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와 감독의 전 작품들에 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오지만디아스
K(라이언 고슬링),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출처: FILMGRAB]
드니 빌뇌브 감독의 〈블레이드 러너 2049〉(2017)에서, 주인공 K(라이언 고슬링)는 자신의 기억의 단서를 따라, 핵폭탄 낙진으로 인하여 폐허가 된 라스베이거스의 사막을 찾아간다. 모래 알과 먼지가 태양을 붉은빛으로 반사해 물든 황야에서 K는 풍화되어 파괴된 거대한 석상의 머리를 마주한다. 관객은 이 장면에서 불현듯, 〈블레이드 러너〉의 세계관에 큰 영향을 미쳤다고 짐작할 수밖에 없는 『프랑켄슈타인』의 저자 메리 셸리의 남편이자, 자신도 위대한 낭만주의 시인에 꼽히는 퍼시 비시 셸리의 소네트, 「오지만디아스」(1818)를 떠올린다.
「오지만디아스」(1818)
- 퍼시 비시 셸리
태고의 땅에서 온 여행자와 만난 적이 있는데,
그가 말하기를, 거대한 석조 두 다리가 몸통 없이
사막에 서 있었네. 가까이, 모래밭 위에,
부서진 두상이 반쯤 잠겨서, 찌푸린 표정 사이,
주름진 입술에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채,
그를 만들어낸 조각가의 열정의 일부가
죽어 있는 돌덩이 가운데서도 살아남아있어
그를 깎아낸 손과, 부어낸 마음이 느껴지더라.
그리고 주춧대에 다음과 같은 말이 적혀 있었다.
"내 이름은 오지만디아스, 왕 중의 왕이니.
짐의 업적을 보라, 위대한 이여, 그리고 절망하라!"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네. 부식되어 닳아버린 채
무너진 거상 곁에는, 끝없이 외롭게 펼쳐진
외롭고 한결같은 모래만 남아있을 뿐이네.
퍼시 비시 셸리와 함께 또 다른 낭만주의 사조의 거장으로 여겨지는 존 키츠의 시가 보르헤스에게 영감을 주거나, 댄 시먼스의 위대한 SF 소설, 『하이페리온』 칸토스의 탄생에 직접적 영향을 끼쳤듯이, 「오지만디아스」 또한 시인성 넘치는 시상을 통해 현대에 와서도 다양한 작품에서 변주되고 있다. 이미지 자체를 차용한 〈블레이드 러너 2049〉 뿐만이 아니라, 〈브레이킹 배드〉의 시즌 5, 14화 〈오지만디아스〉는 〈루퍼〉(2012)와 〈나이브즈 아웃〉(2019)으로 유명한 라이언 존슨 감독의 연출로 미국 TV 드라마 역사상 최고의 에피소드를 논할 때 가장 자주 언급되기도 한다. 한편, 리들리 스콧 감독의 〈에일리언: 커버넌트〉(2017)에서는 마이클 패스벤더가 연기한 안드로이드 데이비드에 의해 직접 낭송된 후, 원작자의 이름을 또 다른 낭만주의 시인인 조지 고든 바이런으로 이야기하는 그의 모습을 통해 그의 정신 상태에 대한 단서로 제공된 적도 있다.
물론, 「오지만디아스」 시 자체가 짧은 내용 안에서도 한 편의 화폭이 펼쳐지거나, 영화를 본 듯한 풍부한 표현성을 담고 있기는 하나, 시인이 차용한 키워드인 끝없는 사막 한가운데 덩그러니 놓인 파괴된 석상에 대해 잠시 고민해보자. 시를 읽은 이들 중, 이 장면을 실제로 본 사람은 거의 없겠지만, 이 장면 자체는 몹시 친숙하게 다가온다.
K(라이언 고슬링), 〈블레이드 러너 2049〉(2017) [출처: YouTube@WarnerBrosPictures]
현대인들의 입장에서는 어린 시절 읽은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에서 이집트, 피라미드, 스핑크스 항목에 첨부된 자료 사진에서 기인하였거나, 아니면 미술사 서적에서 시선을 강탈한 조르조 데 키리코의 쓸쓸한 작품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이 처음 발표된 19세기 초에도, 태어나서 사막이라고는 보지도 못했던 유럽 독자들에게 구가한 인기를 상기해본다면, "사막"이라는 배경 자체가 어떠한 상징성을 가지고 있으며, 장소 이상, 성격을 지닌 인물에 가깝게 기능하고 있다고 가정할 수 있다. 그리고 굳이 이 인물에게 이름을 붙여본다면, 사막을 의미하는 영단어 "desert"의 어원인 라틴어 "desertum", 즉 "버려진 장소"와 어울리는 "desolation (고적감)"이 아닐까 생각된다. 사막은 삶을 품을 수 없기 때문에, 쓸쓸할 수밖에 없다.
이는 서양문화사 전반을 지배하고 있는 유대-크리스천(Judeo-Christian)의 캐논, 성경에서부터 확인할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유대인들은 오랜 이집트 노예 생활을 청산하고 고향으로 돌아가는데, 시나이의 광야를 지나는 사막행이 조명된다. 이 힘겨운 여정은 야훼가 자신의 백성을 보호하기 위해 내린 구름 기둥과 불기둥, 그리고 만나라는 신의 양식을 통해 견딜 수 있게 되고, 긴 여정의 끝에는 약속의 땅 가나안이 기다리고 있다.
성경의 히어로인 예수의 삶은 그의 제자들이 쓴 복음서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데, 그가 세상에 나가기 전 청년 시절 일화 중 가장 유명한 내용이 바로 40일 동안 광야에서 금식을 하며 사탄의 유혹을 거절한 일이다. 예수는 구약 신명기의 구절을 들어 사탄의 3가지 유혹을 물리치는데, 신명기의 내용이 출애굽기에서 시작된 약속의 땅을 향한 여정의 마지막 부분이란 점을 떠올려본다면, 예수의 광야행 또한 어떠한 약속(인류의 구원)을 향한 여정으로 묘사되고 있음을 깨닫는다.
다시 말하면, 사막은 인간이 오랫동안 살아갈만한 장소가 아니다. 사막은 여정의 중간이자, 관문, 진행 과정, 통과 의례이다. 사막에 머무는 이들에게는 죽음의 기운이 잠식된다. 프리드리히 니체는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의 종장에서 "사막은 자라고 있다"라고 말하며, "사막을 간직하고 있는 자에게 화 있을 지어다"라고 저주를 한다. 그가 말하는 사막은 지리적 사막이 아니라, 현대 문명을 사로잡은 니힐리즘이며, 사자가 되어 사막의 딸들을 향해 울부짖어야 한다 주문하고 있다. 가치적으로는 성경과 정반대의 입장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만한 니체의 경전에서도 사막은 이겨내야 할 무기력함을 상징하고 있다.
죽음을 상징하던 사막은 20세기에 와서 영화 매체를 통해 새로운 의미를 입게 되었는데, 데이비드 린의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나, 존 포드의 서부극 시리즈를 통해 사막 자체의 이질적인 시각적 아름다움을 담아내는, 어떠한 유미주의의 대상으로 사용되었다.
데이비드 린 감독, 〈아라비아의 로렌스〉(1962) [출처: FILMGRAB]
[주. 이에 관하여는 유운성 평론가의 「사막은 보이지 않는다: 조지 밀러의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4)」에서 종합적으로 논의된 적이 있어서 자세한 설명은 생략한다.]
하지만 할리우드가 사막을 오롯이 말초적 유희를 위해 사용했다고 하기에는 의도에 다분히 의심스러운 구석이 있다. 흔히 황금기라고 불리는 1910년대-60년대의 할리우드의 초창기 영화들에서 미국의 프런티어를 대표하는 시각 장치로 사용된 황야는, 인간(미국인)의 위대한 개척정신을 조명하기 위한 무대로 사용되고 있다. 엄밀히 말하자면 모래밭인 사막과 단단한 땅을 가진 서부의 황야는 다르지만, 유대-크리스천 기반이 단단한 미국에 실제 존재하는 황야가, 영화라는 매체 내에서 미국인들이 가지지 못한 건국신화의 인조적 창조를 위해 출애굽기의 시나이에 대응하여 사용되었다고 가정해본다면 너무 큰 비약일까.
만약 루이스 클라크 탐험, 또는 서부로 향하던 역마차들이 미국의 출애굽기이며, 화창한 날씨와 금광이 기다리던 캘리포니아가 미국의 가나안이라면, 할리우드 초창기의 서부와 황야는 지극히 자기 도착적인 배경으로 보인다. 더욱이나 풍경의 사용법이 시각적 이질감을 통하여 대자연의 위대함을 담아낸 후, 그러한 자연마저 정복해가는 (개척-미국적) 인간 찬가의 장치라고 해석해본다면, 감정 과잉에 낯이 뜨겁다가도, 아메리칸드림이라는 키워드로 대표되는, 미국스럽다고 설명할 수밖에 없는 무한한 긍정적 가치에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거스를 수 없는 죽음을 상징해왔던 사막이 삶의 위대함을 부각하기 위한 무대 장치로 축소되어 버렸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부터, 영화 외적으로는 환경과 기후변화에 대한 논의가 심화되면서 지구의 사막화, 그리고 가속화가 인간 개입의 요인이 있음이 대두되었고, 영화 내적으로는 황야를 기반으로 하던 서부극이 점점 인기를 잃어가면서 사막, 또는 황야를 무대로 한 작품들이 자리를 설 곳을 잃어갔다.
맥스(톰 하디),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 [출처: FILMGRAB]
때문에 20세기 말, 21세기 초에 와서 사막과 황야의 풍광을 지속적으로 작품에 담아내고 전면에 배치하는 두 명의 감독, 사막을 가로지르는 속도에 있어서는 상극에 위치해있는 조지 밀러와 드니 빌뇌브가 미국인이 아니라는 공통점은 특기할만하다. 《매드 맥스 시리즈》로 유명해진 밀러 감독이 평생을 꿈꿔왔던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황야를 화면에 담아낸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2015), 그리고 〈시카리오: 암살자들의 도시〉(2015),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사막이 간직한 인간의 자만을 여실히 드러낸 빌뇌브 감독의 〈듄〉(2021)은 반대편에서 구원이 기다리고 있는 성서적 사막을 여실히 따라가다가 마지막 순간 전복시키거나, 그를 정복하려 하는 인간의 우매함을 꼬집는다.
이는 밀러와 빌뇌브 감독(빌뇌브 감독의 경우는 프랭크 허버트의 원작 구상 의도를 충실히 따라) 모두 〈… 분노의 도로〉와 〈듄〉의 구상을 캐릭터에서 시작하지 않고, 배경에서 시작했다고 설명하는 여러 인터뷰에서도 여실히 드러난다. 배경이 서사의 기원이 되었기 때문에, 주변 환경을 정복하는 인간이 아니라, 주변 환경에 의해 조형되어가는 인물상을 담게 된다.
〈… 분노의 도로〉에서 "이 얼마나 끝내주는 날인가!"라고 외치는 눅스(니콜라스 홀트)의 환희에 찬 비명이 대중문화에서 전반적 공감을 얻은 이유는 단순히 광기 때문만은 아니리라. 관객은 재갈이 물린 채 맨몸으로 차 앞에 매달려 무력하게 앞을 바라만 봐야 하는 맥스(톰 하디)의 가련한 운명이나, 눅스와 워보이들의 기괴한 희열은 잠시 잊어버린 채, 화면을 수놓는 모래 폭풍의 아름다움에, 진심으로, 어이없게도, 홀리고 만다. 〈블레이드 러너 2049〉에서 붉게 물든 라스베이거스 사막의 끝에서, 이 세계관에서는 같은 무게의 보석보다도 비싼, 살아있는 동물인 벌과 마주한 K처럼, 안에서 근근이 살아가는 생명만큼이나 사방을 둘러싼 죽음의 고아한 기운에 경도된다.
조지 밀러의 불모지(Wasteland)
조지 밀러 감독, 〈매드 맥스〉(1979) [출처: FILMGRAB]
조지 밀러는 의대 시절 마지막 해에 참석한 필름 워크숍에서 영화 인생의 1막을 함께 할 제작자 바이런 케네디를 만나게 되고, 의대 졸업 후 레지던시까지 마치고 전공의로 근무하던 와중에 집필한 첫 번째 작품 〈매드 맥스〉(1979)를 약 30만 불에 불과한 예산으로 연출해 전 세계 박스오피스에서만 1억 불이 넘는 흥행을 기록한다. 기네스북에서 가장 흥행성이 높은 작품에 등극하기도 했던 이 작품은 감독 조지 밀러뿐만 아니라 주연 멜 깁슨을 순식간에 할리우드 최고의 스타의 위치에 올려놓기도 하였다.
〈꼬마 돼지 베이브〉(1995), 〈해피 피트〉(2006)와 같은 가족 영화로 진출해 오래된 팬들을 어안이 벙벙하게 만들었던 조지 밀러 감독이 30년 만에 돌아온 포스트 아포칼립스 액션 걸작 〈… 분노의 도로〉를 공개하며 전 세계 영화 팬들을 얼마나 흥분하게 만들었는지는 이미 너무나도 많이 논의되었고, 기술적, 미적 완성도에 대한 충격 또한 사용되지 않은 미사여구가 없을 정도로 진부하기에 굳이 이 글에서 다룰 필요는 없다 판단된다.
하지만 하나의 작품이 아니라, 감독의 커리어 전체를 보아도, 〈매드 맥스〉 1편부터 조지 밀러 감독은 자원이 고갈된 불모지(Wasteland)라는 시각적 단상과 끈끈한 관계를 맺고 있다. 비록 저자본이었기에 깨끗한 공도와 끝없이 펼쳐진 지평선만으로 현대 문명이 무너진 이후의 지구라고 우겨야 했지만, 첫 편의 가공할만한 흥행 성공 이후 정식 스튜디오 자본이 투입된 〈매드 맥스 2〉(1981), 〈매드 맥스 3〉(1985)에서는 세기말적인 분위기가 영화 전반을 지배하게 된다.
〈… 분노의 도로〉 개봉 즈음의 인터뷰에서 모든 영화에서 알레고리를 찾는다고 말한 조지 밀러의 성격상, 세기말을 표현하기 위해 전격적으로 차용된 황야가 오롯이 미적인 이유로만 선택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또한 《매드 맥스 시리즈》에서 문명이 붕괴하게 된 계기가 갑작스럽게 발발한 세계전쟁과 같은 거대한 재난이 아니라, 자원의 고갈로 이루어진 점진적 쇠퇴 이후의 핵전쟁이라는 점을 감안해 본다면, 추후 〈해피 피트〉와 같은 아동용 애니메이션 시리즈에서도 남극을 위협하고 있는 지구의 기후 변화 테마, 특히 전 지구를 위협하는 어류 감소를 스토리의 모티브에 적극적으로 수용한 그의 행보를 이해하기 쉬워진다.
다만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면, 받아들이는 사람마다 다를 수 있겠지만, 조지 밀러 감독이 〈해피 피트〉나 《매드 맥스 시리즈》를 통해 이야기하는 기후 변화와 환경의 파괴에 관한 메시지에는 묘하게 정치적인 논조가 결여되어 있다고 느껴진다. 2010년대 들어와 유명해진 영미권 신조어 "Virtue Signalling"은 자신의 도덕적 우월을 공공연하게 드러내기 위한 가식적인 미덕 과시를 의미하는데 (이 신조어의 생성 의도에 다분히 의심스러운 부분은 있을지언정) 조지 밀러의 작품 내에서 다루어지는 기후 변화에는 이러한 가식이 느껴지지 않는다.
러브레이스(로빈 윌리엄스), 〈해피 피트〉(2006) [출처: Fandom]
〈해피 피트〉의 등장 펭귄 중 바위뛰기펭귄인 러브레이스(로빈 윌리엄스)는 플라스틱 비닐로 만들어진 캔 홀더를 자랑스럽게 목걸이처럼 착용하고 등장하면서 이를 자신의 탈리스만이라고 이야기한다. 이 장면은 우스꽝스럽게 연출되었지만, 내셔널 지오그래픽이나 BBC 등 다큐멘터리에서 같은 플라스틱 홀더에 갇혀 기형적인 8자 형태로 성장한 거북이나, 목이 졸린 새들을 연상해본다면, 아이들에게는 호러에 가까운 연출일 수밖에 없다. 조지 밀러는 개봉 당시 이러한 결정에 대해 월스트리트 저널과의 인터뷰에서 "남극과 펭귄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저런 (플라스틱에 목이 졸린 펭귄) 연출을 해야만 한다"라는 요지의 답변을 했다.
냉소적인 이들에게는 표면적인 문맥 상 요즘 시대에 와서는 무조건 환경보호에 대해 이야기해야 한다는 미덕 과시(virtue signalling)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밀러 감독은 핍진성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보인다.
〈… 분노의 도로〉 개봉 이후, 조지 밀러 감독은 구글 사무실을 방문해 진행한 《Talks at Google》 인터뷰에서 한 구글 직원에게 〈해피 피트〉, 〈꼬마 돼지 베이브〉, 《매드 맥스 시리즈》와 같이 다양한 세계관을 구축할 때의 공통 공식이 있는지에 대한 질문을 받았다. 이 대답에서 밀러 감독의 영화관을 들여다볼 수 있는데, 그의 대답을 최대한 간단하게 요약해 보면 다음과 같다.
영화에서는 짧은 시간 내 관객에게 완전히 새로운 세계를 관철시켜야 한다. 때문에 설명을 할 시간도 부족하고, 설명 자체를 드라마틱하게 연출하기도 몹시 어렵다. 하지만 영화란 관객을 독특하면서도 친숙한 세계로 초대하는 과정이다. 내 경험상 독특함과 친숙함의 균형을 맞추는 방법은 영화의 내부 논리(internal logic)에 대한 엄격한 준수였다.
실제로 같은 인터뷰에서 밀러 감독은 〈… 분노의 도로〉의 미술 작업에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규칙을 만들었다고 한다.
영화 내 등장하는 물건들은 모두 발견된 물건을 재활용 및 용도 변환한 형태여야 한다 (Found objects, repurposed)
불모지라고 해서 아름다움이 결여될 필요는 없다 (Just because it's the wasteland, it doesn't mean people can't make beautiful things)
밀러 감독의 세계관의 사상에 기반해 그의 대답을 해석해 본다면, 〈해피 피트〉 세계관 내에는 실제 지구 상에 존재하는 펭귄종들이 등장하며, 현대의 남극을 기반하고 있기 때문에, 현대의 남극에 살고 있는 펭귄들이 겪고 있는 환경 파괴의 여파는 핍진성 강화라는 면에서 꼭 등장해야만 한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전작 마지막 부분에 다행히 비닐 탈리스만에서 해방된 러브레이스는 〈해피 피트 2〉에서는 예쁜 스웨터를 입고 재등장하는데, 이는 〈… 분노의 도로〉에서 정립된, 악조건에서도 미적 가치를 추구하는 인물(동물)들의 본능에 대한 증거로 이해가 가능하다.
때문에 밀러 감독의 불모지는 야누스와 같은 양면성을 드러낸다. 《매드 맥스 시리즈》에서 그려지는 종말론적인 포스트 아포칼립스의 모습은 어찌 본다면 그가 가진 인류의 미래에 대한 몹시 현실적인 예상이다. 밀러 감독이 추구하는 핍진성은 《매드 맥스 시리즈》의 포스트 아포칼립스에 일련의 담담함을 더하는데, 21세기에 일어나고 있는 기후 변화와 자원의 고갈에 대한 경고가 묘하게 결여되어 있다. 세상은 이렇게 사막화되어가며, 심지어 어쩔 수 없다는 태도처럼 보인다.
하지만 불모지에도 아름다움이 존재한다. 조지 밀러 감독의 사막에는 기이하고 변형적인 아름다움을 마주쳤을 때 우리가 느끼는 당혹감과 경외감이 가득 차 있다. 그리고 그가 불모지에서 찾아낸 아름다움에는 "일련의 구원(some kind of redemption)"이 숨어있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재림을 기다리는 사막
조지 밀러 감독,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출처: FILMGRAB]
〈… 분노의 도로〉의 서사는 '2시간의 추격극'이라고 요약할 수 있을 정도로 간결하게 보이지만, 실제로 영화가 시작되면 작품 내의 세계관의 짜임새가 전혀 간결하게 느껴지지 않는 묘한 감상이 든다.
황무지로 변한 지구에서 자신이 아끼던 모든 이들의 죽음을 겪고 목숨을 간신히 부지하며 살아가던 맥스 로카탄스키(톰 하디)는 이모탄 조(휴 키즈-번)라는 밀리터리-컬트 지도자가 이끄는 집단인 시타델의 워보이 군대에게 포로로 잡힌다. 식용수가 가장 귀한 자원인 지구에서 이모탄 조는 상상도 할 수 없는 양의 지하수가 숨어있는 요지를 확보하고, 공급을 조절함으로 주위의 주민들 위 폭군으로 군림한다.
이모탄 조는 석유 채굴 시설을 독점한 "식인종(존 하워드)", 무기 제조 시설을 독점한 "무기 농부(리처드 카터)"와 의형제를 맺고, 사령관인 임페라토르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에게 워보이의 지휘를 위임해 본인은 메시아와 같은 위치에 올라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다. 하지만 어린 시절 이모탄 조에게 납치당해 고향에서 떠나온 퓨리오사는 비밀리에 탈출을 노리고 있고, 시타델 최강의 트럭인 워리그(War Rig)를 운전할 기회가 오자 이모탄 조의 다섯 부인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갈 계획을 세워 작전을 감행한다.
퓨리오사의 배신이 확실해지자, 이모탄 조는 자신이 가장 아끼는 다섯 부인을 되찾기 위해 자신의 워보이 군대와 가능한 모든 차량을 동원해 추격을 시작한다. 시타델 추격대에는 시한부 인생의 끝이 다가오면서 시시한 병사가 아니라, 전장에서 영광스러운 죽음을 꿈꾸는 눅스(니콜라스 홀트)가 포함되어 있다. 눅스는 추격 작전 중 자신의 생존 가능성을 높이기 위해 포로로 시타델에 잡혀들어온 맥스를 차에 묶어 살아있는 수혈팩 삼아 추격대의 선두로 달려나간다.
밀러 감독이 《Talks at Google》 인터뷰에서 설명한 바에 따르면 〈… 분노의 도로〉의 첫 구상은 일단 달리면서 시작하고, 영화가 성립하기 위해 필요한 모든 구성요소(배경 설정, 인물, 스토리 등)를 달리면서 주워 담아 목적지에 도착할 수 있을까, 라는 상당히 추상적인 하이 콘셉트에서 시작했다. 끊임없이 이동하는 영화가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사고 실험이라고 하면 어울릴까. 또한 그는 본 작품을 설명하면서 작품을 구상하는 작업이 작곡과 유사하였고, 영화를 "시각화된 음악(visual music)"이라고 설명하기도 했다. 이는 음악처럼 2시간 내내, 끊임없이 흐르고 움직이는 본 영화를 묘사하는데 적합한 설명으로 보인다.
실제로 완성된 영화에서는 중간중간 멈추고 차량에서 내리는 장면들이 몇 씬 존재하지만, 기본적으로 영화는 2시간의 추격으로 구성되어 있다. 장시간 동안 한 곳에 머무르거나, 차량 밖에 오랫동안 나가 있는다면 죽음을 맞이한다. 이러한 설정은 사막을 배경으로 한 《매드 맥스 시리즈》 세계관과 어울리지만, 한편 바다를 배경으로 한 영화, 특히 같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설정에 기반한 케빈 코스트너 주연의 〈워터월드〉(1995)를 연상시킨다. 오랜 시간 동안 바다 위 한 지점에 머물러 있는 배는 좌초되었거나, 이미 모든 승객과 선원이 죽은 유령선일 뿐이다. 배 밖으로 나가는 선원은 잠시 동안은 수영으로 생존이 가능하겠지만, 조금만 시간이 길어져도 죽음 앞에 무력해진다.
밀러 감독이 사막을 바다처럼 대한다는 연출 해석은 인터뷰에서 차량 액션을 함대 전투, 특히 군함에 올라타는 해적들의 전술에서 영감을 받았다고 대답하거나, 퓨리오사가 시타델에서 탈취한 거대한 전투 트럭의 영문명인 "War Rig"는 군함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어 왔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이 관점에서 영화를 상징하는 장면 중 하나인 모래 태풍 씬은 거대한 해일과 해양 폭풍처럼 보이고, 모래 태풍 안에는 용오름과 같은 소용돌이가 요동친다. 시타델, 가스타운, 무기농장은 일종의 해적기지가 주둔해 있는 섬들로 해석이 가능하다.
조지 밀러 감독,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출처: FILMGRAB]
〈… 분노의 도로〉의 사막이 바다 없이 해적물을 만들기 위한 일종의 대역이라는 해석은 단순한 흥미요소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밀러 감독이 사막과 황무지를 대해 견지하는 시선을 포착할 수 있는 기회일 수도 있다.
밀러 감독에게 사막은 과거의 할리우드가 사막을 다루었던 형태인 인간의 생명력을 부각하기 위한 무대 장치가 아니다. 이곳은 실제로 죽음의 땅이며, 말세의 사막을 다룬 또 하나의 시인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의 「재림」(1920)에서 표현되어 있는 종말의 땅이다.
「재림」(1920)
- 윌리엄 버틀러 예이츠
넓게 퍼지는 소용돌이 속을 돌고 돌아
매는 매부리미의 말을 들을 수 없다;
사물이 산산이 부서져; 중심이 무너져 가네;
세상에는 단순한 난장판이 펼쳐지는데,
피로 물든 물결이 몰아쳐, 세상 모든 곳
순수함에 대한 존중은 물에 잠기고;
선한 이들은 믿음을 잃는데, 악한 이들은
강렬한 열정으로 가득 차 있구나.
(후략)
만약 《매드 맥스 시리즈》의 세계관 내에서 전 지구가 사막화가 되어 있고, 예이츠가 그려낸 시상처럼 한 세기의 종말을 의미한다면, 성경의 창세기에서 가장 유명한 사건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인간의 죄악과 끝없는 욕심으로 인해 전 세계가 모래로 뒤덮인 상태에서, 문명을 이어나갈 수 있는 이들을 태운 거대한 트럭이 생존을 위해 끝이 없이 펼쳐진 땅을 표류하는 모습은 지구를 홍수로 쓸어버리고, 유일하게 생존한 이들이 탑승한 노아의 방주와 몹시 닮아있다.
그렇다면 밀러 감독의 사막은, 예이츠의 「재림」 세계처럼, 인류 문명의 한 장이 끝을 맺고, 그곳에서 악착같이 생존해 남는 이들로 인해 시작되는 새로운 문명의 요람과도 같다. 마치, 창세기에서 새로운 문명을 위해서 노아와 가족들만을 남기고 자신이 창조한 지구의 모든 이들을 물로 쓸어버렸던 야훼와도 같이, 또는 새롭게 태어나기 위해서 완전히 산화하는 피닉스처럼, 죄악에 물든 현생 인류의 마지막을 그려내고 있다.
하지만 〈… 분노의 도로〉에 종말론적인 영화라는 환원적인 요약을 붙이기에는, 안에서 요동치는 생명력을 무시할 수 없다. 그리고 생명력은 아무리 시궁창 같은 상황과 사선을 넘나드는 상황에 몰려도, 내일이 존재하지 않고, 지구의 미래가 불투명하여도, 살아가는 동물과 같은 생존 본능에서 발현된다. 영화를 시작하는 맥스의 고백은 다음과 같다.
나는 산 자와 죽은 자 모두에게서 도망 다니면서, 시체 청소부에게 사냥당하며, 지켜내지 못한 이들에게 저주받고 있다. 그래서 이 불모지에서 간신히 목숨을 부지할 뿐이고. 마치 하나의 기능으로 축소된 단세포 생물처럼… 생존 본능만이 남았군.
이를 증명하듯이, 영화의 시작에서 보이는 맥스의 모습은 유인원, 또는 원시인을 연상시킨다. 길게 뭉쳐진 머리와, 덥수룩한 수염, 그리고 지나가는 두 머리 기형 도마뱀을 무심하게 생으로 뜯어먹는 모습. 영화 내내 맥스의 모든 행동은 생존과 직결되어 있다. 이기기 위해 싸운다는 감상이 아니라, 상대방이 나를 죽이기 전에 먼저 죽여야지만 살아남을 수 있기 때문에 내리는 결정만이 이어진다. 그는 내일이 나아지리라는 희망을 가지지 않는다. 맥스는 뒤틀린 낙원을 뒤로하고 "녹색의 땅"이라는 희망을 찾아 나섰다 이야기하는 퓨리오사에게 말한다.
희망은 실수야. 만약 부서진 것을 고치지 못한다면, 음, 미쳐버리거든.
종말의 세계에서 희망은 독이다. 실체가 없기에 존재하는 방향으로 가지도 못하고, 정답이 없기에 손에 쥐어도 가졌는지 모른다. 희망은 오늘을 넘기기 위한 마약일 뿐이다.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장식하는 문장은 《매드 맥스 시리즈》 세계관의 설정에 존재하고, 임모탄 조의 다섯 명의 아내들을 보살피던 미스 기디를 통해 존재가 암시되는 역사가들 '히스토리 맨', 그중에서도 가장 첫 번째 히스토리 맨의 칭호와 함께 전달된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이 황무지를 전전하는 가운데, 더욱 나은 삶을 찾기 위해 어디로 가는가?
히스토리 맨은 역사를 전달하는 이들이다. 부서진 지구의 마지막을 기록하고, 멸망의 역사를 잊지 말라 후대에게 전달하는 경고자들이다. 즉, 미래로 나아가기 위해 과거와 마주하기를 주문하고 있다. 재미있게도, 영화의 마지막에 나온 첫 번째 히스토리 맨의 질문은 이미 영화의 중간에 대답이 나와있다. 〈… 분노의 도로〉의 종점에서, 저 질문을 맞이한 관객들은 더욱 나은 삶을 찾기 위해 간 장소가 어딘지 이미 알고 있다. 바로 엄청난 양의 지하수가 저장되어 있는 시타델이다. 맥스는 실체가 없는 희망, 녹색 땅이 아니라 부서진 과거로의 회귀를 제안하고, 퓨리오사는 자신이 떠나온 과거를 향해 전속력으로 돌진한다.
퓨리오사(샤를리즈 테론),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 [출처: FILMGRAB]
거칠게 정리하자면, 〈… 분노의 도로〉는 이미 우리가 피할 수 없는 종말을 앞두고, 모호한 희망으로 내일을 기다리지 말고, 당장 지금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를, 처절한 생존본능에 바탕해, 우리의 손으로 되찾기를 주문하고 있다. 맥스와 퓨리오사가 찾아 나선 목적이 "희망"에 대비되는 "일련의 구원", 즉 "some kind of redemption"이고, 우리가 "구원"이라고 사용하는 해당 영단어의 어원이 라틴어 "redemptio", "되사다"라는 단어를 곱씹어 본다면, 이미 가지고 있었던 구체적인 개념을 수복한 결말이다.
예이츠의 「재림」은 다음과 같이 끝을 맺는다.
어둠이 다시 잠겨오네; 하지만 나는 이제는 알지
2천 년 동안 바위처럼 무겁게 짓누르던 잠이
흔들리는 요람 때문에 악몽에 시달리게 되었다고,
이제 어떤 거친 야수가, 마침내 자신의 시간이 되어,
천천히 베들레헴으로 나아가 탄생을 맞이하는가?
아일랜드의 전통 설화와 오컬트에 심취해 있던 예이츠는 1차 세계대전을 계기로, 인류가 2천 년 동안 사로잡혀왔던 기독교라는 미망에서 깨어나는 미래를 보았다. 〈매드 맥스: 분노의 도로〉와 「재림」은 인류가 처한 당장의 오늘과 내일이 지독하게 고약한 저주라는 인지와 이해에서 고개를 돌리지 않지만, 이를 통해 "야수"와 같은 본능이 깨어나 새로운 시대가 오기를 기대하고 있다. 시타델로 돌아가는 퓨리오사와 베들레헴으로 돌아가는 야수가 겹쳐 보이는 현상은 착시로 느껴지지 않는다.
우리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그들의 꿈의 진의는 의심하지 않더라도, 고도 100 km에 간신히 도달하는 백만장자의 몽상에 인류의 미래를 거는 행위는 위험한 희망으로 보인다. "인류"의 우리가 아니라 오늘의 "우리"가 살아남아야 할 장소는 이곳이다. 당연히 지구일 수밖에 없다. 우리를 집어삼키고, 악착같이 생존을 위해 달리지 않으면 죽음에 이르게 할 모래 태풍까지도 우리를 경외에 차오르게 하는 이 지구뿐이다.
드니 빌뇌브의 사구(Dune)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 〈듄〉(2021) [출처: Dune Official Site]
〈시카리오〉와 〈블레이드 러너 2049〉, 〈듄〉을 드니 빌뇌브 감독의 사막 3부작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듄〉(2021)의 개봉 전후로 빌뇌브 감독은 이 작품의 영상화가 필생의 숙원이었고, 청소년 시절부터 원작을 읽으며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왔다는 대답을 하고는 했다. 만약 사실이라면, 〈시카리오〉와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사막은 그가 상상해왔던 〈듄〉에 등장하는 아라키스의 전형(prototype)으로 접근해 볼 수 있다.
〈듄〉의 사막은 황량한 세계관을 상징하는 단서이자, 배경이고, 모래 사구 속에 살아가는 거대한 모래벌레(샤이 훌루드)는 주인공과 비등한 비중을 차지하는 주연에 가깝게 기능하고 있다. 모래벌레의 존재 의의는 듄 시리즈 전체를 관통하는 거대한 서사 도구지만, 적어도 프랭크 허버트가 집필한 원작 1편 『듄』(1965)과 빌뇌브 감독이 연출한 〈듄〉의 모래벌레는 인지를 초월하는 거대한 괴수일 뿐이다. 이는 빌뇌브 감독에게 사막이라는 장소에 거대한 괴수가 숨어 살고 있는 전설의 땅, 인간의 정복을 거부하는 오지라는 인식을 심어주지 않았을까, 라는 짐작으로 이어진다.
움베르토 에코는 『전설의 땅 이야기』(2013)에서 상상의 장소를 두 가지로 분류했다. 첫 번째는 실제로 존재한다고 믿어졌고, 그를 찾기 위해 수많은 탐험가를 사방팔방 오지로 끌어당긴 "전설"과 "신화"에 존재하는 배경, 즉, 엘도라도, 프레스터 존(사제왕 요한)의 왕국이 속하는 분류이다. 아서왕 전설에서 멀린이 증언한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던 잉글랜드는 첫 번째 분류에 속한다. 두 번째는 픽션 작품을 위해 만들어진 허구의 장소로, 수많은 독자들이 장소에 관한 몽상을 꿈꾸거나, 2차 창작을 할 정도로 애정을 드러내더라도, 마음속 깊이는 허구성에 대해 의심의 여지를 두지 않는 판타지아, 『피터 팬』의 네버랜드, 루이스 스티븐슨의 『보물섬』이 속하는 분류이다. 당연히 허버트의 아라키스는 두 번째 분류에 속한다.
그렇지만 많은 독자와 관객들이 동의하는 부분은 〈듄〉에서 그려지는 아라키스의 모습은 먼 미래에 대한 상상이 아니라, 먼 과거의 전설로 다가온다는 감상이다. 마치 16세기에 제작된 세계 지도 상, 미지의 지역에 "여기 용이 산다(Hic Sunt Dracones / Here be Dragons)"라는 라틴어 경구가 적혀있었듯이, 고비 사막을 가로지르던 여행자들이 거대한 모래 벌레, 몽골리안 데스웜을 보았노라고 두려움에 떨며 증언했듯이, 듄의 사막은 우리 현생 인류의 아득한 기억, 전설의 영역에 위치했을 법한 거대한 모래벌레를 품고 있다.
발견된 유물 중, 세계에서 3번째로 오래된 지구본 헌트-레녹스에 표기된 "여기 용이 산다(Hic Sunt Dracones)" [출처: Wikimedia Commons]
빌뇌브 감독은 자신의 청소년 시절을 상징하는 작품 중 하나가 프랭크 허버트가 쓴 『듄』의 원작이라고 여러 번 증언했는데, 정말 그렇다면 빌뇌브 감독이 자라나며 머릿속에 구상해온 사막에는 필연적으로 전설에 비견할 수 있는, 파괴의 화신과도 같은 거대한 괴수가 살아가고 있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시카리오〉에서 황야와 사막을 지난 케이트 메이서(에밀리 블런트) 앞에, 시우다드후아레스가 등장하자, 함께 차에 탑승해 있던 CIA 요원 맷 그레이버(조시 브롤린)가 "저기 보이는군, '짐승' 말이야! (There she is, the Beast!)"라고 묘사를 했던 이유가 이해되기 시작한다. 심지어 아쉽게도 너무나 일찍 작고한 요한 요한슨의 손에서 태어나, 영화 전체의 멱살을 끌고 가면서 이 장면의 긴장감을 극대화시키는 배경 음악의 제목이 대사와 같은 "The Beast"라는 점을 상기해 본다면, 여기서 빌뇌브 감독이 "짐승"의 이미지를 차용한 연출적 결정은 단순한 은유로 볼 수만은 없다. 오히려 『맥베스』의 종반부, 두 번째 마녀의 입을 통해 나오는 대사, "무언가 악한 것이 이 길로 오네(Something wicked this way comes)"가 불현듯 떠오르는, 시우다드후아레스를 실존하는 괴수 자체로 묘사하고 있다.
[주. 시우다드후아레스와 '짐승'의 연관성에 대해서는 〈시카리오〉를 직접적으로 논한 「대서사극, 경계에서」를 통해 다루었기에 본문에서는 넘어가도록 한다.]
또한, 「오지만디아스」의 시상, 또는 최근 〈그린 나이트〉(2021)에서 등장한 거인들이 연상되는 〈블레이드 러너 2049〉의 라스베이거스의 거대 석상 또한, 석상이라는 시각적 현실이 아니라 이미지의 실루엣만을 받아들여, 사막을 거니는 괴수들과, 아래를 천천히 지나가는 모험자로 대치해서 본다면, 빌뇌브 감독이 사막을 바라보는 시선에 어떠한 일관성이 느껴지기 시작한다.
〈듄〉을 읽던 소년이, 괴수를 품은 사막을 시각화하는 영화감독으로 자라났다고 짐작하면 과연 무리일까. 아라키스가 아닌 현대 미국-멕시코 국경의 황야에서, 또는 미래의 라스베이거스 사막에서 아라키스라는 환영을 쫓던 빌뇌브 감독에게 알레한드로 조도로프스키가 실패하고, 데이비드 린치가 버린 『듄』이 온전한 모습으로 손에 돌아왔다.
〈듄〉, 과대망상증이라는 괴수
차니(젠데이아),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 〈듄〉 [출처: Dune Official Site]
〈듄〉은 2020년 개봉을 목표로 제작이 되어 공개 준비를 끝내 놓고도, 코로나바이러스-19의 여파로 1년이나 개봉이 미루어졌다. 빌뇌브 감독이 착실히 쌓아놓은 연출에 대한 신뢰감, 2021년 현재 할리우드에서 가장 인기가 높은 배우들을 한 자리에 모아놓은 호화로운 캐스팅, 원작의 팬덤, 그리고 지난 영화사의 저주처럼 남은 지난 영화화들에 대한 비화, 그리고 일상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개봉 시기와 같은 영화 내-외적인 요소가 모두 뒤섞여, 〈듄〉은 스포트라이트를 가득 받고 간신히 개봉에 성공했다.
15살의 소년 폴 아트레이드(티모시 샬라메)는 어머니 제시카(레베카 페르구손)와 함께 아버지 레토 아트레이드 공작(오스카 아이작)을 따라 정든 고향을 떠나 사막 행성 아라키스로 이주한다. 아라키스는 전 우주에서 가장 중요한 자원으로 불리는 향신료이자 마약인 스파이스의 최대 생산지로, 레토 아트레이드는 스파이스 생산을 통해 가문의 부흥을 꿈꾸지만, 그의 아라키스 부임은 아트레이드 가문을 경계한 황제와 라이벌인 하코넨 가문의 합작 음모로 그는 도착한 지 얼마 안돼 암살당하고 만다. 폴과 제시카는 자신들을 쫓는 추격대에게 벗어나기 위해 아라키스의 원주민인 프레멘이라는 부족이 살고 있는 사막으로 도망가고, 그곳에서 아버지의 복수를 위해 힘을 기르기 시작한다.
폴의 어머니 제시카는 베네 게세리트라는 전우주적인 여성 종교집단의 일원으로, 어린 시절부터 아들 폴에게 베네 게세리트의 교육을 시켜왔는데, 폴은 사막에서 대량의 스파이스를 강제로 흡입하고 미래에 대한 예지력을 얻게 되면서 일종의 초인으로 각성한다. 폴은 지극히 인간적인 아버지와 가문의 복수라는 이유로 움직이지만, 본인의 복수가 성공하는 순간, 자신이 종교적 지도자가 되고 본인을 따르는 수많은 추종자들이 전 우주를 무대로 한 지하드, 즉 성전을 일으키리라는 미래를 깨닫는다. 그는 하코넨 가문, 그리고 뒤에 있는 황제를 향한 칼을 갈면서도, 본인이 본 환상을 막을 방법을 찾기 위해 지독하게 고민한다.
똑같이 원작을 읽어본 타인의 의견에 대해서 말하기는 어렵지만, 원작을 읽고 난 이후 접한 〈듄〉의 영상화에 대해서는 '나 같아도 끊었을만한 위치에서 끊었고, 내가 기대한 대로 연출되었다'라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이후 적어도 1편만으로는 영화 작품으로의 완성도, 또는 서사에 대한 평가에 대한 세간의 평이 큰 의미가 없는 작품이 아닌가라는 의문이 고개를 든다. 물론 본 글을 준비하던 와중에 〈듄〉이 상업적 흥행을 인정받아 2편의 제작이 결정되었다는 기사 또한 접했지만, 그에 대한 놀라움 또는 안도와 같은 감정도 일지 않았다.
저런 영화 외적인 이야기보다 〈듄〉에서 빌뇌브 감독이 가장 신경 써서 연출했다는 모래벌레, 샌드웜의 영상화가 계속 머릿속을 맴돌았다. 영화 중, 거대한 환형동물이 마치 바닷물이 아니라 모래로 이루어진 사해(沙海)의 지면 아래를 고래처럼 꿈틀거리다가, 후반부에 마침내 지면 위로 거대한 자태를 드러내는 장면에서, 묘한 기시감이 느껴졌다.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의 탄생에 영향을 미쳤다는 로버트 브라우닝의 「롤랜드 공자 암흑의 탑에 이르다 (Childe Roland to the Dark Tower Came)」(1852)라는 시가 떠올랐다.
토마스 모란 作, 〈롤랜드 공작 암흑의 탑에 이르다〉(1859) [출처: Semantic Scholar]
시인 본인으로도 해석되기도 하는 롤랜드 공자(Childe), 귀족 출신의 자제로 아직 기사 작위를 받지 못한 젊은 종자의 1인칭 시점에서 전개되는 이 환상시는 "암흑의 탑"을 찾아 나선 화자의 경험을 다루고 있다. 브라우닝은 본 시에서 세스테인(sestain)이라고도 불리는 6행 1단의 형식으로 ABBAAB 각운 구조를 사용하고 있는데, 시인이 꿈에서 본 광경을 그림처럼 묘사하여, 화자가 존재하지만 그가 경험하는 환상적 배경과 몽환적 분위기(의 전환)가 시를 이끌어간다.
「롤랜드 공자 암흑의 탑에 이르다」(1852)
- 로버트 브라우닝
(전략)
목표를 향해! 얼마 지나지 않아 내 행로가
황야로 접어들었고, 조금 더 걷고 나서,
잠깐 멈추어 마지막으로 뒤를 돌아서,
인도를 보니, 사라졌네; 주위는 모두 황야라: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지평선까지 황야가.
나는 다시 걷는다; 다른 방도는 이제 없어서.
그래서, 나아간다. 내 기억에는 단 한 번도
이리 황량한 땅은 처음이라; 무엇도 자라지 않네:
(후략)
〈듄〉에서 하코넨과 사다우카 연합군의 침략에서 간신히 탈출한 폴 아트레이데스와 그의 어머니 레이디 제시카는 자신들을 도울 수 있는 프레멘 부족을 찾아 나선 장면이 연상되는 이 초소형 대서사시(micro-epic)는, 영웅적 서사의 행동적인 내용보다는, "암흑의 탑"이라고 하는 어떤 모호한 목적지, 시인과 화자에게 주어진 영웅적이면서도 외로운 임무의 무게감의 전달과 공감에 중점을 둔다.
〈듄〉의 작가 프랭크 허버트 본인이 브라우닝의 시에 대해 언급한 내용은 없지만, 이 시는 재미있게도 SF를 비롯한 장르, 사변소설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소설의 제목, 주인공의 이름, 전반적인 분위기 전체에서 이 시의 직접적 영향을 느낄 수 있는 스티븐 킹의 『다크 타워』 시리즈 외에도, 조지 루카스가 《스타워즈 시리즈》의 '라이트세이버' 개념을 빌려온 캐나다 출신의 작가 고든 딕슨의 고전 SF 『차일드 사이클』 시리즈 또한 이 시의 영향 하에 있으며, 딕슨이나 킹과 같은 SF의 만신전 반열에 올리기에 부족함이 없는 로저 젤라즈니의 『앰버 연대기』에서도 시에 대한 언급이, 닐 게이먼의 『샌드맨』 시리즈에도 '찰스 롤랜드'라는 캐릭터가 등장한다. 위에 나열한 작품들이 해당 장르 내에서도 순수문학에 준하는 작품성을 인정받는 축에 속한다는 부분을 감안해 본다면, 이 시대의 SF 명감독으로 인정받고 있는 빌뇌브 감독의 작품론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끼쳤다고 추측해 볼 수 있다.
빌뇌브 감독은 작품군에서 지속적으로 과대망상증에 시달리는 주인공과 망상의 허구성 여부를 묘사하고 있다. 인간의 내면에 잠재된 거대한 짐승과 그를 가두어놓은 자아의 충돌, 즉 (21세기에 와서는 진부하게 느껴질 수 있는)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이드와 에고의 위태로운 균형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프리즈너스〉(2013)에서 딸을 찾아가면서 자아를 잃어가는 아버지 켈러 도버(휴 잭맨), 자신의 직감과 수사 실력에 대해 비이성적이라 생각될 정도로 자신을 보이는 로키 형사(제이크 질렌할) 모두 과대망상증에 시달리고 있다. 〈에너미〉(2013)에서는 자신과 완전히 동일한 외모를 가진 배우를 발견한 평범한 교사 아담 벨(제이크 질렌할)의 모습에서 아예 이드와 에고의 충돌이 외재화 된 서사가 그려진다. 〈시카리오〉는 자신이 CIA와 FBI 사이, 거대한 음모에 휘말렸다 끊임없이 의심을 하고, 실제로 과대망상증이 현실화되는 과정을 겪는 요원 메이서의 내적 갈등이, '마약과의 전쟁'이라는 과대망상증을 겪는 미국의 국경에서 벌어지는 외적 갈등이 병행 진행된다. 〈컨택트〉(2016)의 주인공 루이즈 뱅크스 박사(에이미 애덤스)는 아예 미래를 볼 수 있는 예언적 능력을 가졌다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리고, 능력에 대한 진실을 깨달아가는 과정이 주요 서사이며, 〈블레이드 러너 2049〉의 주인공 K는 자신이 역사상 처음으로 인간과 레플리컨트 사이에서 태어난 '약속의 아이'일지도 모른다는 망상과 씨름한다.
빌뇌브 감독의 필모그래피를 과대망상증이라는 시선에서 해석해 본다면, 〈듄〉의 폴 아트레이데스는 지금까지의 빌뇌브 주인공을 모두 한 곳에 압축한 인물상이라고 불러도 과언이 아니다.
폴 아트레이데스(티모시 샬라메), 〈듄〉 [출처: Dune Official Site]
브라우닝의 시의 화자, 롤랜드 공자는 암흑의 탑을 찾아 나선 이유에 대해 이를 어떠한 퀘스트, 인지와 논리를 초월하여, 자신의 이전 수많은 이들("The Band")이 이미 도전했었고 실패를 맛보았던, 마치 독자가 읽기에는 아서왕 전설 내 성배의 탐색에 비견될 수 있는 임무로 묘사하고 있다. 롤랜드 공자는 본능적으로 이 위대한 실패를 향해 다가간다. 시인이 꿈에서 본 이미지를 그려냈기에 구조적 해석이 난감한 본 작품이지만, 화자는 모든 신화적 퀘스트를 찾아 나선 영웅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과대망상증에 시달리고 있으며, 심지어 화자가 느끼는 임무감이 망상임을 직시하고 있다는 내용도 시 내에서 직접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영화로 〈듄〉의 후속작을 접하게 될 관객들을 위해 소설판 〈듄〉의 후반부 내용을 최대한 밝히지 않는 범위에서, 아라키스의 공자, 폴 아트레이데스는 브라우닝의 롤랜드 공자와 유사한 종류의 번민에 휩싸인 채 구도의 길을 걷게 된다. 그렇다면, 〈듄〉의 모래벌레는 폴의 내적 괴수, 부친의 복수를 위한 성전을 부추기는 본능의 목소리가 외재화 된 형태로 볼 수 있다.
모래벌레/샤이 훌루드, 〈듄〉 [출처: Dune Official Site]
빌뇌브 감독은 벌처와의 인터뷰에서 원작 소설의 커버아트와 데이비드 린치가 영상화한 〈사구〉(1984)에서는 세 개로 나뉜 턱을 가진 샌드웜을 하나의 거대한 입으로 바꾼 이유에 대해 설명했는데, 미술감독 파트리스 베르메테와 협업을 통해 샌드웜을 마치 고래와 같은 존재로 가정하고, 고래가 수염(baleen)을 통해 영양분을 필터링해서 흡수하는 과정에서 영감을 얻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이러한 해부학적 디자인 결정을 통해 영화의 후반부에서 사막 위로 고개를 든 모래벌레가 마치 거대한 눈으로 보이도록 묘사하는 연출이 가능해졌다. 다시 말하면, 빌뇌브 감독은 폴이 거대한 눈동자와 마주하기를 원했다.
외재화 된 폴의 과대망상증이다. 공생의 길을 운운하고, 타인을 구도하려는 메시아, 영웅, 초인이라는 자들은 필연적으로 과대망상증 환자들일 수밖에 없다. 메시아의 존재, 정확히 말하면 이들을 따르는 자들의 맹신적 신뢰가 얼마나 위험한지는 허버트도 알고 있었고, 빌뇌브도 알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막은 몹시 아름다워, 응시하다 보면 왜 과대망상증 환자들이 홀린 듯이 사막으로 이끌려가는지 이해가 된다.
마침
밀러와 빌뇌브 감독의 사막은 서사적, 은유적 도구로 소모되는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의 사막은 마치 대양과도 같아 문자로 설명하기 난감한 장엄함을 화면에 담아내고 있다. 그들의 숨 막히는 사막을 접하고 나면, 더글러스 애덤스의 유명한 질문이 생각난다. "바닥에 요정이 살고 있다고 믿지 않아도 정원이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지 않나요?"
사막에서, 죽음과 덧없는 영광에 대해 노래한 퍼시 비시 셸리의 「오지만디아스」를 떠올리며, 왜 그토록 쓸쓸하고 고적한 곳에서, 낭만을 찾을 수 있는지 수긍하고 만다.
(끝)
시 원문
Poetry Foundation. (1977). Ozymandias by Percy Bysshe Shelley.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46565/ozymandias
Poetry Foundation. (1989). The Second Coming by William Butler Yeats. https://www.poetryfoundation.org/poems/43290/the-second-coming
Bartleby. (1895). “Childe Roland to the Dark Tower Came” by Robert Browning. Edmund Clarence Stedman, ed. 1895. A Victorian Anthology, 1837–1895. https://www.bartleby.com/246/654.html
참고자료
Eco, U. (2021). The Book of Legendary Lands by Umberto Eco(2006–12-17). Quercus Publishing.
Davids, B. (2021, October 28). Denis Villeneuve on ‘Dune’ Success and the Road to ‘Part Two.’ The Hollywood Reporter. https://www.hollywoodreporter.com/movies/movie-features/dune-2-denis-villeneuve-part-two-1235038791/
Google [Talks at Google]. (2015, November 13). Mad Max: Fury Road | George Miller | Talks at Google [Video]. YouTube. https://www.youtube.com/watch?v=lXtDLEs0fqM
Jones, N. (2021, October 26). Denis Villeneuve Is Looking Forward to Working With Sandworms Again in the Future. Vulture. https://www.vulture.com/2021/10/denis-villeneuve-dune-interview-sandworms-and-sequels.html
Kelly, K. (2006, November 17). The New Animated Film “Happy Feet” Doesn’t Dance Around Serious Issues. WSJ. https://www.wsj.com/articles/SB116373257478225933
Watercutter, A. (2021, October 5). Denis Villeneuve on “Dune”: ‘I Was Really a Maniac.’ Wired. https://www.wired.com/story/denis-villeneuve-dune-q-and-a/
끝맺는 말
인용한 시들의 각운을 살려 번역한 한역본이 없어, 부족한 솜씨로나마 직접 번역을 해 보았습니다.
원래는 거대서사의 역사 영화만을 다루려고 시작한 대서사극 시리즈인데, 계속 쓰다보니 그냥 제가 좋아하는 영화들에 대해 사색하는 글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는 느슨하게나마 광의의 대서사(epic)/사극(historical) 둘 중 하나의 장르에 속하면 다룰 예정이니 독자 기준에서 대서사극에 속하지 않는 작품이 등장하더라도 너그럽게 이해 부탁 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