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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차무 Aug 14. 2024

차산소 운동

차산소 운동

언제부터였을까? 나는 새해 목표 세우기를 그만뒀다. 20대 초반 10월의 나는, 이따금 강한 외로움과 우울감을 느끼곤 했는데. ‘계절을 타나 보다.’ 하며 쉬이 넘겼었다. 이제 와서 돌이켜보면 원인은 분명했다. 한 해를 또 속절없이 보냈다는 죄책감. 10월이면 그 해가 3개월이나 남았는데 말이다. 충분히 무언가를 이뤄낼 수 있는 시간이지만, 내가 원했던 ‘충분히’는 ‘완벽함’이었다. 그래서 나는 포기했다. 포기는 때론 강력한 회피가 되어주니까.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없어 내리게 되는 간편한 처방이자 치사한 변명. 잘 살아내고 싶어 욕심이 났고, 그랬기에 금이 가버린 모양새가 달갑지 않았다. ‘아! 올해가 또 이렇게 지나가는구나! 이제 와서 뭘 하겠어.’ 그런 날이면 괜히 버스 맨 뒷자리에 앉아 주황빛 황혼을 기다렸다. 대단히 큰 시련에 빠진 사람처럼, 십센치의 10월의 날씨나 아이유의 싫은 날을 찾아 틀고선.


   음울한 가을을 보내고 겨울이 오면, 괜히 스스로에게 화가 났다. 정면 돌파가 아닌 회피를 선택한 치졸함이 빠른 속도로 마음을 깎아내렸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벼려진 마음의 칼은 스스로를 대할 때도, 타인을 대할 때도 서슬 퍼런 검기를 마구마구 뿜어댔다. 피부에 닿는 물리적 온도가 낮아, 피부 표면 털들이 바짝바짝 서는 겨울날, 그날도 그랬다. 친구는 평소처럼 말을 걸었을 뿐인데, 나는 아주 퉁명스러운 대답을 날렸다. ‘추우니까 말 걸지 마.’ 이 어찌나 싸가지 없는 대답인지. 분명히 잘못된 행동이었고 나의 무례함에 친구가 불같이 화를 내도 받아들일 이유는 충분했다. 그런데 친구는 ‘쟤 이상하다.’고 그냥 꺄르르 웃었다. 그 웃음에 나도 괜시리 웃겨서 그날은 그렇게 물 흐르듯 넘어갔다. 상처를 받았지만 괜스레 넘겨준 것인지, 진짜로 웃겼던 것인지. 친구의 정확한 마음은 알 수 없지만, 그날의 에피소드는 우리의 관계에 흔적을 하나 남겼다. 5년 이상이 지난 지금까지도 몹시 추운 겨울날엔, ‘얘한테 말 걸면 큰일 난다!’라는 [그땐 그랬지]의 형벌을 받고 있으니까.

(친구야 미안했다…)


   기억에 남는 에피소드는 하나지만, 자의로 포기한 가을과 겨울은 늘 그런 식이었다. 가을부터 포기했는데 연말이라고 달가울 리가. 그땐, 한창 영화관에서 아르바이트하던 시기였다. ‘크리스마스랑 연말·연초 시즌 너무 바빠서 지긋지긋해. 다 별로야!’라며 앵무새처럼 되뇌고 다녔던 그런 시기. 실제로 바빴던 건 맞다. 하지만 그 문장 기저엔 올 한 해도 작년이랑 똑같이 허송세월을 보낸 것 같아 불안하다는 감정이 잔뜩 깔려있었다. 솔직한 내 마음을 돌아보는 게 부끄러워 바빴던 현실을 방패 삼았다. 성스럽게 울려 퍼지는 캐롤과 어딜 가던 북적북적 반짝반짝한 거리. 나는 올 한 해를 초기화하고 싶은데 저 사람들은 뭐가 그리 즐겁지. 아무런 티끌 없이 연말 분위기 자체를 즐기는 사람들이 부러워서 짜증 났다. 그런 마음으로 맞이한 새해는 과연 기쁠 수 있었을까. 작년에 형편없었으니, 올해는 달라야 한다는 압박으로 분수에 넘치는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어김없이 가을이 오면, 무너져 내리기를 반복 반복 또 반복.


    그럼, 지금의 나는 어떤가? 더 이상 불안감을 느끼지 않는다!… 라고, 당당하게 말할 수 있었으면 좋겠지만. 여전히 모호한 미래는 두렵고, 과거의 선택은 후회스럽다. 그래도 불안을 하루 내로 갈무리할 줄은 알게 됐다. 인생의 전환점이 되어준 대단한 계기가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차를 마시기 시작했을 뿐! 서서히 우러나는 찻물에 삶도 함께 우렸더니, 나도 모르게 마음 근육이 단단해졌다. 마음도 중량이 필요하다는 걸 차를 통해 배웠다. 그리고 차는 나에게 불안해(海)에서 허우적거리지 않을 수 있는 생존수영을 알려줬다. 사소하고 중대한 이 사실을 깨닫고 나서, 차를 통해 마음이 단단해지는 과정을 차산소 운동이라 부르기로 했다.

   잠깐, 여기서 茶산소 운동에 관해 소개하자면. 일단 차를 마셔야겠다는 비장한 결심을 한다. 그날그날 끌리는 차도 있지만, 터져 나가려는 차창고를 부여잡고 한참을 고민 할 때도 있다. 그렇게 골라낸 차의 정체를 파악하며 [이 차는 따듯하게 먹는 게 좋을지 차갑게 먹는 게 좋을지] 같은 고민을 한다. 그렇게 생각을 거듭하고서도 우려내는 과정까지 한참이 걸린다.


   첫 째, 차가 가진 고유의 건엽을 구경하고 향을 맡는 성스러운 과정을 꼭 거쳐야 한다. 가끔 너무 향이 좋은 차를 만나면 봉투에다 코를 대고 킁킁킁킁 거리기도 한다. 아무래도 국가가 허락한 마약을 그대로 물에 담그긴 아까우니까. 건엽에서 나는 향과 [뜨겁게/급랭으로/냉침으로] 우릴 때 나는 향이 다른 경우가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하다.


   둘 째, 신중하게 물 온도를 맞춘다. 녹차냐 홍차냐 우롱차냐에 따라서 알맞은 온도가 다르다. 녹차를 골랐는데 팔팔 끓는 물을 붓게 되면 녹차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나에게 욕을 한다. 아주 비릿하고 씁씁하게.

   셋 째, 차인의 길을 걷기로 마음먹고 나서는 티백보다는 찻잎을 선호하게 됐는데, 그렇다 보니 필요해진 도구들도 많다. 도구의 쓰임새는 짧게 여러 번 우려 내야 하는 찻잎이냐 뭉근하게 2~3분 우려도 되는 찻잎이냐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그럴 땐 오늘은 어떤 다기에 먹을까도 고민한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기계를 통해 바로 내리는 커피에 비하면 준비시간부터 마시는 시간까지 꽤 많은 수공과 신중함을 필요로 하는데, 나는 이 과정을 茶산소 운동이라 부른다.
(아직 아무에게도 밝힌 적은 없다.) 

   茶산소 운동을 할 때, 나는 오롯이 현재에 머물러 있어야 한다. 당장 눈앞의 이 중대한 찻자리를 잘 꾸려나가야 하므로. 어제 싸운 녹차와의 화해를 걱정하지 않고 내일 마실 밀크티의 액상 과당을 고민할 필요가 없다. 그러다 보면 하루 종일 씨름하던 불안에서 잠깐 눈길을 돌리게 되는데, 이 곁눈질이 생각보다 효과가 좋다. 이제는 茶산소 운동이 없어도 당장 해결하지 못하는 불안이라면 ‘고민해서 뭐 하겠어.’ 하며 잊어버린다. 이렇게 키워낸 마음의 코어는 꽤 단단해져서 가을이라 그 해를 냉큼 포기해 버리지도, 연말을 즐길 줄 아는 실체 없는 대상을 질투하지도 않게 됐다. 나의 삶 전반적인 부분에 사소하지만 중요한 변화가 일기 시작한 것이다.

 자, 그렇다면 차산소 운동을 만난 후 내 새해는 어떻게 되었는가? 삶에 일어난 파동을 걷어내니 나에겐 여러 가지 자아가 생기게 되었다. 이를테면 삶의 중축이 되는 나 그대로의 본체 자아, 고루한 현실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 자아, 차인으로서의 차인 자아가 있다. 재밌게도 이 자아마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이 다 다르다.


 본체 자아는 당연히 사회적으로 합의된 1월 1일이 새해의 시작이다. 현실 자아는 연봉협상을 통해 조금이라도 연봉을 올린 그 시점이 새해고. 차인의 자아일 땐, 그해 햇차가 나오는 4월이 새해다. 자아마다 새해를 맞이하는 시점이 달라지다 보니 본체 자아의 새해가 뭉툭 뭉툭해졌다. 각을 잡고 신년 목표를 세우는 것 또한 의미가 모연 해졌다. 목표 세우기를 그만두니 되돌아볼 과업이 사라져서 좋았다. 하루하루 살아내어 적립시킨 365일은 무사히 보내주고 새롭게 시작할 365일은 좀 더 가볍게 만날 수 있어 졌다.


 이 3가지의 새해 중에 가장 기다리는 것을 뽑으라고 한다면! 차인 자아의 4월이라고 하는 것이 좀 더 낭만 있겠으나 아무래도 현실 자아의 연봉 인상이다. 그래도 약간의 변명을 해보자면, 벌어야 차를 마실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 뒤에 차인의 자아가 바짝 뒤따라 붙어 있다. 차인의 자아가 차지해 낸 삶의 부분은 꽤 커서 1월 1일보다 매년 4월의 햇차 시즌을 더 기다리곤 하는데. 매년 햇차를 구입 해 마시면서 깨닫게 된 사실이 하나 있다. 같은 차나무에서 자란 어린잎일지라도 매년 향이 다르다는 것! 찻잎도 작물이니까 그해 농작 결과에 따라 맛이 달라지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라고 할 수 있지만. 단순히 [맛이 없다 / 좋다]라고만 평가 내리기엔 어딘가 섭섭하다. 왜냐하면 ‘맛’이 아닌 ‘향’이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작년에 갓 딴 골든픽 오설록 세작이 고소한 게 컸다면, 올해는 고소함을 내려놓고 좀 더 풋풋한 그런 식이다. 그러니 취향에 따라 선호 연도가 달라지는 것은 당연지사. 이런 햇차의 진실을 깨닫게 되고 차산소 운동까지 즐기게 되면서 나도 모르게 내 삶의 가치를 찻잎에다가 투영하기 시작했다. 그해 차나무 농사가 흉년이었냐 풍년이었냐를 따지기보단, 결국에 어떤 향을 품어냈느냐를 보는 게 맞지 않을까.

 그런 의미에서 작년엔 살짝 텁텁했는데 올해는 좀 더 산뜻할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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