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차 애호가의 서랍 정리

묵은 설렘을 비우고 햇차를 마중하는 법

by 이차분

제 방 한편에는 5단으로 된 플라스틱 서랍장이 있습니다. 몇 년 전 혼자 공방 운영할 때 쓰던 건데요. 지금 그 서랍은 제가 가진 차로 빼곡히 채워져 있습니다. 주기적으로 정리한다고 해봐도 매일 여닫다 보니 엉망입니다. 완벽하게 구분이 되어 있지는 않지만 첫 번째 서랍은 대체로 티백이나 나눔 받은 소분 차, 몇 안 되는 서양홍차들로 채워져 있고, 두 번째 서랍은 한국, 중국, 대만차들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세 번째 칸은 두 개씩 사서 아직 포장을 뜯지 않은 차나 대용차들이 있어요. 아, 틴케이스나 나무 상자에 든 차들은 따로 보관 중입니다. 서랍에 들어가지 않더라고요. 네 번째 칸은 찻자리에 쓰는 티매트들이, 마지막 칸에 와서야 개인적인 잡동사니들로 채워져 있습니다. 취미로 즐기는 것치곤 꽤 많은 양의 차 같기도 하지만 주변 차 애호가들을 보면 비교 안될 만큼 적기도 합니다.


어느 날 아침 그 서랍을 열었다 닫았다 하면서 어떤 차를 마실지 고민을 하는데, 문득 하동 세작녹차 하나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 뒤에는 작년 제다 체험에 참여하여 직접 만든, 심지어 뜯지도 않은 우전녹차도 한 봉지 있었습니다(재작년 우전녹차도 보였는데, 이건 못 본 척했습니다). 그러고 보니 벌써 새해를 맞이한 것도 모자라 2월이더라고요. 곧 햇차가 나올 시기라는 걸 깨달았습니다. 4월 20일 곡우가 되면 뾰족하게 올라온 찻잎을 따기 시작하고, 그 찻잎이 바로 햇차가 되거든요. 햇차가 나오기 전에 이 묵은 차를 털어 마셔야 하는데, 라며 한숨이 절로 나왔습니다.


사실 홍차나 우롱차는 묵혀서도 마시지만 녹차는 비산화차로 차의 향미를 온전하게 즐기기 위해서는 그 해 여름이 가기 전에 마시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물론 마시면 안 되는 건 아닙니다. 맛과 향이 처음보다 떨어질 뿐이죠.


곰곰이 계산해 보니 올해 마신 녹차는 고작 2봉이었습니다. 60g 정도 될까요? 욕심껏 산 양에 비해 택도 없는 소비였습니다.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습니다. 일단 저는 녹차를 선호하는 편이 아닙니다. 안 좋아하는 건 아닙니다만 다른 차에 비해 손이 잘 가지는 않습니다. 또 마시는 시기가 굉장히 짧습니다. 따뜻한 봄이나 더운 여름에 비교적 자주 찾는 편인데요. 찬바람이 분다 싶으면 홍차나 우롱차를 찾아 떠납니다.


그럼에도 매년 봄이 오면 햇차라는 이유로 또다시 녹차를 사곤, 아니 많이 사곤 합니다.


사실 차애호가로 여러 해를 거치다 보니 이미 알고는 있습니다. 저는 올해도 곡우가 오기 전에 이 묵은 녹차 봉투를 비워내지 못할 것이고, 완연한 봄에 열리는 차 행사장을 찾아다니며 햇차, 그것도 녹차를 꿋꿋하게 구매하고 있을 거라는 걸요. 올해는 어떤 다원의 녹차가 내 입맛에 제일 잘 맞을까, 설레면서요.


네, 설렙니다. 매년 봄이면 나오는 햇차를 생각만 해도 마음이 붕붕 뜨고, 눈이 반짝거립니다. 비좁다고 아우성치는 서랍장의 사정을 생각하면 차를 새로 들이는 건 어불성설이지만, 봄과 함께 찾아온 햇차의 유혹을 뿌리치기는 쉽지 않습니다.


어쩌면 제가 햇차를 사는 이유는 그 맛 때문만은 아닐지도 모릅니다. 매년 찾아오는, 같은 설렘에 대한 응답이과 같습니다. 단조로운 삶에 몇 안 되는 설렘이거든요. 올해도 그 설렘을 무사히 느꼈다며 고마움의 표시 혹은 설렘을 잊지 않은 나에게 주는 선물, 뭐 이런 건 아닐까요? 억지스럽나요?


억지스러우면 어때요. 매일같이 반복되는 무채색의 삶을 이토록 무해하고 푸르른 색으로 채워주는 기회가 그렇게 흔하지는 않거든요.


그렇지만 새로운 설렘을 채우려면 지나간 설렘은 정리를 좀 해야 할 것 같습니다. 못 본 척한 재작년의 녹차는 녹찻물 밥으로, 작년 세작과 우전녹차는 부지런히 우려 마셔야겠습니다. 해 묵어 낡은 저의 생각과 감정의 조각도 이참에 치우면서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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