보안관은 트렌치코트를 입고 시가를 끔뻑대는 사설탐정으로 대체되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필립 말로는 하워드 혹스 감독의 〈빅 슬립〉(1946)에서 험프리 보가트, 로버트 올트먼 감독의 〈기나긴 이별〉(1973)에서 엘리엇 굴드와 같은 명배우들이 다양하게 재해석하였지만, 공통적으로 서부극 특유의 반체제적이고 될 대로 돼라(devil-may-care)는 카우보이와 같은 자유로운 태도가 인물의 매력 근원에 꿈틀댄다.


(左)  필립 말로(험프리 보가트), 〈빅 슬립〉(1946), (右) 필립 말로(엘리엇 굴드), 〈기나긴 이별〉(1973) [출처: YouTube]


하지만 2000년대 이후, 현대의 서부, 서부가 의미하던 지리상의 경계를 대체한 시공간을 배경으로 한 작품들이 등장하면서 네오 웨스턴은 장르적으로 유의미한 활력을 띄기 시작한다. 코맥 매카시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를 시작으로, 엘모어 레너드의 단편소설 『Fire in the Hole』(2001), 그 주인공인 레일런 기븐스를 주인공으로 한 단편소설 연작을 원작으로 한 TV 시리즈 〈저스티파이드〉(2010-2015), 코엔 형제의 동명의 영화에서 영감을 받은 노아 홀리의 TV 시리즈 〈파고〉(2014~), 그리고 배우 출신의 작가-감독, 테일러 셰리던의 작품들이 흥행과 비평 양쪽에서 모두 성공을 거두면서 네오 웨스턴이라는 장르는 할리우드라는 거대한 자본주의 기계가 낼 수 있는 가장 작가적인 이야기, "미국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다룰 수 있는 동력으로 거듭난다.


일련의 작품들은 제2차 세계대전과 베트남 전쟁 이후의 미국을 무대로, 세계질서의 주역이 된 미국이 해외가 아니라, 자국의 내부와 경계에 만연한 폭력에 대해 어떻게 대응하는지를 다루고 있다. 그리고, 그 폭력의 경계는 자국의 경계, 그중에서도 환경-지리적으로 과거 서부극을 떠올리게 만드는 미국-멕시코 경계로 옮겨간다.


코맥 매카시, 네오 웨스턴의 문학적 뿌리

코맥 매카시(左), 에단 코엔(中), 조엘 코엔(右) [출처: Eric Odgen for Time]


네오 웨스턴의 르네상스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하나의 작품과 세 명의 이야기를 먼저 시작해야 한다. 바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원작을 쓴 매카시와 해당 작품을 감독한 코엔 형제로, 이들은 문학과 영상이라는 각자의 분야에서 서부극에 활력을 불어넣고 있다.


지극히 개인적인 분석이지만, 미국 문학의 거장 중, 매카시와 토머스 핀천은 장르적 유희를 문학 주류에 끌어오기 위한 치열한 노력을 계속해왔고, 21세기에는 마이클 셰이본, 매들린 밀러와 같은 걸출한 작가들이 유지를 이어가고 있다.


매카시와 핀천 외에도 거장이라 불리는 미국-영문학 작가들은 여럿이 있지만 굳이 본 비평 내에서 이 둘을 꼽는 이유는 이들의 작품들이 서부극의 재해석에 있어, 전자의 경우 일생의 작품군 전체에, 후자의 경우 『역주 (Against the Day)』에서 기존 장르를 넘어서는 가능성을 선보였기 때문이다.


[사족. 핀천의 작품 『Against the Day는 번역도 되지 않았으며, 읽어본 경험으로는 어떻게 번역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는다. 다만 일어로 역광이라는 제목으로 번역이 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Day"가 중의적인 의미를 담고 있다고 다가왔기에 낮/날이라는 의미의 낮 주(晝)와, 달릴 주(走)를 동시에 의미하는 "역주"가 가장 의미 있는 제목이 되지 않을까 싶다. 심지어, 그 작품을 번역해야 할 불운하고 위대한 번역가가 달아야 할 수많은 주석까지도 포함해서 말이다.]


매카시의 문학 작품은 그를 생존하는 가장 위대한 미국 소설가라는 평을 받게 해 준 핏빛 자오선부터, '국경 3부작'까지, 서부극이거나, 서부극의 영향을 진하게 받았는데, 미국을 대표하는 필력과 미국을 대표하는 장르의 결합이라는 작품 외적인 이유 외에도, 그의 문장이 워낙 시각적인 상상력을 자극시킨다는 이유 때문인지 여러 번 영상화가 되었다. 유능한 배우이지만, 한 때 감독이라는 허황된 꿈을 꾸었던 빌리 밥 손튼의 〈모두가 예쁜 말들〉(2000),  비슷하게 배우이자 감독으로 자의식 과잉에 잠식된 제임스 프랑코의 〈신의 아들〉(2013), 영화 역사상 가장 우울한 작품을 거론할 때 빠지지 않는 존 힐코트 감독의 〈더 로드〉(2009)까지, 매카시의 작품은 1990년-2000년대를 지나며 이 글을 쓰는 지금도 우리가 익숙한 영화인들에 의해 여러 번 영상화에 대한 시도가 존재했다.


매카시만큼 평단의 평가와 일반 대중, 할리우드의 창작인들의 평가가 일치하는 문인도 많지 않다. 굳이 따지자면 스티븐 킹이나 엘모어 레너드 정도가 아닐까 싶은데, 이 두 작가 또한 서부극, 또는 서부극에서 영향을 받은 작품을 써왔다는 점을 고려해보면 서부극이 미국의 대중문화에 미친 영향에 대해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러나 아쉽게도, 매카시의 작품은 그의 필력에 어울리는 영화인을 만난 적이 없다. 이 와중, 2000년대 초반, 제작자 스콧 루딘이 2005년에 출판된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의 영상화 권리를 구매해 코엔 형제에게 접근했고, 〈오 형제여 어디에 있는가〉(2000)에서 유쾌하게 변주된 서부 감성을 선보였던 코엔 형제는 작품의 각색과 연출을 모두 맡는다는 조건 하에 이 작품의 연출을 결정하게 된다.


코엔류 서부극과 경계성

웬델(가렛 딜라헌트), 에드 톰 벨(토미 리 존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출처: YouTube]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만약 통속적인 서사 구조에 크게 얽매이지 않는 코엔 형제가 아니었으면 제대로 된 영상화가 가능했을지 궁금했을 정도로 간단하면서도 뒤틀린 이야기를 보여준다. 영화는 1980년 텍사스와 멕시코 사이의 국경을 무대로, 관계자 모두가 죽어버린 마약 거래 현장에서 2백만 달러가 든 가방을 발견한 베트남전 참전 군인, 조시 브롤린이 연기한 르웰린 모스와, 그 가방을 쫓는 하비에르 바르뎀이 연기한 안톤 쉬거의 쫓고 쫓기는 추적을 다룬다.


물론, 이 영화가 작품 외적으로 서부극이라는 분류에 포함될 필요는 없으며, 적어도 코엔 형제는 이 영화가 서부극이라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작품은 후술 할 테일러 셰리던이라는 걸출한 네오 웨스턴의 총아가 탄생하는데 큰 영향을 미치게 된다.


좁은 의미에서의 서부극(Old West)은 시대성(Old)과 공간성(West)을 동시에 함유하는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시대가 과거도 아니고 무대가 서부도 아니다. 하지만 이 작품이 서부극처럼 느껴지는 이유는 바로 코맥 매카시, 그리고 코엔 형제가 서부극의 본질이 성질의 표면적 특성이 아니라, 성질에 깃든 의미, 특히 경계성을 현대에 유의미한 담론으로 끌어오는 데 성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장르로서의 서부극이 어떠한 향수를 일으키는 이유는, 문명과 야만의 경계선상에 위치한 서사라는 점이 중요하게 작용한다. 물론, 앞에서 예시로 든 클래식 서부극의 백인-원주민 사이의 경계는 할리우드에서도 빠르게 사장되거나,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복잡한 양상을 띄게 되었다. 결국 유흥으로 기능하고 있던 서부극은 세르조 레오네의 스파게티 웨스턴, 달러 3부작이 이 경계를 미국-멕시코 국경으로 재설정하면서 (물론 촬영은 이탈리아에서 했지만) 미국의 남부 국경이 서부극의 새로운 무대로 떠오른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에 대한 비평은 대부분 안톤 쉬거가 대표하는 자연재해와도 같은 폭력, 코엔 형제 특유의 우연한 파국을 중심으로 도는 경향이 있지만, 그 행간에는 분명히 경계에 대한 정치적인 담론이 존재하고 있다. 여기서 경계, 즉 국경은 인위적이고 제도적인 관념이다. 두 국가가 실제 지리상으로는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선을 그어놓고, 그 가상의 선을 기준으로 언어와 문화가 분리된다. 이 인위적인 분리는 경계 안팎으로 실제적인 폭력성과 긴장감을 조성한다.


뉴욕의 바사르 대학에서 지리학을 가르치는 조세프 네빈스 교수는 "불법" 이민자를 다룬 논문에서, 미국-멕시코 국경의 철저한 분리는 대중의 인식보다 훨씬 최근에 일어난 일이며, 1970년 이후에서야 "미국-멕시코 국경은 점점 경계(border), 즉 점진적 전이의 공간에서, 한계(boundary), 냉혹한 분리선으로 변화해 가면서, 법, 질서, 번영과 혼돈, 무법, 가난을 갈라놓는다"라고 평했다. 네빈스는 심해져 가는 범죄율에 대한 대응으로 강화된 국경 정책이 발족되었다는 해석을 경계하고, 강화된 국경 정책에 대응하여 접경 지역의 강력 범죄율이 늘었다는 논리를 펼친다.


물론, 본문에서 2021년 현재 훨씬 복잡해진 미국-멕시코 국경의 정치적 의미의 체계적이고 심도있는 분석은 불가능하며, 이 글의 목적도 아니지만, 대한민국의 국민들은 국경이라는 인위적인 분리선이 지리를 넘어서 인권, 문화, 언어, 정치- 인간사 모든 양상을 얼마나 처절하게 갈라놓는지를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다.


작품 내에서 르웰린 모스는 피칠갑을 하고는 두 발로 걸어서 멕시코 국경을 넘어간다. 멕시코 측의 경찰은 졸고 있다가 르웰린 모스를 보고는 아무런 일도 아니라는 듯이 무시한다. 이후, 모스는 멕시코의 병원에서 치료를 마치고 절뚝거리며 미국 땅으로 다시 돌아온다. 미국 측의 국경 경비대는 병원 가운을 입은 모스를 보고 그를 압박하며, 본인의 의지로 그가 미국 땅에 들어오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모스가 그러한 꼴로 미국에 입국할 수 있는 이유는 베트남 전쟁에 두 번이나 파견된 참전용사라는 사실을 밝혔기 때문이다.


르웰린 모스(조시 브롤린),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 [출처: YouTube]


그러나 이 와중, 작품 내에서 잠시 그려지는 멕시코는 청결하고 따뜻한 분위기의 병원이라는 공간, 그리고 피를 흘리고 쓰러져 있는 모스를 안전하게 병원으로 옮겨준 마리아치 밴드라는 인물들로 묘사된다. 국경을 넘어 미국과 멕시코를 오가는 인물들은 돈을 훔쳐 달아나는 사냥꾼 모스, 그를 쫓는 살인마 쉬거, 그 둘을 쫓는 살인청부업자, 우디 해럴슨이 연기한 카슨 웰스, 피로 목숨을 부지하는 3명의 미국인들이다. 미국 측의 국경 경비대는 도대체 무엇의 월경(越境)을 막고 있는가. 실제 본 작품이 텍사스 지역의 황무지 한가운데서, 큰 문제없이 총기와 함께 넘어온 멕시코와 미국의 마약 갱들의 다툼으로 시작되었다는 설정을 상기해보면, 국경 경비대의 존재는 이 작품에서 유명무실일 뿐이다.


안톤 쉬거는 이 작품에서 인물이 아니라 자연재해와 같은 혼돈 그 자체를 상징한다 해석되는 경우가 많은데, 경계성이라는 키워드를 통해 본 쉬거는 자연재해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 코엔 형제와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쉬거를 이 경계에서 가장 자유로운 주체로 묘사한다. 그는 캐틀건을 사용해 경계의 폐쇄성이 압축된 오브제인 자물쇠를 부수고 공간 1에서 공간 2로 자유롭게 진입하는 광경을 반복해서 보여준다. 이 작품에서 캐틀건은 쉬거가 다른 인물을 가축으로 여긴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등장인물들이 느끼는, 더 넓게 보면 경계를 설정함으로 인간이 얻는 안도감이라는 허상을 파괴하는 도구로 사용된다.


쉬거는 캐틀건과 함께 소음기가 부착된 산탄총을 사용한다. 작품 내에서 쉬거가 자물쇠를 부수는 상황에서 굳이 산탄총을 사용할 필요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캐틀건을 사용하는 이유는 캐틀건은 흉기가 아니라 목축 도구이기 때문이다. 작품 내에서 인간이 외부로부터 자신의 구역을 분리하고, 그 구역 안에서 안도감을 느낄 수 있는 이유는, 자물쇠라는 장치로 압축되는데, 쉬거는 산탄총이 아니라, 일상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도구로 이 자물쇠를 한 순간에 파괴해 버린다.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작품 내 광활한 서부의 황야를 비추는 빛, 그리고 그 사이의 어둠을 묘사하고, 실제로 기이한 폭력으로 가득 찬 국경을 그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그림자와 실루엣으로 장식해간다. 하지만 이 작품에서 꼭 짚고 넘어가야 할 부분은 바로 쉬거의 움직임을 다루는 실외-실내 트랜지션 촬영이다. 르웰린 모스의 트레일러 진입에서도, 모텔에서 멕시칸 갱들이 숨어있던 모스의 옆 방 진입에서도, 쉬거는 조명과 복장 때문에 검은색의 몸에 얼굴만이 둥둥 떠다니는, 마치 잉마르 베리만 감독의 〈제7의 봉인〉(1957)에서 등장하는 사신과 같은 인상으로 외부와 경계를 자유롭게 넘나 든다. 쉬거는 자연재해라기보다는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는 사신에 가깝다. 그리고 그가 떠난 장소에는 인지를 불허하는 폭력의 흔적이 남는다.


토미 리 존스가 연기한 보안관 에드 톰 벨은 작품 내내 쉬거가 상징하는, 더욱 폭력적으로 변해가는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겠다는 태도를 견지하지만, 말미에 찾아간 그의 삼촌 엘리스는 이 지역은 항상 폭력적이었다고 대답한다. 이는 시대가 점진적으로 인간에게 폭력성을 주입했다기보다는, 경계가 인간을 폭력적으로 만들어 놓았다는 의미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곳에 경계가 존재하기에 폭력이 심화된다는 이야기는 언뜻 직관적으로 와 닿지 않을 수 있다. 하지만, 클래식 서부극부터 수정주의 서부극 모두, 어떠한 의미에서는 팽창하는 두 개의 이데올로기가 부딪혀 마찰이 일어나고, 변덕이 심하고 불안한 균형 상태, 그 경계를 다루고 있다. 경계는 실재하는 선이 아니다. 경계는 두 개의 관념이 맞닿아 있는 부분, 즉 오히려 관념의 부재를 의미한다. 양쪽에서 모두 그 맞닿아 있는 공간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할 수 없기 때문에 오히려 관념 안에 존재하는 질서 또한 사라지게 된다.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는 과거, 올드 웨스트, 클래식한 서부극처럼 미화된 과거를 기억하는 에드 톰 벨이 인지를 벗어나는 폭력에 잠식되어가는 시대를 한탄하며 시작한다. 그러나, 이는 영화의 마지막, 에드 톰 벨이 부인에게 이야기해주는 간밤의 꿈에서도 간접적으로 반박된다. 그를 안도하게 만들었던 추상적 관념은 3대가 이어서 보안관으로 복무했다는 사실을 자랑스러워하는 부친, 말하자면 본인의 인지와 사랑 내에 존재하던 주변 인간들의 존재였을 뿐이다.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시에서 따온 〈No Country for Old Men〉이라는 제목은 사실 "노인을 위한 장소가 아니다"라는 의미와 "노인이 쉴 만한 곳이 없다"라는 중의적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첫 번째 해석은 에드 톰 벨이 살아온 국경이 언제나 노인이 살아가기에 적합하지 않은 야만성으로 충만한 무법지대였다는 사실을 엘리스의 입을 빌어 전달된다. 두 번째 해석은, 에드 톰 벨 본인이 꿈에서 부친이 들고 있던 횃불을 바라보는 행위만으로도 안도감을 얻었다는 사실로 우회적으로 설명된다. 에드 톰 벨은 어느 순간 노인이 되어 주위를 둘러보았고, 나이가 들어감은 지극히 개인적인 기준에서 질서를 상징하던 개념들을 잃어가는 수순이라는 깨달음에 도달한다. 경계의 세상은 항상 폭력과 혼돈으로 가득 차 있었다. 보안관의 나이만 변했을 뿐이다.


테일러 셰리던, 네오 웨스턴 분더킨트

테일러 셰리던 [출처: Esquire]


코맥 매카시의 작품과 코엔 형제의 뒤틀린 웨스턴은 당시 미국의 모터사이클 갱단을 다룬 〈썬즈 오브 아나키〉(2008-2014)의 조연으로 출연하고 있던 배우 테일러 셰리던에게 큰 인상을 남긴다. 그는 〈썬즈 오브 아나키〉 종영 후, 불혹이라는 나이가 되자 무언가 한계를 느꼈던지 연기를 떠나 작가로 변신을 시도하게 되는데, 그가 첫 번째로 집필한 작품이 바로 드니 빌뇌브 감독의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였다.


평단과 대중의 만장일치에 가까운 찬사를 받은 이 작품 이후, 셰리던은 데이비드 맥켄지 감독이 연출한 또 다른 네오 웨스턴인 〈로스트 인 더스트〉(2016)의 원작을 쓰고 작가로 연타석 홈런을 날린다. 그는 여기에 안주하지 않고 직접 감독으로 데뷔해 〈윈드 리버〉(2017)까지 네오 웨스턴 3연작 모두를 비평과 흥행 양면에서 성공시키면서 해당 장르의 후기지수로 떠오른다.


네오 웨스턴 3연작에서 보이는 테일러 셰리던의 작가적 특징은 미국 내에서 당연하게 받아들여지는 지극히 미국적인 가치들에 잠재되어 있는 야만성에 대한 집요한 탐구와, 그 사이에 만연한 현대 미국이라는 비극적 감상(Modern American Tragedy)이다.


작가 본인의 인터뷰에 따르면 〈시카리오〉는 "우리와 문화적으로, 경제적으로 가장 가까운 이웃과의 국경에서 또 다른 전쟁이 벌어지고 있었고, 그 전쟁은 베트남 전쟁에 소요된 시간의 반밖에 되지 않는 기간 중 거의 비등한 숫자의 사상자를 냈는데, 관련된 기사는 노력해야만 찾을 수 있었다"라는 지점에서 시작되었다. 하지만, 〈시카리오〉가 여타 마약 범죄물과 차별화된 시선을 가지게 된 기반은 셰리던이 이 '마약과의 전쟁'을 보면서 실체가 없는 적을 상대로 설정한 싸움에서 느낀 모호한 막막함을 지나 도달한 결론이다. "이 문제에 대한 뾰족한 해답이 없기 때문에 일부러 회피하는 느낌이 들었다. 해결할 수 없는 문제이기 때문에 [마약] 소비자에게 책임이 전가되고 있다."


〈로스트 인 더스트〉에서는 유산으로 내려오던 농장이 석유가 묻혀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은행의 계획적인 농간으로 담보로 잡히자, 은행털이에 나서는 두 형제의 이야기를 다룬다. 대물림된 가난의 사슬을 끊기 위해 범죄를 저지르지만, 이는 폭력과 복수라는 또 다른 사슬을 만들어 낸다. 〈윈드 리버〉는 미국 원주민 보호구역에서 일어나고 있는 도저히 답이 없이 피폐해진 원주민들의 삶, 원주민 여성들을 대상으로 한 잔인한 운명을 정면으로 다루고 있다.


셰리던의 네오 웨스턴 3연작은 간결한 "해답"이 존재하지 않는, 제도적으로 사회 전반을 옭아매는 문제들이 어떻게 개인의 삶을 파국으로 몰아가는지를 담담하게 그려낸다. 그렇기에 영화적 완성도, 장르적 유흥과는 관계없이 그가 만들어낸 세계는 몹시 우울한 비극적인 기운에 지배당한다. 때문에 그가 각 작품에서 내놓는 서사적 해답이 지엽적으로 느껴지는 이유 또한 의도적으로 느껴진다.


클래식 서부극에서는 문명의 외부에 존재했던 야만성이 수정주의 서부극에서 개인의 내면으로 이동-축소되었다면, 네오 웨스턴에서는 문명 전반으로 다시 확장된다. 그 야만성은 셰리던이 말했듯이 해답이 없을 정도로 거대하게 커졌기 때문에 우리는 보통 야만성이 보이는 지점에서 회피하려 한다. 하지만 마치 안톤 쉬거의 캐틀건이 자물쇠를 날려버리고 너무나도 쉽게 들어오듯이, 미국인이 설정한 야만과 문명의 경계는 허상에 불과하다.


"짐승"

드니 빌뇌브 감독, 시우다드 후아레스,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2015) [출처: YouTube]


〈시카리오〉는 애리조나에서 소노라 카르텔의 마약 창고를 급습한 FBI의 유격 작전으로 시작된다. 에밀리 블런트가 연기한 케이트 메이서와 대니얼 칼루야가 연기한 레지 웨인은 FBI 요원으로, 마약 창고의 벽 뒤에 숨겨져 있는 차마 눈 뜨고 볼 수 없는 시체 더미를 발견한다. 메이서는 그 참극을 벌인 진정한 범인에게 법의 심판을 내릴 수 있다는 설득에 법무부, 국방부, CIA, FBI가 모두 참여하는 합동기동부대(Joint Task Force)에 참여하게 된다.


작전의 총지휘자는 조시 브롤린이 연기한 CIA 소속의 맷 그레이버 요원으로 그는 멕시코 출신의 "컨설턴트", 베니시오 델 토로가 연기한 알레한드로 길릭과 함께 메이서와 웨인 요원을 국경 지대의 미국 도시인 엘 파소로 이끌고, 그들은 그곳에서 다시 중무장한 델타포스 요원들과 함께 국경을 넘어 멕시코의 도시 시우다드 후아레스로 이동한다.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소노라 카르텔의 중간 간부의 신병을 양도받고 돌아오는 길에, 멕시코 갱단의 공격을 받지만 탈출에 성공하고, 알레한드로 길릭은 카르텔 간부를 고문해 작전의 타깃, 소노라 카르텔의 두목인 파우스토 알라콘으로 그들을 이끌 길을 찾는 데 성공한다.


〈시카리오〉는 범죄 스릴러, 대테러 액션 영화로 보아도 훌륭한 고증과 액션 시퀀스를 자랑하고, 군더더기라고 느껴지는 대사나 장면이 하나도 없는 단단한 편집을 보여준다. 여러 가지 장르를 모두 담고 있는데도 그 모든 장르에서 높은 완성도를 보여주기 때문에 이 영화 자체의 유흥적인 측면이 극대화되어 해석되는데, 이러한 연유로 대중적인 흥행에도 성공했다. 영화는,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알레한드로 길릭의 한 맺힌 복수극으로 끝이 난다.


하지만 소노라 카르텔이 벌인 참극으로 시작해, 소노라 카르텔의 두목의 암살로 끝이 난 이 표면적인 서사는 곰곰이 생각해보면 결국 아무런 문제도 해결하지 못했다. CIA의 작전은 소노라 카르텔을 괴멸시킨 후, 본인들이 조종하기 쉬운 다른 카르텔에게 마약 패권을 몰아주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가족을 잃은 멕시코 출신의 검사인 알레한드로 길릭은 CIA 이전에는 메데인 카르텔을 위해 일했던 전적이 있다. 케이트 메이서는 길릭의 총구 앞에서 자신이 봤던 모든 불법적인 행동을 묵인하는 동의서에 서명해야 한다.


버라이어티와의 인터뷰에서 셰리던은 〈시카리오〉를 집필하며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어떻게 하면 문제가 해결되었다는 착각을 주지 않으면서도 서사 내 갈등을 해결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악을 죽이지 않고 악역을 죽일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고 한다.


해결되지 않은 문제, 죽지 않은 악은 경계 그 자체의 존재이다. 미국-멕시코 국경을 가운데 두고 마주하는 도시는 그 지리적인 위치만으로도 묵시록적인 환영에 사로잡혀있는데, 멕시코의 국경 도시는 바로 극 중에서 맷 그레이버 요원의 입으로 "짐승(The Beast)"라고 불리는 시우다드 후아레스이다. 여기서 "짐승"이란 표면적으로는 그 야만성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성경의 묵시록에 등장하는 바로 그 사탄의 "짐승(The Beast)"로 해석할 수도 있다. 실제로 시우다드 후아레스에 진입한 메이서는 카르텔에게 잔인하게 고문당하고 살해된 시체가 고가도로 아래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광경을 보게 되는데, 이러한 광경은 묵시록에 등장하는 일곱 재앙을 떠올리게 만든다.


시우다드 후아레스를 이런 현세의 포스트-아포칼립스 도시, 묵시록의 짐승과 연결시켜 해석한 시선은 〈시카리오〉가 처음이 아니다. 칠레에서 출생해 멕시코에서 작가 활동을 시작한 로베르토 볼라뇨의 유작 《2666》은 시우다드 후아레스에서 영감을 받은 가상의 도시 산타 테레사를 무대로 하고 있는데, 총 5부작 중 4부인 "범죄에 관하여"에서는 100명이 넘는 여성이 살해당한 사건을 시체에 대한 건조한 법의학 보고의 형태로 나열한다. 5부작 내에서 소설의 제목인 『2666이라는 숫자는 등장하지 않지만, 이 숫자는 그 자체로 묵시록의 재난이 지나고 난 미래를 연상케 하는 연도와, 묵시록의 짐승이 새기는 666이라는 낙인을 모두 내포하고 있다. 인간의 생명이 짐승의 그것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을 정도로 야만적인 이 도시에서, 볼라뇨는 묵시록의 짐승(The Beast)과 인간이 아니라는 의미의 짐승(a beast)과 조우한 경험을 공유한다.


로베르토 볼라뇨, 『2666』, (左) 스페인판 표지, (中) 미국판 표지, (右) 영국판 표지 [출처: Amazon]


〈시카리오〉에서는 두 번 국경을 넘는 장면이 등장한다. 첫 번째는 후아레스에서 체포된 소노라 카르텔의 중간 보스 기예모 디아즈의 신병을 인도받기 위한 목적으로 국경 보안소를 통과하고, 두 번째는 그를 고문한 결과로 입수한 정보를 통해 소노라 카르텔의 두목의 저택으로 가는 길을 열기 위한 지하 터널이다.


이 두 번의 횡단 모두, 합동기동부대와 소노라 카르텔의 무력 충돌로 이어지는데, 첫 번째 무력 충돌에서는 국경 보안소를 지나던 일반인들이 전면적인 총격전에 휘말리고, 두 번째 무력 충돌에서는 영화 초반부터 평범한 가족의 가장으로 묘사되던 실비오가 소노라 카르텔의 마약 거래를 눈감아주던 부정 경찰이라는 사실이 밝혀지며 희생된다. 물론 실비오가 비리를 저지른 경찰이라는 사실은 분명하지만, 그는 오히려 영화 내에서는 "소시민"을 대표하는 인물로 그려진다. 실제로 첫 번째 무력 충돌에서 메이서는 멕시코 경찰을 조심해야 한다는 경고를 받는데, 후아레스의 공권력 전체가 이미 카르텔의 영향권 안에 들어 있다는 의미이며, 실비오는 그 거대한 장치의 아주 작은 부품으로 생존을 위한 당연한 선택을 했을 뿐이다.


드니 빌뇌브 감독과 〈프리즈너스〉(2013)에 이어 〈시카리오〉에서 다시 만난 로저 디킨스 촬영감독은 이 두 경계 횡단 장면을 영화사에 남을 명장면으로 만드는 데 성공한다.


첫 번째 횡단 장면은 서부극의 멕시칸 스탠드오프를 연상케 할 정도로 긴장감 조성에 공을 들인다. 주위를 둘러싼 수많은 차 중 총기가 언뜻언뜻 보이지만, 합동기동부대의 차량은 일반 차량에게 막혀서 길을 돌파하지 못한다. 그러던 중 소노라 카르텔의 갱들이 차에서 내려 총기를 난사하기 시작한다. 대낮에 모든 사건이 공개된 장소에서 일어나지만, 메이서의 시야는 주위를 둘러싼 다른 차량에 의해 가려진다. 메이서는 총격전 내내 극도의 혼란과 무력감 속에 젖어 "도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는 거야"라고 중얼거리며, 갈 곳을 찾지 못한다.


케이트 메이서(에밀리 블런트), 〈시카리오: 암살자의 도시〉 [출처: YouTube]


두 번째 횡단 장면에서 메이서는 본인이 가고 싶은 목적지를 분명히 하고 있다. 혼란으로 가득 찬 어두운 터널을 지나 나온 그곳에는 그녀가 마주하고 싶지 않았던 진실이 존재한다. 어둑한 조명으로 밝혀진 이 곳에서는 또 다른 의미의 짐승, 인간으로의 기능을 완전히 포기한 복수귀 알레한드로 길릭이 메이서를 기다리고 있다. 자신의 가족이 경험했던 비극적 운명을 알라콘과 그의 부인, 어린아이들에게 선물한 길릭에게는 인간성을 더 이상 찾아볼 수 없다.


낮과 밤의 국경 횡단 모두, 그 임의로 생성된 제도적 구분의 허무함과 정면으로 마주한 관객은, 그 경계선에 의지해왔던 개인이 얼마나 무력한지 이해하게 된다.


마침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와 〈시카리오〉에서 "경계"는 안전이라는 허상을 제시한다. 총을 가진 갱들이 자유롭게 국경 보안소를 넘나들고, 사신은 자물쇠를 뚫고 경계를 오간다. 오히려, 경계의 존재는 인간성을 말살하고, 그 자리에 짐승들을 남겼을 뿐이다. 경계의 또 다른 의미를 "가축우리"라고 생각한다면, 우리가 만든 임의의 선이 과연 무엇을 지키고, 무엇을 막고 있는지, 그 경계 안에서 안도감을 느끼는 인간들이 어떠한 존재이며, 그 경계선 너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 대답하기 어렵고, 비극적 감상으로 가득 찬 질문만을 남길뿐이다.


조세프 네빈스 교수는 "자유로운 이동권은 다른 권리, 예를 들자면 사회가 대중 질서와 공공복지를 추구할 권리와 충돌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도, "초-경계적 이동권이 기본적인 인간의 권리에 속하는지"에 대한 합의가 선행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 경계의 생성이 인간의 기본적인 권리를 침범하고 있다면, 그 경계 주위에서는 인간성이 말살되는 결과가 당연하다. 시우다드 후아레스가 "짐승"이라고 불리게 된 비극이 바로 이 지점에 존재한다.


(끝)


참고자료  

Maxwell, K., & Nevins, J. (2003). Operation Gatekeeper: The Rise of the “Illegal Alien” and the Remaking of the U.S.-Mexico Boundary. Foreign Affairs, 82(2), 158. https://doi.org/10.2307/20033543

Nevins, J. (2003). Thinking Out of Bounds: A Critical Analysis of Academic and Human Rights Writings on Migrant Deaths in the U.S.-Mexico Border Region. Migraciones internacionales [online]. http://www.scielo.org.mx/scielo.php?script=sci_arttext&pid=S1665-89062003000200007

Deakins, R., Pizzello, S., & Oppenheimer, J. (2007, October). Roger Deakins, ASC, BSC explores the existential perils of the American West in The Assassination of Jesse James by the Coward Robert Ford and No Country for Old Men. American Cinematographer, 88(10). https://theasc.com/ac_magazine/October2007/QAWithDeakins/page1.html

Deakins, R., & Labrecque, J. (2015, September 24). Roger Deakins on shooting Sicario: “We wanted to go as bleak as possible.” EW.Com. https://ew.com/article/2015/09/24/roger-deakins-discusses-shooting-sicario/

Sheridan, T., & Swinson, B. (2016, August 15). Taylor Sheridan on Sicario and Hell or High Water. Creative Screenwriting. https://www.creativescreenwriting.com/hell-high-water/

Sheridan, T., & Tapley, K. (2015, October 28). ‘Sicario’ Screenwriter Taylor Sheridan on the ‘Answerless Problem’ of the Drug War. Variety. https://variety.com/2015/film/awards/sicario-screenwriter-taylor-sheridan-drug-war-1201629158/

Sullivan, K. P. (2015, August 18). Emily Blunt finds her strength in “Sicario.” EW.Com. https://ew.com/article/2015/08/18/emily-blunt-sicar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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