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甲)과 을(乙)이 아닌 동(同)과 행(行)이어야

더불어 함께 사는 세상

by 애기타

아파트 입주민, 근무자, 업체 간의 상호관계는 어떤 관계가 바람직한 것인가?

공동주택은 시설유지관리, 용역 서비스 분야별로 필요에 따라 외부업체와 계약을 맺고 있다. 이 중에는 며칠에서 몇 주(개월)인 단기계약도 있고, 3개월 이상 1~3년까지의 중장기 계약도 있다. 근무 단지의 경우 위탁관리 3년, 경비, 미화 2년, 승강기, 소방, 전기 관련 1년 등 기본적이며 필수적 부문의 계약은 연 단위의 계약을 관련 업체와 맺고 있다. 계약업체 수는 수시 발생에 따른 비정기적인 계약을 포함하여 평균 30여 업체에 이른다.


업체 선정은 국토교통부 '주택관리업자 및 사업자 선정지침'에 따라 입찰 또는 수의계약으로 하고 계약 체결 시 계약서를 단지 홈페이지 또는 게시판에 공개하고 있다. 계약서에는 계약 당사자를 ‘갑(甲)’과 ‘을(乙)’로 구분하고, 계약 내용에 대한 갑과 을의 책임, 의무, 권리관계 등을 명시하고 있다. 여기서 갑은 발주처인 아파트, 을은 수주업체(자)이다.


개인적으로 갑과 을이란 용어에 다소 거부감이 있었다. 갑은 우위적, 을은 열위적인 표현이며 소위 '갑질'이란 용어도 여기에서 기인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이유로 을은 갑이 필요로 하는 노동, 기술을 제공하고 그에 합당한 대가를 받는 것이기에 양자의 관계는 상하·수직적인 관계가 아니라 대등한 수평적 관계이어야 한다는 관점이었다. 갑이 불필요한 일을 발주하거나 지급 의무가 없는 비용을 지급하는 것이 아니며, 을 또한 하지 않은 일에 대한 비용(대가)을 받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아파트 시설이나 설비에 어떤 문제가 발생하면 해결책이 강구되고 그에 따른 비용이 발생하는 것은 개인도 마찬가지다. 냉장고가 고장 나면 A/S를 받고 교체부품 비용을 부담해야 하듯, 승강기가 고장이 나면 정상 운행을 위한 부품 교체, 수리 등 관련 업체의 인적, 기술적(부품) 제공에 대한 대가(비용)가 지급되는 것이다. 입주민의 안전과 깨끗한 환경을 담당하는 경비, 청소 용역도 마찬가지다. 생활의 편리함으로 아파트를 선호한다면, 이는 건물이나 시설관리에 필요한 비용을 나 역시 분담하여 제공되는 것이기에 상호호혜적이다. 이런 편리함의 유지를 담당하는 용역과 기술을 제공하는 업체와의 관계 또한 동반자적 관계가 바람직하나 그 공감의 폭이 크지 않음은 아쉬울 따름이다.

수년 전의 일이다. 경비업무 민원과 관련하여 개선점을 협의하고자 경비업체 관계자를 불렀다. 용역업체 소속인 경비원에겐 그들이 갑이다. 업체 관계자가 방문하여 경비원을 대하는 태도가 눈에 거슬렸다. 한참 손위의 경비원을 대하는 언행과 태도가 전형적인 갑의 모습이었다. 민원 발생 경위를 파악하고 미비한 점에 대한 지원이나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갑의 위치에서 질책과 인사 조처 등을 언행을 서슴지 않았다. 소속 직원을 대하는 그런 모습에 경비업무의 실질적인 개선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업체의 계약기간 만료 시 계약을 해지하고 새로운 업체를 선정하였다.


새로 선정된 업체가 준비해 온 계약서 초안에는 갑(甲) 대신 동(同)이, 을(乙) 대신 행(行)으로 표기되어 있었다. 효율적인 경비업무 수행을 위해 업체와 단지 간의 상호협력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갑을이란 용어 대신 동행으로 표기하고 있다는 업체의 설명에 공감하였다. 그 업체는 이후 두 차례의 계약 연장을 거쳐 지금까지 상호 긴밀한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으며, 경비업무 관련 민원도 대폭 감소하였음은 당연한 귀결이다.

갑을관계가 비단 업체와의 관계뿐만 아니라 단지 내부에도 존재하고 있다. 입주자대표회의(동별대표자)와 관리주체, 관리주체와 업체, 입주민과 근무자, 관리소장과 직원, 감독기관과 공동주택의 관계가 갑을관계다. 이 갑을관계가 합리적, 상식적 또는 협력적이냐에 따라 장기 근무자가 많거나, 이직률이 높은 기피 단지가 되는 것이다. 관리소장 모임에서도 갑을관계에 따른 고충을 토로하는 소장은 늘 있다. 윤흥길의 소설 ‘완장’의 주인공처럼 입주민, 동대표, 회장이라는 완장으로 행하는 갑질 탓이다. 갑을관계가 명확(?)했던 그 단지의 소장님은 얼마 후 문자로 사직 인사를 보내왔다.


입주민의 갑질도 빼놓을 수 없다. 어느 단지에서나 갑질 증후군이 있는 주민은 있다. 관리사무소는 관리규약에 명시되어 있는 건물관리, 입주민 재산 보호 및 안전 도모, 전기, 수도, 승강기와 같은 공용부문에 대한 업무를 담당하는 곳이다. 갑질 증후군이 있는 입주민에겐 아무리 공용부문의 관리가 잘 되고 관리비 절감을 이루었다 한들 소용없다. 공용, 전유부문을 불문하고 본인의 민원을 처리해 주길 바란다. 공동주택에 살면서 단독주택에 따르는 관리를 요구하는 것이다. 고달픈 삶을 꾸려가는 처지를 이해하고 대부분 아파트 관리소에서 겪는 일로 치부하고 있으나, 초임 시절 이런 일로 인한 스트레스가 적지 않았다.

더불어 살아가는 세상이다. 갑을관계가 아닌 동행 관계, 즉 이해와 배려의 마음으로 서로를 대하는 게 그렇게 어려운 일일까? 동별대표자, 입주민, 관리직원, 경비원, 미화원 상호 간은 물론 업체와의 관계 또한 갑과 을이 아닌 협력자, 동반자로 대하는 동과 행의 관계가 바람직하리라는 생각이다. 그런 생각과 더불어 나는 혹여, 관리소장이라는 갑의 위치에서 직원이나 업체 관계자를 을로 대하고 있지는 않는지 한번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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