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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연 Jul 05. 2023

본인을 착취하고 계시진 않으신가요?

피로사회, 한병철 지음

 20년 코로나 팬데믹 이후로, 사회적 거리 두기가 시작되면서 내게는 급격히 성격이 변화되는 시간을 겪었다. 하루 12~14시간 취업 준비를 하며, 우울증과 대인기피증, 불면증에 시달렸던 내게는 이 위의 증상에 대한 해결책을 찾는 게 중요했다. 물론, 6평이 채 안 되는 좁은 원룸방에, 홀로 6개월 간 공부만을 해왔으니, 그랬을 법도 하지만, 분명 목적이 주어지면, 언제든 성취를 위해, 열정을 불사 지르는 나로서는 이해가 안 되는 지점이었다.


 이 상황에서 한병철 작가님이 말씀하시는 "자기 착취의 시대, 피로사회에 살아가고 있는 현대인은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이다."라는 <<피로사회>> 책의 뒷 문구를 읽고서, 우울증을 단순히 질병이 아닌, 현시대적인 사황을 고려해 철학적 진단을 내려주실 거라는 소망으로 책을 열었다.



 작가님은 현시대를 '성과사회'라고 명명하고, 그 사회를 병리학적 관점으로 분석하였다.


시대마다 그 시대에 고유한 주요 질병이 있다.
그래서 이를테면 박테리아적이라고
할 수 있는 시대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면역학적 기술에 힘입어
이미 그 시대를 졸업했다.

21세기의 시작은 병리학적으로 볼 때
박테리아적이지도 바이러스적이지도 않으며,
오히려 신경증적이라고 규정할 수 있다.

신경성 질환들,
이를테면 우울증, ADHD,
경계성성격장애, 소진증후군
이들은 전염성 질병이 아닐 경색성 질병이며
면역학적 타자의 부정성이 아니라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질병이다.
    
P.11


 20세기 페니실린의 발견과 더불어, 우리는 박테리아와 바이러스와의 전쟁에서 인간이 승리했다고 자부할 수 있을 만큼의 업적과 성과를 가져왔다. 이전에는, 신체 내부에 들어왔을 때, 타자에 대한 경계와 반항으로 뚜렷한 경계선이 그어지던 면역학적 도식이 따랐던 시대였다.


 그러나, 21세기에는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신경증적 질환이 주를 이룬다 하였다. 우리는 세계대전 종식 이후, 세계화에 따른 지구촌의 생성과 통신기술 발달로 인한 소통채널의 활성화로, 범지구적 보편화된 사고를 할 수 있게 되면서, "이질성과 타자성이, 동질성과 다름으로 인한 이해"로 대체되었다. 우리는 더 이상 이질성과 타자성에 대해 아무런 면역 반응을 일으키지 않는다. 같은 것에 대해서는 항체 형성을 초래하지 않으니, 우리는 더 이상의 저항은 불필요하며, 자아와 타자의 양극화가 일어나지 않아, 우리는 자아의 동질적인 것의 과잉으로 인한 신경증적 질환만을 초래하게 된다.



 서두에서 신경증적 질환의 시대로 전환된 사유를 설명한 뒤, 바로 그 시대에 대한 고찰이 뒤따랐다.

우울증은 성과주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발발한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일과 능력의 피로이다.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다는 의식은
파괴적 자책과 자학으로 이어진다.

우울증은 긍정성의 과잉에
시달리는 사회의 질병으로서,
자기 자신과 전쟁을 벌이고 있는 인간을 반영한다.

성과주체는 노동을 강요하거나
심지어 착취하는 외적인 지배기구에서 자유롭다.

그는 자기 자신의 주인이자 주권자이다.
그는 자기 외에 그 누구에게도
예속되어 있지 않은 것이다.
그리하여 성과주체는 성과의 극대화를 위해 강제하는 자유 또는 자유로운 강제에 몸을 맡긴다.
과다한 노동과 성과는 자기 착취로까지 치닫는다.

자기 착취는 자유롭다는 느낌을 동반하기 때문에 타자의 착취보다 더 효율적이다.
성과사회의 심리적 질병은
바로 이러한 역설적 자유의 병리적 표출인 것이다.

P.29


 소름이 돋았다. 내가 피해자인 동시에 나에 대한 가해자라고? 나는 그저, 일생의 시기마다 해당하는 발달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줄 알았는데.. 난 그 이상을 하는, 성과사회의 자기 착취자에 불과했다. "멋진 몸, 물질적 성공, 사회적 명예, 외관의 미, 독서를 통한 정신적 성숙, 대중이 지지하는 유머, 발 넓은 인간관계…" 이 모든 건, 생산을 최대화하려는 현대사회의 긍정성의 과잉으로 인한, 타자가 아닌, "나를 통한 압박과 쟁취였다." 그 누구도, 나를 구속하지 않았고, 내게 강요하지 않았다. 내가, "할 수 있다는" 긍정성으로, 빠르게, 여유 없이, 꾸준히 달려왔다. 나는 현시대의 당면한, 당연한 고유 질환으로서 자기 착취로 인한 "우울증과 소진증후군"을 겪었나 보다.


 우리 시대에는 "모든 행위에 대한 할 수 있음"만이 존재한다. 그 할 수 있음의 과잉이, 개인을 자기 자신과 경쟁하면서 끝없이 자기를 뛰어넘어야 한다는 강박을 만들어내고, 그 장벽을 넘는 동시에 또 다른 도전으로 이어져, 자신을 한계 없는 그 긍정성을 통해 할 수 있는 최대의 성과와 성공을 향한 끊임없는 생산을 하도록 하는 파괴적인 메커니즘에 환각 되도록 한다.  나는, "그 할 수 있음이 넘쳐나는 시대"에, 내가 "더 이상 할 수 있을 수 없을 때"  자기 착취가 먹히지 않을 때, 우울증이 발발했다.



 나는, 계속 도전에 거듭하며 만족하지 못했고, "나를 위한 것으로 믿었던, 끝없는 욕망을 추구한 나"와 “그 욕구를 충족시키지 못한 나" 사이의 간극을 버티지 못해, 소진이 왔고, 소진이 축적되어 우울증을 경험했던 것이다.


 나는 경제와 유착된 성과사회에서 어떻게 생존해 할까. 저 질환들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어디까지 추구해야만 하는 걸까. 객관적으로 유효한, 최종적인 과업이 주어진다면, 나는 앞으로 더 나아가지 않고, 내 자리에서 만족할 수 있을까.


어떤 목표를 달성했다는 느낌 자체가 이젠, 뭔지도 잘 모르겠다.



 그렇다고 해서, 20세기에 우울이라는 증상이 없었던 건 아니다. 다만, 오늘날과 같은 우울증의 증상과는 차이가 있었다.


프로이트에 따르면 멜랑콜리란 나르시시즘적인 동일시를 통해 자아의 일부로 내면화된 타자가
자아에 대해 파괴적 작용을 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다.
이로써 타자와의 갈등은 내면화되고
자기 자신과의 갈등관계로 전화하여
결국 자아의 빈곤과 자기 공격성으로 이어진다.

반면, 오늘날 성과주체가 앓는 우울증 등의 질환
이렇게 내면화된 타자의 갈등관계 또는
양가적 관계를 전제하지 않는다.
우울증에는 아예 타자의 차원이
개입되어 있지 않다.

우울 상태에 빠진 성과주체는 말하자면
자기 자신에 의해 소모되어 버리는 셈이다.
그는 자기 자신으로 인해,
자신과의 전쟁으로 인해 지치고 탈진해 버린다.
그는 자신에게서 걸어 나와 바깥에 머물며
타자와 세계에 자신을 맡길 줄은 전혀 모른 채 그저 자기 속으로 이를 악물 따름이다.

하지만 그 결과로 남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이 텅 비어버린 공허한 자아뿐이다.
주체는 점점 더 빨리 돌아가는
쳇바퀴 속에서 마모되어 간다.

P.95


 20C를 지배했던 프로이트의 정신분석학점 관점으로 이해했던 우울과 21C 성과사회의 우울은 상당히 다르다. 타자와의 갈등으로 빚어진 강력한 감정이 무의식 속에서 자리 잡아, 표출하지 못한 것에 대한 타자에 대한 거부감이 자신과의 갈등으로 전이되어 우울을 겪었다면, 타자가 전혀 개입되지 않은 채, 주체적인 갈등으로 인한 우울. 경쟁자적 관계가 나와 타자 간 설정되어 있는 게 아니었다. 나는 나를 갉아먹고 있었고, 그 규격화된 생활에, 끝없는 추구에, 탈진해 버려 나 스스로를 또 학대하고 있었다. 나는, 나를 어디까지 규정해야 할까. 나는 나의 주체성에 지쳐버렸다. 나는 어떻게 이러한 운명을 피할 수 있을까.



한병철은 시스템이 이상적인 자아가 되고자 하는
개인들의 욕망으로 지탱되고 있다면,

개개인이  이러한 욕망의 허구성에 대해
각성하는 데서
비로소 시스템의 변화도
시작될 수 있다고 보는 듯하다.

우울증의 배후에 놓인 성과사회의 압력은
단순한 외적 강제가 아니라 유혹의 형태를 취하며,
오직 인간 자신의 욕망을 매개로 해서만 관철된다.

따라서 성과사회의 압력은
끝없는 성공을 향한 유혹에 노출되어 있는
개개인의 반성과 자각을 통해서만 물리칠 수 있다.

P.128


 더 이상 성공적인 인간이라는 이상에 유혹당하지 않아야 한다. 난, 경제와 유착된 사회적인 성공의 무한한 경계를 생각하지 않고, 한 번의 일생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고려하며, 나의 감각기관을 통해 그저 지각하고, 경험하고만 싶다. 인간으로 존재하기 때문에 추구할 수 있는 가치에 초점을 두고 살아갈 것이다. "효, 사랑, 우애, 이타성, 존중, 공감, 희생, 책임" 나는 경계 없이, 무한하게, 초월하여, 나의 목적을 재정의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이 책에 담긴 한트케가 설명한 자아 피로에 대해 이야기하며, 글을 마치겠다.


한트케의 피로는 자아 피로,
즉 탈진한 자아의 피로가 아니다.
오히려 "우리-피로"라고 말한다.

이때 나는 너한테 지치는 게 아니라,
한트케의 표현대로 말하자면
너를 향해 지키는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내 기억으로는
늘 밖에서 오후의 햇살을 받으며- 앉아있었고
말을 하기도 하고 침묵을 지키기도 하면서
공동의 피로를 즐겼다.
… 피로의 구름이, 에테르 같은 피로가
당시 우리를 하나로 엮어주고 있었다."

P. 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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