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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채 Jun 30. 2020

어디서부터 말해야 할지

잠깐, 내가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더라?

1.

    드라마투르기 교수님께 시나리오 피드백 요청 메일을 보낼 때 시나리오와 함께 Regiekommentar 영어로는 아마도 Director's Note라고 하는 그것을 같이 보내야 했다. 나는 이런 걸 한국에서도 제대로 써본 적이 없어서, 아니 정확히는 영화제 책자에 실어야 하는 마치 세줄 요약 같은 짤막한 멘트만 써봤기에, 디렉터스 노트가 어떤 것인지 모두지.. 감이 잘 안 왔다. 네이버에, 구글에 검색해서 다른 이들이 쓴 디렉터스 노트를 읽어보다가, 이게 곧 "제작 의도"를 의미함을 알게 되었다.


2.

    내가 왜 이 얘기를 영화로 만들고 싶었더라. 어떤 이들은 이걸 설명하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을 테지만, 나는 조금 애를 먹었다. 도무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얘기를 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서. A를 설명하려면 일단 B를 말해야겠고, B를 이해하자면 C를 언급하는 게 좋을 것 같고, C는 또 D를 빼고 말할 수 없으며... 이러다가 정신 차려보니 XYZ까지 말하고 앉아있다. 30분짜리 단편영화의 제작의도 쓰는데 A4 두장 분량이 나오면 어떡해. 그래도 기왕 쓴 거 지워버리긴 아까워서 촬영 감독에게 읽어보라고 보내줬다. 촬영 감독은 독일인이고 남성이기 때문에 아시안 여성, 그것도 유교 한(韓 그리고 恨..)녀이자 K-장녀인 나에게서 나온 이 캐릭터와 시나리오를 제대로 이해하려면 읽어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근데 얘는 나랑 작업을 같이 할 동료고, 교수님에게는 너무 구구절절하다 싶은 부분은 간략하게 수정하고 분량을 반으로 줄인 뒤에 보냈다.


3.

    나는 초등학생 때부터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글, 정확히는 수필을 썼다. 나의 첫 수필은 초등학교 3학년 때 교내 백일장에서 썼던 것으로 기억한다. 사실 그 보다 더 이전일 수는 있지만, 처음 상을 받은 건 이때니까, 이걸 처음으로 치겠다. 내 첫 글의 소재는 엄마였다. 엄마에 대한 글로 1등 상인 금상을 받았고, 학교 신문에도 내 글이 실렸다. 나는 잘한다 잘한다 하면 더 잘하려고 애쓰는 타입이었으므로 그 뒤로 백일장이란 백일장은 다 나갔다. 내 글의 단골 소재는 가족이었다. 엄마부터 아빠, 할아버지, 동생까지 소재가 되지 않았던 적이 없다.


4.

    엄마는 우리 집이 망했기 때문에 아마도 내가 글을 쓰게 됐을 거라고(글을 잘 쓸 수 있는 감수성을 갖게 됐을 거라고) 자주 말했다. 나는 솔직히 동의하지 않을뿐더러 그게 맞다고 해도 차라리 글을 못 쓰면 못 썼지 집이 망하지 않는 것이 낫다고 생각하지만, 어쨌든 엄마는 그렇게 믿고 있다. 엄마는 최악에서도 어떻게 해서든 좋은 걸 뽑아내려고 애쓰는 사람이고, 그게 엄마를 버티게 하는 엄마의 성정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5.

    우리 집은 내가 초등학교에 입학할 때까지만 해도 부족함이 하나도 없는 집이었다. 우리 집은 조부모와 나의 부모, 그리고 나, 내 동생 이렇게 여섯 식구가 살았다. 조부모님은 원래 ㅅ시가 고향인데 아빠가 국민학교 고학년이 될 무렵에 나의 고향인 ㄱ시로 이사를 와 집을 지었고, 거기에서 현재 30년이 넘게 살고 있다. 나도 이 집에서 대학 가기 전까지 살았다. 아빠는 삼 남매 중 장남으로, ㄱ시에서 작은 사업체를 운영하고 있었다. 고모는 이대를 졸업하고 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삼촌은 내가 태어날 무렵 고등학생이었고 서울대에 진학했다. 이렇듯, 삼 남매 중 둘은 명문대를 가고, 하나는 작은 사업체이긴 해도 사장님 소리를 들었으므로, 나의 조부모는 동네에서 퍽 잘 나가는 축에 속했을 것이다. 게다가 첫째 손녀가 태어난 지 5년 만에 며느리가 손자(그러니까, 내 남동생)를 낳았으니 뭐 더 이상 바랄 것도 없었을 것이고.

    그런데, IMF가 터졌다. 내가 초등학교 1학년 때. 우리 집까지 그 여파가 몰아친 건 내가 2학년으로 올라갈 무렵이었다. 사실 나는 아직까지도 그때 우리 집에, 아빠의 사업에,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그 내막을 자세히 알지는 못한다. 어릴 때는 어리다고, 컸을 때는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나에게 설명해주는 걸 꺼려했다. 이해가 안 가는 건 아니다. 이때의 기억은 우리 가족에게는 거의 트라우마처럼 남아있기 때문에. 하지만 언젠가는 제대로 기록해두고 싶은 마음은 있다.

    아무튼 자세한 건 모르지만 결과적으로 아빠의 사업은 부도가 났고 우리 집은 망했다. 신문에도 뉴스에도 어른들의 입에도 연일 부도니 IMF니 하는 말들이 나왔지만 초등학교 2학년인 내가 이해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우리 집에 뭔가 문제가 생겼다는 낌새 정도는 나도 눈치챌 수 있었다. 그리고 더 이상 나도 모를 수가 없는 큰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6.

    나는 아직도 그 남자의 이름을 기억한다. 신기하다. 난 이제 학교 때 담임선생님 이름도 생각이 안나거든. 근데 그 남자의 이름은 기억이 나. 아마도 그 이후에 내가 언젠가 드라마든 영화든 악역을 만들게 되면 그 이름으로 쓸 거라고 바득바득 이를 갈았기 때문일 것이다. 꽤나 흔해빠진 이름이라 명예훼손도 안될 것 같으니 정말 언젠가는 써먹어야지.

    아무튼, 그 남자가 우리 집에 찾아온 것은, 아니 쳐들어온 것은 어느 날 식구들이 모두 자고 있던 한밤중이었다. 당시 우리 집 현관문은 유리였는데, 올록볼록하게 무늬가 있는 사람이 서면 모자이크 된 것처럼 보이는 그런 두꺼운 유리문이었다. 그런데 그 밤에 그게 와장창 깨지는 소리가 났다. 바위를 집어던져 현관문을 깨부순 것이다. 그리고 그 남자가 들어왔다. 술에 잔뜩 취해서는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며 아빠를 찾았다. 할머니, 할아버지는 그 남자를 말리고, 엄마는 나와 동생을 서둘러 다른 방으로 피신시켰다. 도망치면서 그 남자가 아빠를 소파에 앉히고 위협하는 모습을 보았다. 엄마는 동생을 데리고 이 방에서 나오지 말라고 당부하며 다시 밖으로 나갔다. 나는 당시 네 살 밖에 안 된 동생을 붙잡고 울면서 하느님께 기도했다. 우리 집은 전부 천주교 신자들이었거든. 나도 모태신앙이 천주교였고. 지금은 아니지만. 그때는 방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밖에 없었다. 그 뒤에는 어떻게 수습되었더라. 경찰을 불렀던가? 아빠가 데리고 나가서 해결을 했던가? 기억이 나진 않는다. 깨진 현관문은 바로 수리를 했던가? 그것도 기억이 안 나네. 다만 우리 집 전화기 바로 위에는 112도 아닌, 우리 집에서 가장 가까운 지구대의 번호가 적혀있었고, 그 뒤로 나는 대문이 쾅하고 열리는 소리만 들리면 깜짝깜짝 놀라게 되었다. 그 남자는 그 뒤로도 두어 번 더 그런 식으로 찾아왔다. 한 번은 조부모가 아빠를 서둘러 옆집으로 피신시키기도 했던 것 같다. 지금도 아주 또렷하게 기억이 남는 건, 그 남자가 또 찾아왔던 어느 밤, 그날은 술을 좀 덜 먹은 건지 어쨌든 얘기가 좀 통해서 폭력사태는 일어나지 않았던 날, 무서움에 떨다가 잠이 든 나는 다음 날 일어나 학교에 갔다. 그날은 여름 방학식이었다. 방학식을 하면 하교를 일찍 했으므로, 이 날도 집에 일찍 왔는데 집 거실 소파에 그 남자가 누워서 자고 있었다. 남자는 그렇게 술 처먹고 우리 집에서 진상을 피워놓고선, 명절에는 또 멀쩡한 목소리로 안부 전화를 걸었다. 그 전화를 내가 받은 적도 있었던 것 같다. 그때쯤부터 나는 집보다는 학교가 더 좋았다. 집은 더 이상 나에게 안전한 곳이 아니었다.


7.   

    그 무렵부터 우리 집의 어른들은 모두 일을 하기 시작했다. 당시 할아버지는 퇴직을 하셨고, 엄마와 할머니는 가정주부였는데, 할아버지는 아파트 경비원으로, 할머니는 청소부로 취직을 했고, 엄마는 새벽엔 우유 배달을, 낮에는 초등학생 공부방 운영을(낮에 하는 일은 그 뒤로도 자주 바뀌었다), 그리고 밤에는 목욕탕 청소 알바를 했다. 아빠도 무슨 공장에서 일을 했던가? 그랬던 것 같다. 20대 때 병원에서 사무직 일을 하긴 했지만, 이런 식으로 생계를 짊어지게 된 적이 없었던 엄마는 정말 고생을 많이 했다. 나는 엄마의 모든 부분을 좋아할 수 없고, 여전히 이해하지 못한 많은 것들이 그 안에 있지만, 이 시기의 엄마는 진짜 한 인간으로서 존경스럽다. 특히 그때 엄마의 나이가 지금 내 나이에서 그렇게 멀지 않다는 걸 생각해보면 더더욱.

    수많은 K-장녀가 그렇듯이, 나도 엄마의 고생을 옆에서 지켜보며 일찍 철들고 알아서 클 수밖에 없었다. 지금 생각해도 고등학생 때까지의 나는 너무 좋은 딸이었다. 엄마는 가끔 "너도 니 같은 딸 낳아라" 이런 말을 하곤 했는데 (내가 비혼주의자라는 건 일단 차치하고)나는 그럴 때마다 "나는 나 같은 딸 너무 땡큔데?"라고 대답했다. 왜 스무 살부터는 아니냐면.. 영화를 하는 것이 내가 한 최고의 불효이기 때문에(농반진반).


8.

    왜 영화를 하게 되었냐, 보다도 왜 글을 쓰게 되었느냐는 설명하기가 더 쉽다. 우연히도 나에게 재능이 있었고, 그걸로 엄마를 기쁘게 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 나는 정말 스스로 엄마의 트로피가 되는 걸 자처했던 것 같다. 물론, 잘하기도 했고 재밌기도 했기 때문에(잘해서 재밌는 건지, 재밌어서 잘 한 건진 모르겠다)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이지만, 내가 글을 잘 쓴다, 상을 받는다, 그럼 엄마가 무척 기뻐한다, 주변 사람들에게 자랑한다, 이 프로세스가 나를 굴러가게 하는 원동력이었다. 그 당시 자랑할 거리라곤 눈곱만치도 없었던 우리 집의 유일한 자랑이자 희망이 되고자 했다. 그게 훗날 나를 어떻게 짓누를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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