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夏至
1.
딱 1년 전에, 나는 탄뎀 친구와 함께 쾰른 나들이를 갔었다. 친구는 나에게 오늘이 며칠이냐 묻더니, 오늘부터 여름이 시작된다고 말했다.
'이미 6월 말을 향해 가고 있는데 이제 여름이 시작 된다고?'
'왜 뜬금없이 오늘부터 여름의 시작인거지?'하며 찾아보니 그 날이 바로 "하지夏至"였다. 그래서 친구에게, "한국에는 5월에 "입하"라는 날이 있어, 우리는 그날을 여름의 시작이라고 해," 라고 설명해 줬다. 친구는 5월부터 여름이 시작되냐며 놀라워했고, 나는 한국은 5월이 되면 귀신같이 더워진다고, 독일의 여름과는 다르게 무시무시하게 덥고 습한 여름을 마치 자랑하듯이 얘기했다. 그리고 집으로 돌아가는 기차 안에서, "하지, 여름의 시작." 이 두 단어가 좋아서 스마트폰 메모장에 적어뒀다.
2.
보통 밝음, 해, 낮은 긍정적인 의미로, 어둠, 달, 밤은 부정적이거나 슬픈 의미로 쓰인다. 그런데 우리는 너무 피곤하고 일이 많았던 날에, "날이 참 길다."는 표현을 쓴다. 이 날에는, 하루라는 의미도 있고, 낮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게 왠지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3.
아르바이트를 했던 (지금은 코로나 때문에 문을 닫은)극장에선 젤리를 팔았다. 갖가지 젤리를 각각 플라스틱 통에 넣어 놓고, 손님이 원하는 젤리를 봉투에 담아 오면, 무게를 재서 가격을 매기는 방식이었다. 많은 젤리들 중에, 빨간색 하트 모양에 그 위에는 Hasi라고 적힌 젤리가 있었다. 하시? 하지? 이게 뭐냐고 묻자, 동료가 "Hase(토끼, 하제라고 발음한다)"의 귀여운 발음 "하지(Hasi)"이라고, 보통 연인 사이에서 애칭으로 쓰는 말이라고 했다. 하지, 하지. 전혀 다른 뜻의 두 단어가 재밌다고 생각했다.
4.
주인공 이름에 의미 부여 하는 걸 좋아한다. 작가가 인물을 만들어낼 때, 이름을 그냥 지을리가 없다. 그냥 고른 이름이라고 해도 적어도, 어감이 좋다던가, 좋아하는 작품의 주인공 이름과 같다던가, 사소하게나마 어떤 의미는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말하지 않으면>을 예로 들면, "희수"는 내가 평소에 좋아하는 이름이기도 하고, 내 인생영화 리스트에 있는 <멋진 하루>의 주인공 이름이기도 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이 이름을, 나의 절친을 모델로 한 캐릭터에게 주었다. 그리고 주인공인 "남은"이는 영화의 클라이맥스에서 남은이가 혼자 남겨져서 "남은 이"라는 의미로 "남은"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내가 지금 쓰고 있는 시나리오 주인공의 원래 이름은 "혜원" 이었다. 캐릭터가 나와 내 동생의 기억에 기초한 인물이므로, 내 이름에서 한 글자, 내 동생 이름에서 한 글자, 그래서 혜.원. 한국에서 흔한 이름이기도 하고, 어감도 괜찮아 한동안 주인공은 혜원이었는데, 이 이름이 독일인들에게는 발음하기 어려운 이름이라는 것을, 수업 시간에 시놉시스를 발표하면서 알게 되었다. Hye-Won 이라는 글자를 마주한 독일인 학우들은 이 이름을 어떻게 발음해야 할지 몰라 살짝 당혹스러워 했다. 어짜피 이건 시나리오고, 영화를 볼 때엔 이름을 발음할 수 있느냐, 없는냐는 크게 상관 없다고 생각하지만, 영화에 앞서 1차적으로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건 시나리오인데 이름을 쉽게 발음할 수 없다는 것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다. 특히나 제작지원금 신청을 하게 되면, 심사위원들이 보는 건 내 시나리오인데 그들에게 가서 "주인공 이름은 혜원이에요. 혜- 원- 이라고 발음해요."라고 말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고. 그들이 내 시나리오를 얘기할 때 주인공 이름에서 덜컥 거린다는 건.. 음, 아무리 생각해도 좋지 않다. 이름을 좀 더 쉬운 걸로 바꿔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
여러 후보가 있었다. 우리, 하나, 혜나... 다 뭔가 마뜩찮았던 차에, 폰 메모장에 적어둔 "하지"를 발견했다. 하지, 여름의 시작, 날이 가장 길고 해가 가장 높게 떠오르는 날. 안그래도 시나리오의 배경이 여름이었는데, 하지에 태어난, 하지라는 이름을 가진 인물은 어떨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어에 Hasi라는 애칭이 있다고 하니, 하지라는 발음을 낯설어 하지 않을 것 같았다. 흔한 이름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주 없는 이름도 아닌, 하지.
6.
하지라는 인물의 어느 아주 긴 날의 이야기, 라는 생각를 하니 제목이 쉽게 떠올랐다. 처음에는 A Long Long Day 였는데, 여기서 뒤의 Long을 Wrong으로 바꿨다. 그래서, A Long Wrong Day. 어느 길고도, 잘못 된 날, 잘못 되어서 참 길다고 느껴진 날. 이 Long 과 Wrong은 둘다 한글로 적을때 '롱'이 된다는 점도 재밌었다. 롱롱데이, 발음도 귀여워.
한글 제목은 아직 그냥 <하지夏至>인데 고민중이다, 어떻게 할지.
7.
시나리오에 하지가 본인의 이름에 대해 말하는 장면이 있다. 아직 완고를 쓰진 않았으므로, 언제든 썰려나갈 수 있는 장면이긴 하지만, 나는 그 장면을 좋아한다. 완고에도 남아있었으면 좋겠다.
8.
이 글을 쓰는 오늘이 바로 하지다. 시간은 오후 6시를 향해가는데 하늘은 여전히 대낮처럼 환하고, 독일은 이 무렵에 해가 거의 10시 가까이 되어야 진다. 여름보단 겨울을 더 좋아하지만, 그래도 여름이 겨울보다 나은 것들 중 하나, 긴 낮. 그리고 오늘이 가장 낮이 긴 날. 오늘부터 내가 준비하고 있는, 독일에서 찍게 될 영화, <하지> 또는 <A Long Wrong Day>에 대한 얘기를 쓰자는 생각이 들었다. 독일에서 영화 찍는 경험은 자주 할 수 있는 건 아니니까. 끈기가 부족하기도 하고, 본격적으로 프리프로덕션에 들어가면 너무 바빠서 아무것도 남길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 여기에 마지막으로 글 남긴게 작년 9월이었네 벌써. 그 사이에 많은 일이 있었는데, 일단 알바 때문에 너무 바빴고, 시나리오 쓰고, 발표 준비하느라 바빴고, 제작지원금 신청 준비하느라 바빴고... 결론은 다른거 하느라 브런치에 글 쓰는걸 자꾸자꾸 미뤘단 얘기.. NRW 도시들 그리고 다른 주 도시들 여행한거 기억 다 새나가기 전에 기록으로 남기고 싶은데 이제는 또 영화를 준비해야하는.. 여행 새로 가서 업데이트 한 다음에 글 남기면 좋겠다 생각했는데 코로나까지 터지고. 여행 못 간지 너무 오래되었다. NRW 얘기는 언제 다시 할 수 있을까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