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타악과 무용으로 작용하는 검투
데미언 셔젤 감독, 〈위플래시〉(2014) [출처: FILMGRAB]
1대 1 검투, 칼싸움에는 관객을 홀리는 원초적인 매력이 존재한다. 이는 서로의 목숨을 빼앗기 위한 극한 상황이 자아내는 말초적 긴장감 때문만은 아니다. 칼날의 부딪힘이 연쇄하는 장면은 시청각적으로 마치 타악기 연주, 데미언 샤젤의 〈위플래시〉(2014) 말미에서 폭주해가는 드럼 솔로와 같은 느낌이 든다. 칼이 부딪혀 가는 속도와 그 효과음을 통해 청각적인 리듬이 발생하고, 격돌하는 검객들의 모습은 합이 잘 짜인 무용과도 같아서 그들의 몸짓을 통해 시각적인 리듬이 구체화된다.
이러한 이유 때문인지, 영화 내 검투는 발레나 현대무용과 같은 쾌감을 선사한다. 서사와 인물의 연기, 대사, 발성, 표정이 조명 뒤로 물러서고, 그들의 몸짓과 촬영, 편집이 카메라 전체를 차지한다. 다만, 전자는 해석이 쉽고 평가와 판단 또한 직관적이지만, 후자의 경우 언어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질을 가진다. 때문에 검투라는 트로프를 왜 좋아하는지, 또는 어떤 검투 장면이 왜 좋았는지 설명을 할 때는 고증과 핍진성이 뛰어나다거나, 영화적 서사를 어떻게 은유했는지를 에둘러 설명하게 된다. 하지만, 검투에는 분명히 이보다 더욱 원시적이고, 감각-자극적이며, 본능적인 매력이 꿈틀거리고 있다.
검투는 물론 인물의 움직임이 주가 되는 활극 장르에 가장 어울리는 엔딩이기도 하다.
스워시버클러(swashbuckler)라는 장르에 가장 특화된 배우였던 타이론 파워가 연기한 조로 대 영화 역사상 가장 뛰어난 검객 배우 바질 라스본이 연기한 에스테반 파스칼 간 벌어지는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속도감의 첫 번째 '슈퍼히어로' 배틀 〈쾌걸 조로〉(1940). 무사도와 명예라는 허무하기 짝이 없는 가치에 아들을 잃은 나카다이 타츠야의 한시로 츠구모 대 탄바 테츠로의 오모다카 히코쿠로가 격돌하는 바람이 부는 초원을 담아낸 수정주의 찬바라 〈하라키리〉(1962). 매력적인 인물만으로 가득 찬 작품에서 독보적 매력을 뽐내는 맨디 패틴킨의 이니고 몬토야 대 부친의 원수, 크리스토퍼 게스트가 연기한 타이론 루겐 백작과 희극적 복수전이 벌어지는 〈프린세스 브라이드〉(1987). 세 작품 모두 다른 장르의 검투를 보여주지만, 고조되어가는 분위기의 대미를 검의 움직임으로 장식하고 있다는 점으로 이해를 해 본다면 유의미한 연결점이 형성된다.
한시로 츠구모(나카다이 타츠야), 오모다카 히코쿠로(탄바 테츠야), 〈하라키리〉(1962) [출처: Criterion]
하지만 이러한 일련의 작품에서 검투가 차지하는 위치를 단순히 분위기 고조, 긴장감 조성 등 추상적인 형태로만 설명하기에는 곤혹스러운 부분이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서사나 핍진성 이상의 매력이 암약하고 있는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성질이다. 이는 검투가 영화의 리듬성을 가장 뚜렷이 보여주는 장치라서 그렇지 않을까 생각된다.
영화 영상, 영상 예술에는 분명히 리듬이 존재한다.
보통 청각적으로만 인지되고 있는 리듬은 영화에서는 시청각적으로 동시에 작용한다. 장 미트리는 『영화의 미학과 심리학』에서 영화의 리듬을 "시간의 구성"이라고 정의했다. 거칠게 말하면 조금씩 다른 숏의 길이, 씬의 길이가 모여서 청각과는 별개의 리듬을 만들어낸다.
마이클 만 감독의 〈히트〉(1995)는 영화 역사상 손꼽힐 정도로 긴장감 넘치는 대화 장면을 연출하였는데, 거의 6분에 가까운 긴 시간 동안 배경음악과 효과음 없이 단 두 개의 카메라만을 사용하여 알 파치노가 연기한 빈센트 해나와 로버트 드 니로가 연기한 닐 매컬리의 얼굴을 각각 담는다. 두 대배우의 명연기도 일품이지만, 두 카메라는 각자의 얼굴을 번갈아가면서 잡고, 아주 천천히 줌인하는데, 한 인물의 얼굴에 머물러 있는 시간의 조율만으로도 시각적 리듬이 조성된다. 카메라가 1, 2초간 대사를 마친 인물의 얼굴에 머물면서 여운이 생기고, 대사가 끝나기도 전에 미세하게 동요하는 상대방의 얼굴을 보여주면서 호흡을 조정한다.
빈센트 해나(알 파치노), 닐 매컬리(로버트 드 니로), 〈히트〉(1995) [출처: FILMGRAB]
시각적 리듬의 또 다른 예시로는 플래시 디자이너인 유고 나카무라가 유니클로와 협업하여 디자인했던 〈유니클락(Uniqlock)〉으로, 지금은 아쉽게 서비스가 종료되어 유튜브 등지에서 자취를 찾을 수밖에 없지만, 화면 전환 효과와 인물의 무용으로 시간의 기본 단위를 구성하는 독특하고 야심 넘치는 시도를 선보였다. 이 서비스에는 배경음악이 존재했지만 음악이 없이 영상만을 감상해도, 마치 시각과 청각 사이에 존재하는 어떠한 연결 부위에 메트로놈이 자리 잡은 듯한 느낌이 들었다. 유고 나카무라의 의도가 무엇이었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개인적인 해석으로는 일반인들에게도 공감각(synesthesia)을 가진 이들이 세상을 경험하는 인지를 시청각화한 기획이 아닐까 짐작해본다.
〈유니클락(Uniqlock)〉[출처: Uniqlo.com]
리듬이 단순히 〈히트〉나 〈유니클락〉처럼 숏과 숏의 길이를 이용한 편집선에서만 발생하지는 않는다. 하나의 숏 안에서 인물과 사물의 움직임을 통해 발생하기도 하며, 카메라의 이동속도를 통해서도 발생한다. 이러한 형태의 리듬 구성은 숏의 길이와는 달리 설명하기가 더 난감하기 때문에 영화 제작 시에도 연출자와 편집자, 작곡가의 본능에 의지해 해결되는 경향이 있으며, 그에 대한 비평적 시도 또한 감각적인 은유에 의지하게 된다. 봉준호 감독이 데이빗 핀처 감독의 작품군을 논하면서 "리듬"이라는 개념을 사용한 문맥도 영화의 요소 중 무언가 설명하기 힘든 분위기나 템포 전체를 아우르기 위한 일종의 캐치-올 키워드라는 사실 또한 주목할만하다.
그렇다면, 두 가지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첫 번째, 영화적 리듬에 관한 연출적, 비평적 기획은, 작품 내 흔히 우리가 영화에서 쉽게, 표면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요소, 서사나 인물의 연기 등이 추상화될수록 활력을 얻는다. 이는 서사와 인물이라는 소설의 가장 기본적 요소를 해체의 대상으로 보았던 포스트모던 문학에서도 나타난 특징으로, 당연히 문학과 밀접하게 접해있는 예술인 영화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다.
포스트모던 거장인 코맥 맥카시의 동명 작품을 각색한 코엔 형제의 〈노인을 위한 나라는 없다〉(2007), 또 다른 포스트모던 거장인 토머스 핀천의 동명 작품을 각색한 폴 토머스 앤더슨 감독의 〈인히어런트 바이스〉(2014) 등, 할리우드의 최전방(avant-garde)에 위치한 영화감독들은 일부러 서사를 추상화시키거나 파편화시켜, 그 미시감(jamais vu)을 통해 영화적 리듬을 최대한 작품 전면으로 끌어당겨 배치한다.
두 번째, 영화적 리듬은 서사나 연기의 독창성이 작품 완성도에 대한 직접적 척도와 분리되어 있는 장르영화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이는 닐 게이먼과 가즈오 이시구로의 대담에서 게이먼이 이야기 한 장르소설의 정체성에 대한 논의와 연결된다. 게이먼은 장르소설을 마치 포르노그라피나 뮤지컬 영화에 비교하면서, 장르소설에서 서사 또는 개연성의 역할은 독자가 기대하는 트로프와 트로프를 이어주는 연결선에 불과하지 않을까 질문을 던진다.
여기서 한발 더 나아가, 여느 장르물 중 '무협'이라는 장르에서 영화적 리듬이 가장 활력 있게 사용되고 있다고 주장하고 싶다. 무협은 보통 현실 역사에 기반하고 있지만, 물리적인 핍진성을 완전히 포기했음을 선언한다. 화면상 보이는 대부분의 트로프가 허구이며, 그를 믿을 준비가 되어 있는 열렬한 관객들을 위해서, 무협은 서사의 개연성에 의지하지 않고 자체적 호흡과 리듬에 대한 고민을 오랫동안 해왔다. 이는 장르가 무르익었던 90년대 중반에 와서 작가주의적 감독들이 시도한 무협극에서 잘 보이는데, 왕가위 감독의 <동사서독>(1994), <서극의 칼>(1995), 이안 감독의 <와호장룡>(2000)에 이르기까지 무협의 리듬은 그 등장인물들의 무예만큼이나 아크로바틱한 시도가 계속되었다.
무협은 그렇다면 시각-청각을 꿰뚫는 공감각적 리듬이 구체화되는 개념으로의 검투가 영화적 리듬 조성을 위해 가장 포괄적이고 전면적으로 사용되는 장르라고 이야기될 수 있다. 이 리듬의 양극단에 서 있는 두 개의 작품, 이명세 감독의 〈형사 DUELIST〉(2005), 허우샤오셴 감독의 〈자객 섭은낭〉(2015)은 마치 천하제일인, 경공술의 최고수만이 넘을 수 있는 태산의 봉우리들 사이 간격만큼이나 떨어져 있다. 하지만 두 영화의 위치를 설정하고 나면 생기는 그 사이의 공간에는 영화의 리듬이라는 개념이 산의 봉우리를 에워싼 안개 자욱처럼 흐릿한 존재감으로 구체화된다.
개연성의 퇴마사
이명세 감독,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 〈형사 DUELIST〉(2005), 〈M〉(2007) [출처: 네이버 영화]
이명세 감독은 한국 영화계에서 영상 감각에 있어서는 탁월한 평가를 받아오면서 상업영화와 예술영화의 경계선에서 치열한 검투를 계속해왔다. 이렇게 뛰어난 감독이 15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작품 활동을 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 몹시 안타깝지만, 한편 이창동 감독, 홍상수 감독과 같이 작가주의적 성향을 보여왔다고 평가받는 다른 감독들이 지속적으로 작품을 공개해왔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명세 감독의 작품 세계를 바라보는 한국 영화계의 시선에 대한 미심쩍은 부분이 존재한다.
〈개그맨〉(1989)으로 충무로에 데뷔한 이명세 감독은 작품적으로는 유의미한 비평을 받았지만 흥행에서는 실패한 작품을 연이어 공개하다가, 〈인정사정 볼 것 없다>(1999)를 통해 처음으로 평단과 대중 모두에게 찬사를 받으며 한국영화 역사의 만신전에 오르게 된다. (그의 데뷔 이후 충무로에 '이명세교'를 자처하며 그에게 다분히 영향을 받았음을 공공연히 밝히는 후배 영화인들이 있다는 사실은 유명하다.)
고전과 작가주의 영화(auteur cinema)를 전문적으로 복원하는 크라이테리온에서는 2020년 10월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2019)을 발매하면서 작가 에드 린의 기고를 통해 한국의 뉴웨이브 시네마를 다룬 적이 있는데, 한국영화를 국제적으로 인정받는 위치에 올린 이 르네상스의 시작을 김지운 감독의 〈조용한 가족〉(1998)과 이명세 감독의 〈인정사정 볼 것 없다〉, 봉준호 감독의 〈플란다스의 개〉(2000), 박찬욱 감독의 〈공동경비구역 JSA〉(2000)으로 꼽은 적이 있다.
〈인정사정 볼 것 없다〉가 상업적으로 흥행을 했다는 이력은, 감독 본인이 어떻게 받아들일지는 모르겠지만, 이명세교도라고 자신 있게 이야기할 수 있는 관객에게는 축복이자 저주와도 같다. 그 이력 덕분에 그는 〈형사 DUELIST〉, 〈M〉(2007)이라는 더욱 대담하고 모험적인 시도를 할 수 있는 제작자의 신뢰를 얻었지만, 해당 작품들이 연이어 흥행에서 참패하면서 〈인정사정 볼 것 없다〉와 같은 형태의 상업적 타협을 기대해오던 대중과 투자계에서 외면을 받아 15년이라는 긴 시간 동안 작품 활동에 난항을 겪게 되었다. 하지만 흥행성적과는 관계없이, 〈인정사정 볼 것 없다〉, 〈형사 DUELIST〉, 〈M〉으로 이어지는 3연작은 한국 영화 역사상 한 감독에 의해 이루어진 가장 대담하고 고혹적인 시도였으며, 대중의 당혹스러운 반응은 그 실험성에 대한 방증이기도 하다.
이 3연작에 대한 비판 중 가장 눈에 띄는 주장은 서사의 파편화로 인해 발생하는 개연성의 파괴이다. 이는 〈인정사정 볼 것 없다〉에서는 크게 눈에 띄는 정도는 아니었으나, 〈형사 DUELIST〉와 〈M〉에서는 점진적으로 영화 내 발생하고 있는 사건들의 인과관계에 있어 논리적 비약이 강해지면서 관객의 인지를 벗어나게 된다. 물론, 이명세 감독에게 서사에 대한 방기가 의도적인지 질문한다면 모든 작품에 장면 간 논리적 연결고리가 존재하며, 다만 대사나 인물의 행위가 아닌 형태로 제시되고 있다고 대답하리라.
이는 그가 추구하는 영화 자체가 언어로 추구, 분석하기 어려운 지점에 위치해있으며, 연출 시에도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무언가를 리듬이라던가, 여러 가지 의성어를 사용해 전달하는 면모에서도 보인다. 이는 영화 평론가들이라고 말하는 이들이 어느 순간 느끼게 되는 한계점과도 비슷한데, 매체적인 면에서 영화는 영상, 음악, 그리고 서사가 동시다발적으로 이루어지는데, 평론은 이 모든 감각의 자극을 문자로만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문자적 평론의 한계는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에서 고등 차원 경험에 대해서 논한 사고 실험을 들어서 쉽게 설명할 수 있다. 만약 2차원, 즉 평면에만 존재하는 의식 생명체가 존재한다면 그들은 입체성이나 부피, 질량 같은 개념은 본질적으로 이해할 수 없다. 만약 그들이 사는 평면에 우리 인간이 공을 던져 넣는다고 생각해보자. 그들은 처음에는 공이 평면과 닿는 점을 볼 수 있겠지만, 그 면적은 공이 평면을 통과하면서 (2차원 의식 생명체 입장에서는) 불가사의하게 넓어져, 공의 지름만큼 커졌다가, 다시 줄어든다. 문자로 이루어지는 영화의 평론은 2차원 의식 생명체가 이 공의 운동성과 물리법칙을 설명하려 하는 시도와 흡사하다. 영상이라는 고차원에 존재하는 대상을 한 차원 아래로 끌어당겨, 문자의 수준에서 해석해야 한다.
칼 세이건, 〈코스모스〉(1980) [출처: YouTube]
[사족. 때문에 가장 온전한 형태의 영화 평론은 영화와 같은 매체인 영상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글로 풀어내는 평론은 영상으로만 가능한 이야기를 담는 형태가 아니라, 문자만이 가능한 길을 모색해야 한다.]
달리 이야기하면, '개연성'이라는 개념은 영화가 문자적 예술인 문학에서 시작되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악마와도 같다. 이는 영화의 제작과 관객의 이해 양방향에서 동시에 작용하고 있다. 영화 제작은 시놉시스, 각본 등 글로 시작하며, 이 글은 영화가 만들어지기 이전에도 독자적인 논리 구조를 지니게 된다. 연출자와 연기자, 촬영감독, 작곡가 모두 어떠한 선형적 논리의 테두리 안에서 영화 제작을 접근한다. 한편, 엔터테인먼트라는 측면에서의 영화는 문학작품을 대체하기 때문에, 이를 경험하는 관객은 영화에 문학적인 잣대를 댈 수밖에 없다. '개연성'에 대한 강박은 여기서 발생한다.
하지만 영화는 영화이며, 문학이 아니다. 영화를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숏이고, 문학을 이루는 가장 기본적인 단위는 문장이다. 때문에 영화에서 문학적인 형태의 개연성을 요구하면, 이명세 감독의 작품을 접하는 관객은 난감할 수밖에 없다. 그가 영화에서 '서술적 개연성'이라는 악마를 퇴치하기 위해 치열하게 싸워왔기 때문이다. 굳이 비평을 검투에 비교해보자면, 감독 본인이 비평적 분석이 불가능한 영화를 표방하고 있기 때문에, 그의 영화를 설명하려는 시도는 마치 실체가 없는 무형검(無形劍)을 상대하는 기분과 엇비슷하다.
그렇다면 비평의 무대를 그와 접해있는 장소, 소설적 무협으로 옮김이 응당하다.
채움으로의 운율
슬픈 눈(강동원), 남순(하지원), 〈형사 DUELIST〉 [출처: 씨네21]
〈형사 DUELIST〉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상평통보가 화폐로 사용됨으로 보아 조선의 언젠가라 짐작이 되는 모호한 시기에, 위조 화폐를 추적하는 포도청 소속의 다모 남순(하지원), 안포교(안성기)와 그들을 가로막는 살수 '슬픈 눈'(강동원), 그리고 그의 배후에 있는 병판대감(송영창)의 결투를 다루고 있다.
"사람 이름이 슬픈 눈이라고?" 실소가 흘렀다. 허나 비안(悲眼)이라고 부른다면 그렇게 이상한 이름도 아니지만. 〈형사 DUELIST〉는 한글과 영문이 병기된 제목부터 시작하여, 감독의 전작 〈인정사정 볼 것 없다〉의 우영민 형사(박중훈)의 성반전이 한 스푼, 청소년 드라마 왈가닥 여주인공이 한 스푼 섞인 연기를 능청스럽게 해낸 남순(하지원), 그녀와 탱고를 연상케 하는 검격을 교환하는 고혹적인 살수, 슬픈 눈 (강동원), 그리고 동화와도 같은 색채와 서양악기로 채워진 배경음악까지, 모든 설정과 제작 단계에서 관객에게 눈 앞에 펼쳐지는 광경을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기를 주문하고 있다.
영화는 시작할 때부터 아예 귀곡산장과도 같은 괴담을 한 보따리 풀어놓고는, 화려한 편집과 맥 빠지는 전개를 당당히 선보인다. 이 단편은 그 이후 진행되는 서사와 어떠한 연결점도 존재하지 않으며, 유의미한 결말을 맺지도 않는다. 이보다 더 간절하고 명료하게 앞으로 벌어질 사건들을 선형적 인과관계가 이어지는 서사로 받아들이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할 수 있을까. 만약 감독의 이 제안을 수용하고, 눈 앞에서 일어나는 장관을 시청각적인 인지에 의지해 접근한다면, 마치 점점 그 투로가 심오해지는 무공의 초식과도 같이 펼쳐지는 〈형사 DUELIST〉의 영화적 운율을 경험할 수 있다.
시장에서의 두 번째 조우. 계속 서로와 시선이 마주치는 슬픈 눈과 남순. 그가 계속 신경이 쓰인다. 둘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안포교는 슬픈 눈을 추적하지만, 그는 가볍게 안포교의 추적을 떠돌린다. 마음이 복잡한 남순, 그날 밤 그림자가 휘장처럼 내려온 돌담길을 걷다가 심장을 죄어오는 목소리를 듣게 된다. 아니, 이미 그 길에 그가 기다리고 있기를 바랐을지도 모른다.
"내가 좋아서 따라오는 거요? 쫓아오는 거요?"
"체- 뭔 소린지…"
"아니면 뒤를 밟는 거요?"
둘의 검이 파공음을 내며 뽑힌다. 곧게 뻗은 슬픈 눈의 장검, 그리고 남순의 쌍단검. 두 남녀는 돌담길을 질주하며 서로를 향해 칼을 지르고, 막아가면서, 날이 부딪히는 소리가 불협화음처럼 밤의 고요함을 찢어간다. 슬픈 눈의 검이 그녀의 머리로 향하고, 남순은 가까스로 피하지만 그녀가 쓰고 있던 패랭이가 날아간다. 폭풍처럼 휘몰아쳤던 둘의 첫 출수가 서로를 당황케 했을까, 둘은 잠시 검을 멈추고 서로를 바라본다.
숨을 고르고, 서로를 향해 원을 그리는 둘의 몸사위는 마치 일초를 준비하는 고수 같기도 하고, 아니면 구애의 춤을 추는 극락조처럼 보이기도 한다. 섣불리 검을 내지르지 못하는 대치 상황 속, 둘의 호흡은 점점 고조되고, 슬픈 눈의 검이 아주 천천히 남순의 검과 맞닿는다. 공격을 위함이 아니다. 그는 칼날과 함께 아주 가까이서 남순의 눈을 들여다본다. 남순은 그가 사정거리 안에 들어왔다, 다시 사라질 때까지 그를 공격하지 못한다. 칼날이 떨어지고, 두 번째 공격이 시작된다.
두 번째 출수는 더욱 서로의 몸이 가까운 상태에서 이루어진다. 날은 몇 번 부딪히지 않고, 남순은 슬픈 눈의 검을 막아낸다. 둘은 교착된 상태에서 몸을 끌어당겨 서로를 바라보며 빙글빙글 돈다. 그리고 서로를 안고 넘어지는 남순과 슬픈 눈. 숨이 차오른 남순은 그를 쳐내지만, 슬픈 눈은 허공을 차고 치솟아 올라 보름달을 등에 지고, 이내 그녀와 자신 사이 공간 자체를 벨 기세로 칼을 휘둘러 그녀를 향해 쇄도해 내려온다. 그의 검이 남순의 저고리 앞섬을 자르고, 그녀가 허둥지둥하는 사이, 당황한 기색이 여력한 그는 눈 앞에서 사라진다.
남순(하지원), 〈형사 DUELIST〉 [출처: 씨네21]
남순과 슬픈 눈의 두 번째 검투는 슬픈 눈에게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남순이 술이 잔뜩 취해 그를 찾아와 벌어진다. 남순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는 사연을 가진 슬픈 눈은 그녀의 술주정을 그대로 받아주지만, 결국 자신을 향한 순수한 분노를 받아들일 수 없어서일까, 아니면 그녀의 얼굴을 볼 면목이 없어서일지 자리를 뜨고, 무시당했다고 생각한 남순은 야시장 길바닥까지 그를 쫓아 나와 시비를 건다.
화를 참지 못하고 칼을 뽑는 슬픈 눈, 그에 응해 자신의 쌍단검을 꺼내는 남순. 이 번의 검투는 무용과 기교가 존재하지 않는다. 남순의 단검은 슬픈 눈의 목숨을 빼앗기 위해 흉흉하게 움직이는데, 오히려 둘의 검은 부딪히지 않고, 슬픈 눈은 그녀와 충돌을 피하기만 한다. 상대에게 말하지 못하는 비밀을 가진 남자와 그 비밀 때문에 상처 입은 여자의 싸움이다. 혀가, 말이, 검으로 대체된다. 그 순간의 감정에 취한 남순은 그를 향해 힐난하듯 칼을 찔러가지만, 그녀에게 이야기를 할 수 없기에 피하는 슬픈 눈의 칼은 부딪히지 않고 서로의 마음이 썩어갈 뿐이다.
결국 그녀를 멈추기 위해 칼을 뽑은 슬픈 눈. 그녀를 내동댕이치지만, 그의 표정에는 회한만이 남아있다. 그리고 드디어 상대에게 반응을 얻어낸 남순은 어느새 취기는 씻어버리고 신들린 듯이 그를 향해 날을 뿌린다. 첫 번째 검투와는 다르게, 둘의 움직임은 거칠고, 무언가에 쫓기듯이 빠르게 진행된다. 눈이 덮인 계단 가운데까지 이른 두 사람.
"말해봐, 말해보란 말이야. 네가 한 짓이 아니라고. 넌 잘못한 게 없다고 말해봐."
어느새 첫 번째 검투처럼 서로를 향해 원을 그리며 도는 두 검객.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 냉철함을 유지해왔던 슬픈 눈이 먼저 괴성을 지르며 그녀에게 달려든다. 첫 번째 검투에서 서로의 몸이 가장 가까웠던 그 순간과 같은 교착상태에 빠진 두 사람. 서로를 지울 때가 되었는데, 육체가 처음 사랑에 빠졌던 그 순간을 기억하고 있다.
슬픈 눈(강동원), 남순(하지원), 〈형사 DUELIST〉 [출처: 씨네21]
〈형사 DUELIST〉의 검투는 관능적이다. 만약 뛰어난 검객이 검을 몸의 일부처럼 다룰 수 있다면, 검의 부딪힘은 신체 일부가 부딪히고 있는 생리적인 현상이다. 슬픈 눈의 검이 천천히 남순의 검으로 다가와 부딪히는 순간, 이명세 감독이 영화의 검투에서 찾아낸 시청각적인 공명이 화면을 가득 채운다. 이는 어떠한 형이상학적인 의미라기보다는, 두 인간이 목숨을 걸고 치열한 공방을 겨루는 모양새와 그 칼날이 부딪히며 내는 불협화음, 그럼에도 빛을 반사해 번뜩이는 칼날의 치명적인 매력이, 막 사랑에 빠진 남녀 간 몸짓의 서투름, 조바심, 위기감, 마치 나비가 뱃속을 날아다니는 기분과 같은 설렘과 맞닿아있는 지점으로 관객을 끌어당기는 손짓이다.
이 작품의 서사에 대한 대중들의 박한 평가와는 관계없이, 두 주연배우는 긴 시간이 지난 후에도 여러 인터뷰를 통해 이 영화를 통해 연기에 대한 재미를 깨달았다고 고백하고, 깊은 애정을 표한다. 영화배우들에게 무용가와 같은 몸짓에서 나오는 연기를 요구하고, 그 아름다움을 백분 살리는 촬영을 감상하다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그들이 이 영화에 가진 애착이 이해가 된다.
한편 화면을 수놓는 색채는 또 어떤가. 개봉한 지 15년이 넘은 지금도 한국 영화에서 〈형사 DUELIST〉를 뛰어넘는 색감이 다시 나온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화면은 호화로운 색으로 가득 차 있다. DVD 출시를 위하여 추가 보정까지 했을 정도로 색표현에 공을 들였기에, 돌담길을 드리운 검은 그림자 장막 안에서 움직이는 검객들의 몸짓도, 완전히 암전된 환상의 공간에서 검은 의복을 입고 검무를 추는 슬픈 눈의 춤선 또한 화면을 생동감으로 채운다.
〈형사 DUELIST〉는 이렇게 닿아있다고 생각하지 못하는 개념들을 잇는 시청각적인 운율로 빈틈없이 채워져 있다. 시장 바닥의 추격전을 보면서 어째서인지 공 하나를 쫓아 전속력으로 질주하는 럭비를, 또는 신나게 아이들이 달려가는 퍼레이드를 떠올리게 만든다. 고전영화의 한껏 오버스러운 시시껄렁한 인물상을 보여주는 남순과, 고풍스러운 무협지의 냉혈한 자객을 연기하던 슬픈 눈이, 어느 순간 21세기 멜로 영화의 표정으로 바뀌는 순간은 왠지 둘만이 가진 비밀스러운 시간을 엿보고 있는 느낌이 든다. 세 번에 걸친 둘의 검투는 왠지 가슴을 원초적으로 두근거리게 만드는 남녀 간의 격렬한 육체적 애정관계가, 또는 상대에 대한 열정이 숨소리까지 스며드는 탱고가 연상된다.
이명세 감독, 〈형사 DUELIST〉 [출처: 씨네21]
이러한 시도가 모든 관객에게 온전히 받아들여지기를 바람은 작가의 기만일 수도 있다. 하지만 〈형사 DUELIST〉는 영화에서만 가능한 시청각적인 리듬으로 서사적 개연성을 대신하고 있으며, 관객이 서사의 얼개를 이해하는 방법론 자체에 도전하고 있다. 감독이 표현할 수 있었던 모든 몸짓과 소리, 편집 호흡, 화면 전환 효과를 사용하여 영화적 리듬으로 채워 넣은 이 작품에는 통속적 의미의 개연성이 들어갈 공간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다.
『씨네21』과의 인터뷰에서 이명세 감독은 플롯과 내러티브를 구분해서 이야기하는데, 여기서 그는 플롯을 어떤 논리적 인과 관계가 존재하는 이성의 영역, 내러티브를 시청각적 스토리텔링으로 사용하고 있는 듯하다. 강동원 배우를 일컬어 우스갯소리로 그의 얼굴이 개연성, 만화를 찢고 나온 남자라는 이야기를 하는 관객들이 있는데, 전작부터 만화적 상상력을 영화에 적극적으로 가져온 이명세 감독이 강동원을 캐스팅한 이유가 어찌 보면 플롯을 버리고, 내러티브에 집중하기 위한 장치였다고 생각해 본다면, 배우를 향한 농담은 생각보다 진실에 가까이 위치해 있을 수도 있다.
슬픈 눈을 향한 남순의 감정을 만약 외형적 묘사가 없는 텍스트, 즉 플롯으로만 이해한다면 〈형사 DUELIST〉는 쉽사리 받아들이기 힘들리라. 하지만 영화의 리듬을 구성하는 모든 요소, 편집, 화면 전환, 색, 미술, 조명, 배우의 외모, 몸짓이 모두 총합이 되었을 때, 너무나 꽉 채워져서 오히려 오디오-비주얼 과잉에 가까워진 이 영화의 내러티브가 미약하다 판단할 수도 없는 일이다.
이명세 감독은 매번 자신의 작품을 통해 치열하게 영화를 매체(미디엄)적인 시점에서 무엇으로 채워야 하나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답변을 제시하고 있다. 어차피 정답이 있는 질문이 아니기에 그 답은 평가보다는 경험을 요구하지만, 같은 질문을 던지고 답을 내놓고 있는 여타 감독들과 (고다르라던가, 맬릭이라던가) 이명세가 다르게 느껴지는 이유는 그가 내놓는 답이 몹시 말초적(visceral)이라서가 아닐까 싶다. 곰곰이 생각해보면, 개별적 리듬의 요소가 서로의 경계를 허물고, 상호작용을 하면서 관객에게 공감각적 경험을 제공하는 순간의 희열이 현학적 일리가 없다.
부재의 질감
니노치카(그레타 가르보), 레옹 백작(멜빈 더글러스), 〈니노치카〉(1939) [출처: YouTube]
에른스트 루비치 감독의 〈니노치카〉(1939)에서는 무척 인상 깊은 유머가 나온다. 주인공 레옹 백작(멜빈 더글러스)은 식당에 앉아있는 냉정한 여성 요원 니노치카(그레타 가르보)를 유혹하기 위해 그녀에게 농담을 들려준다.
제가 이 우스갯소리를 처음 들었을 때 너무 웃겨서 배가 아플 정도였죠. 준비됐나요? 한 남자가 식당에 들어옵니다. 테이블에 앉더니 말합니다. '웨이터, 크림이 들어 있지 않은 커피 한잔 주시오.' 5분이 지나고, 웨이터가 남자에게 돌아와서는 말하죠. '손님, 죄송하지만 크림이 떨어졌는데, 혹시 우유가 들어 있지 않은 커피라도 괜찮을까요?'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은 IQ2(Intelligence Squared) 컨퍼런스에서 이 유머를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제 생각에는 이것이 완벽한 정답이라고 생각합니다. 크림이 들어 있지 않은 커피와 우유가 들어 있지 않은 커피는 동일한 존재가 아닙니다. 당신이 받지 않는 것은 당신이 받는 것의 일부이기 때문이죠.
이 논리를 극한으로 끌고 간다면 이중부정(double negation)도 포함하게 되는데, 만약 당신이 크림이나 우유가 들어 있지 않은 커피를 마시지 않는다면, 결과는 0이 아니게 됩니다. 대중문화에서 볼 수 있는 다른 예시가 있는데, 90년대 초반에 이완 맥그리거가 제다이가 되기 전, 노동자 역할을 했던 영화인 <브래스드 오프 (1996)>에서 나온 장면입니다.
남자 주인공은 젊고 아름다운 여성과 데이트를 마치고 그녀를 집으로 배웅해줍니다. 여성은 입구에서 그에게 물어봅니다. "혹시 커피 마시러 들어오시겠어요?" 그는 대답합니다. "문제가 있는데, 저는 커피를 마시지 않아요." 여성은 미소를 지으며 받아칩니다. "문제없네요. 저도 커피 없어요."
제가 좋아하는 부분은 이러한 이중부정을 통해서 형성되는, 천박하지 않고, 투명하게 관능적인 초대입니다. 커피를 이유로 당신을 초대하겠어요. 그 후, 커피를 부정하였지만, 결과는 0이 아닙니다. 결과는 순수한 초대지요.
글로리아 멀린스(타라 피츠제랄드), 앤디 배로우(이완 맥그리거), 〈브래스드 오프〉(1996) [출처: YouTube]
이 이야기를 하이데거 철학 맛보기처럼 제시한 지젝의 해석까지 들어 구구절절 설명한 이유는, 리듬은 소리로 채워진 부분과 비어있는 부분이 동일한 비중의 역할을 하기 때문이라는, 어쩌면 당연한 주장을 하고 싶어서이다. 정규 교과과정에도 포함되어 있기에 우리에게 가장 익숙한 국악 리듬인 굿거리장단은 '덩기덕 쿵더러러러'로 표현이 되는데, 심지어 이 장단을 문자로만 읽어도 우리는 첫 '덩'과 '기덕' 사이의 미묘한 공간, 그리고 '쿵' 이후 따라오는 '더러러러' 사이 기민하게 자리 잡고 있는 빈 공간들을 모두 인지할 수 있다. 이 공간을 무엇이라고 설명해야 할까- 기다림일 수도, 의도적인 미적거림일 수도 있다.
영화의 러닝타임은 한정되어 있다. 때문에 숏과 숏 사이, 또는 숏 내 움직임에 무언가 비어있다고 느껴진다면, 이는 한정된 시간 안에, 어떠한 의미를 가지고 비워진, 질량이 존재하는 부재이다. 지젝의 말대로, 비워진 부분은 채워진 부분의 일부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부재의 질량을 느껴야지만 다가오는 영화 작품들이 있다.
오즈 야스지로, 그리고 그에게 영향을 받았다고 고백하는 대만 출신의 허우샤오셴 감독의 작품군에서는 영화적 리듬에서 부재의 질감을 실감 나게 경험할 수 있다. 극단적인 롱테이크, 그리고 혹시 편집상에서 실수가 있었나 싶을 정도로 일반적인 상식선에서는 이어지지 않는 숏들, 이 가운데 가령 서사적 개연성, 장면의 역할론 같은 전통적인 영화관으로는 비워져 있다고 판단할 수밖에 없는 공간들이 있다.
그리고 이 지점에서 허우샤오셴 감독의 영화에 관한 비평적 시도가 퍽 난감해진다. 비어있음에 대해서 해설을 한다는 행위 자체가 일종의 화사첨족처럼 느껴짐이 첫 번째 이유요, 우유가 들어 있지 않은 커피에서 우유의 부재는 크림의 부재로 대체되지 않으면 쉽게 느낄 수가 없기에 무언가 외부의 작품을 들이댔을때 수반되는 현학적 비교가 다소 우악스럽게 느껴짐이 두 번째 이유다.
허우샤오셴 감독의 〈자객 섭은낭〉(2015)이 처음 개봉했을 때, 작품에 관한 담론은 보통 4:3이라는 특이한 화면비율, 롱테이크, 흑백과 색채 화면의 전환 등 형식적인 면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하지만, 허우샤오셴 감독의 인터뷰를 찾아 읽어보면서 이러한 형식은 부수적인 개념이 아닌가 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영화를 보다가 초반의 흑백 화면에서 문득 수묵화의 빈 공간 같은 이미지가 연상이 되었고, 영화를 경험하면서, 부재가 가진 의미를 생각해보았다. 부재는 하나의 의미 이후, 다음 의미가 오기까지의 기다림이다. 부재는 또한 하나의 의미 이후, 다음 의미가 오기 전까지 첫 번째 의미의 잔향이기도 하다.
생텍쥐페리의 『어린 왕자』 중 사막여우가 이야기하는 불멸의 대사가 떠올랐다. "만약 오후 4시에 네가 온다면, 나는 3시부터 행복해지기 시작할 거야." 허우샤오셴 감독의 영화는 관객을 사막여우가 이야기하는 3시부터 4시 사이 빈 공간으로 이동시켜준다. 그가 원하는 장소인지는 모르겠지만, 생텍쥐페리가 동화적 상상력으로 가장 우아하게 설명해낸 이 비어있는, 가슴 뛰는 공간이 〈자객 섭은낭〉에 대한 이야기를 하기 가장 적합하다는 생각이 든다.
비움으로의 운율
섭은낭(서기), 〈자객 섭은낭〉 [출처: FILMGRAB]
〈자객 섭은낭〉은 중국의 고서인 『배형전기』에 포함된 8세기 중엽, 당나라 시대를 배경으로 한 단편 소설을 원작으로 연출된 영화이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당 조정은 변경 지역에 번진(藩鎭)을 설치해 외적을 막게 하고, 그 지휘관인 절도사에게 외부의 위협을 막을 수 있도록 어느 정도의 자치권을 주었는데, 2세기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들의 권력이 커지면서 조정을 위협하게 되었으며, 그중 위박 번진이 가장 강대해 독립을 주장하고 있었다고 짧게 설명한다.
실제 역사적으로도 절도사들은 군사권, 통치권, 외교권을 모두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유럽에서도 존재했던 변경지역의 군주인 변경백(Margrave)과도 비슷한 형태였다. 외부의 침입이 잦은 국경지대의 봉건 귀족들은, 외침이 있을 때마다 중앙 정부와의 기동성 있는 상의가 불가능했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준의 자치적 판단을 내리는 권력이 인정되었다. 때문에 명목상으로는 백작이라는 신분을 가지고 있지만, 변경백들은 공작이나 후작이 각자의 봉토에서 누리는 권력보다 더 큰 권력을 누리는 경우가 잦았다.
영화는 스승이 내리는 암살 임무를 맡은 섭은낭의 절정에 다다른 검 솜씨와, 어린아이를 보고 마음이 흔들려 임무를 포기하는 모습을 연속으로 보여주며 시작된다. 이에 스승은 그녀의 결심을 시험하려는 목적으로, 은낭을 고향인 위박으로 보내 그녀의 사촌이자 위박의 절도사로 조정을 위협하는 전계안의 암살을 명령한다. 고향에 돌아간 은낭은 13년 만에 어머니와 재회하고, 그녀와의 대화를 통해, 은낭의 스승은 황실 출신이었으나 출가한 가신공주이며, 그녀의 쌍둥이인 가성공주가 전계안의 계모였음이 밝혀진다. 가성공주는 양아들인 전계안과 남편의 조카인 은낭을 정혼시키지만, 얼마 후 정치적 상황이 변동하면서 둘의 약혼 관계를 파하고, 전계안을 다른 유력 가문의 딸과 정략결혼하도록 조치한다. 은낭이 이에 크게 고통스러워하자, 가성공주는 미안한 마음에 출가한 자신의 쌍둥이 여동생, 가신공주에게 어린 은낭을 위탁한다.
13년 만에 돌아온 위박- 가성공주는 이미 세상을 떠나고 없었고, 옛 정혼자이자 암살 임무의 목표 대상인 전계안은 조정을 호시탐탐 노리는 야망 넘치는 절도사의 모습과, 자식을 아끼는 친절한 아버지, 그리고 정부인 외의 첩에게 애정을 보이는 권력자의 모습을 동시에 보여주고 있었다. 은낭은 13년간 떨어져 자랐던 부모와의 재회, 그리고 한 때 사랑했던 정혼자를 다시 만나면서 자객이 아닌 한 명의 인간 섭은낭이 어떠한 사람인지 되묻는다.
전계안(장첸), 〈자객 섭은낭〉 [출처: FILMGRAB]
〈자객 섭은낭〉을 처음 관람하게 되면 이러한 서사적 흐름이나 등장인물 간 관계, 심지어는 인물의 감정선이 한눈에 쉬이 들어오지는 않는다. 이는 은낭은 어떠한 경지에 오른 자신의 검술을 보여주기보다는, 어떠한 결정을 내리기 전 머뭇거리거나, 기다리거나, 관찰을 하며 영화의 대부분을 보내기 때문이다.
영화가 시작된 후 나오는 은낭의 두 번째 임무에서 카메라는 숨어 있는 은낭을 보여주기 전, 길게 그녀의 암살 목표 상대가 아들과 놀아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나른한 오후에 아들과 함께 잠이 들어 버린 남자. 은낭은 그에게 다가가지만 차마 칼을 휘두르지 못한다. 은낭은 머뭇거리고, 인기척에 암살의 대상은 눈을 뜨자마자 아이를 보호한다. 호위를 부르는 암살 대상을 뒤로하고 은낭은 그 자리에서 도망간다.
그런데 위박으로 돌아간 후 오밤중에 전계안을 찾아간 은낭은 사뭇 다른 모습을 보인다. 첩과 함께 있는 전계안의 궁을 가리는, 바람에 은은하게 움직이는 휘장 뒤에 서서 기다린다. 그리고 전계안에게 발각되자 자리를 뜬다. 그녀를 쫓아온 전계안은 검을 뽑고 출수를 해 공격을 뿌려나가지만, 은낭은 그의 공격을 흘려내기만 할 뿐, 전계안을 공격하지 않는다. 암살을 하러 갔다가, 암살 대상이 자신을 추적해 온 이상적인 상황에서 그를 공격하지도 않고, 방어만 할 뿐이다. 여기서 은낭의 모습은 머뭇거림이라기보다는, 단호한 거절에 가깝다. 그렇다고 이 거절이 어떠한 행동으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은낭은 계속 망설이면서 전계안을 관찰하고, 전계안을 둘러싼 주위의 정치 상황을 관망한다.
섭은낭(서기), 〈자객 섭은낭〉 [출처: FILMGRAB]
〈자객 섭은낭〉을 보는 관객은 그래서 은낭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싶은가, 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다. 이영도 작가의 표현을 빌리자면, 마치 문지방에 서 있는 고양이 같은 상태로 거의 영화 내 대부분의 시간을 그녀는 결정을 내리지 않기로 결정(decisive indecision)하며 흘려보낸다. 검을 막아내지 않고 흘려내는 은낭의 검술조차도 비결정의 결정의 체화처럼 보인다. 이를 하이데거 사상에 비유해 세상에 피투(geworfenheit)되었던 은낭이 기투(entwurf)를 하는 방법이라고 이해함은 어쩌면 허우샤오셴 감독이 경계하는 현학적 해석이 아닐까 싶지만, 적어도 표면적으로 작품 서사의 논리구조를 이해하는 데는 도움이 될 수도 있다.
첫 번째로 실패한 임무는 은낭이 결정을 내리기 전, 타의에 의해 암살 임무가 수포로 돌아갔으나, 전계안에 대한 암살 임무는 은낭의 능동적인 결정으로 포기된다. 만약 이를 지젝의 커피 유머 해석을 통해 본다면, 은낭의 첫 번째 실패에서는 '대상을 암살할 수 없다'라는 명제가 제시되었는데, 두 번째 실패에서는 '대상을 암살하지 않겠다'라는 명제로 변화했다고 볼 수 있다. 대상이 암살당하지 않음으로 끝난 두 번의 실패 모두 동일한 결과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두 실패 사이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대상을 암살할 수 없었던 은낭은 스승에게 돌아가 자신의 운명을 그녀의 손에 맡기지만(피투), 대상을 암살하지 않기로 결정한 은낭은 스승에게 돌아가 짧은 검투를 통해 자신의 운명을 되찾아(기투) 돌아온다.
섭은낭(서기), 〈자객 섭은낭〉 [출처: FILMGRAB]
하지만, 〈자객 섭은낭〉에서 허우샤오셴 감독이 보여주고 싶었던 서사는 '피투와 기투의 종합인 인간 섭은낭'처럼 일차원적인 해석을 부르는 우화는 아니다. 오히려, 대상을 관찰하면서도 암살하지 않겠다 결정하면서, 그 비결정적인 시공간, 결정의 부재가 자아내는 불안, 또는 기대감이다. 물론 시청각적인 의미에서 이 공간은 비어있지 않다. 다만, 사건과 사건 중간, 인과관계 사이에 붕 뜬 허공이 느껴진다는 의미로, 허우샤오셴 감독은 이 서사적 간극을 삼라만상의 표현으로 채운다. 한가로이 여물을 씹는 나귀의 모습, 휘장을 움직이는 바람, 바람 소리, 빗소리, 결투하는 여인들을 둘러싼 벌레소리, 새소리, 첩첩산중을 자욱하게 채운 안개.
〈자객 섭은낭〉을 보면서 개인적으로 떠오르는 기호는 바람과 빛인데, 영화가 '풍경(風景)' 묘사에 집중하고 있음을 짚고 넘어가고 싶다. 바람 풍, 볕 경자를 조합한 이 단어는 가만히 들여다보면, 우리가 직관적으로 경험할 수 없는 가치 두 가지를 이야기하고 있다. 바람을 자체적으로 화면에 담아낼 수는 없다. 우리는 바람이 무언가와 작용하고 있을 때 그 존재를 간접적으로 느낀다. 너풀거리는 휘장, 흔들리는 풀잎, 나뭇가지, 천천히 움직이는 구름과도 같은 안개. 볕, 즉 햇살 또한 직접적으로 느낄 수 없다. 우리는 조도와 명암, 즉 볕의 강도 또는 부재를 통해 존재를 간접적으로 확인하게 된다. 풍경이라는 단어 자체는 바람과 빛이 작용을 미치는 자연 관경을 의미함을 상기해보면 몹시 기묘한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허우샤오셴 감독, 〈자객 섭은낭〉 [출처: FILMGRAB]
〈자객 섭은낭〉은 의미로 채워진 기호적 이미지에 대한 도전장과도 같다. 현대의 영화는, 창작적인 면에서도, 소비적인 면에서도 관념적 의미가 과잉되고 있다. 관객은 영화가 끝나고 영화의 기호적 해석을 위한 비평을 찾아가며, 이는 어떠한 성질("XX성")로 환원되어 표현되고는 한다. 거의 의미에 대한 중독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영화에 대한 해석이 몹시 당연해진 현대의 관객은 이러한 과잉을 느끼기 힘들다.
허우샤오셴 감독은 의미로 창작되고 소비되는 영화를 경계하고 있다. 영화관을 나오는 관객이 살아가는 매일의 세계는 의미나 운율로 가득 채워져 있지 않다. 기다림, 망설임, 삼라만상의 표현, 풍경으로 비워낸 <자객 섭은낭>은 그 빈 공간에서 불어오는 바람으로 인해 스산하게 일렁이는 내면 자체를 느껴보기를 주문한다.
마침
아르키메데스는 물이 가득 채워진 목욕탕에 들어가, 넘치는 물을 보고 부피와 무게의 법칙을 깨달았다고 한다. 달리 보자면, 살아가면서 느끼기 어려운 자신이 차지하고 있는 만큼의 부피가, 가득 채워진 물이 흘러넘치면서 계량이 가능한 형태로 현상화되는 과정의 체험이다. 만약 〈형사 DUELIST〉가 시청각적인 운율로 과잉되어 흘러내리는 물을 통해 영화적 운율을 표현했다면, 〈자객 섭은낭〉은 비어있는 욕탕에 들어가 그 공허감, 물의 부재를 통한 영화적 운율, 혹은 그 사이의 간격을 감각화한다.
영화라는 매체를 통해서만 자아낼 수 있는 감상을 목표하고 있기에, 이 작품들은 작품이 다루는 역사와 시대를 가장 감각적으로 경험하는 체험의 장으로 완성된다.
(끝)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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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in, E. (2020, November 2). This Side of. The Criterion Collection. https://www.criterion.com/current/posts/7170-this-side-of
Neil Gaiman and Kazuo Ishiguro. (2015, June 4). “Let’s talk about genre”: Neil Gaiman and Kazuo Ishiguro in conversation. NewStatesman. https://www.newstatesman.com/2015/05/neil-gaiman-kazuo-ishiguro-interview-literature-genre-machines-can-toil-they-can-t-imagine
정한석. (2005, November 14). 이명세의 <형사 Duelist>. 씨네21. http://www.cine21.com/news/view/?mag_id=3344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