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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연 Jul 05. 2023

인간에서 실격했네.

인간실격, 다자이 오사무 지음

 우연히 '인간 실격'이라는 단어가 눈에 밟혔다. '실격.' 인간에게 실격이라는 어휘로 자격을 박탈시키다니, 환경과 인간의 대립을 주소재로 적어낸 고전소설이라 생각하고 책을 들었다.


 서구의 자연주의를 일본식으로 변형시켜 자신의 일생을 제삼자 인물로 표현했던, 일본의 '사소설.' 다자이 오사무는 작품 속에 "요조"라는 제3인칭 인물로 자신의 경험을 있는 그대로 써 내려갔다.



 그의 생은 여러 번의 자살시도가 삽화형태도 이뤄져 있어, 이 소설 또한 그의 생을 따라 흘렀다. 작중인물 요조가 시간에 따라 성장하는 데 반해, 인간이라는 속성에서 점차 퇴보되어, 인간에 못 미치는, 반인간적인 행위나 사고로, 점차 인간이라는 존엄성에서 탈락하는, 종결을 보여주었다.


만일 제가 진실을 말하는 습관이
들어있었다면
당당하게 그들의 범죄를
아버지, 어머니한테
일러바칠 수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인간에게 호소한다.
그런 수단에 저는 조금도
기대를 걸 수가 없었습니다.

아버지한테도 호소해도,
결국은 처제술에 능한 사람들의 논리에
져 버리는 게 고작 아닐까.

P.25

 인간 실격에서 주인공이 바라본 "인간"의 의미가 꽤 와닿았다. 인간으로부터 얻은 [고진감래 + 홍진비래 = 0]이 수식이 맞을까? 번민이 더 커져서 0보다 작은 음의 성질을 띠진 않을까. 나누면 나눌수록 도리어 내 창문의 창호지는 찢어발겨지는 건 아닐까.


인간은 서로를 전혀 모릅니다.
완전히 잘못 알고 있으면서도 둘도 없는
친구라고 평생 믿고 지내다가
그 사실을 알아차리지 못한 채

상대방이 죽으면 울면서
조사(弔飼) 따위를 읽는 건 아닐까요.

P.91


 우리는 서로를 '신뢰'라는 형태로 관계를 지속하다, '기대'라는 걸 하게 되고, 조만간 그 '안일함'이 도리어 내게 '성찰'을 가져다주는 건 아닐지. 인간의 본능에 따라 자기기만적이고 위선적인 자아를 활용하며 오늘의 만남을 이어나가는 게 아닌지 싶었다.


그건 세상이 용납하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네가 용납하지 않는 거겠지
그런 짓을 하면 세상이 그냥 두지 않아.
세상이 아니야. 자네겠지.
이제 곧 세상에서 매장당할 거야.
세상이 아니라 자네가 나를 매장하는 거겠지.

그때 이후로
저는 '세상이란 개인이 아닐까'하는
생각 비슷한 것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P.92

 세상? 타인을 증오하는 개인들이 모여, 사회가 되고, 그 사회라는 집단이, 경쟁자적 관계에 놓여있는 서로에게 불과분의 불리한 조건에 서로를 가두어 두고자, '질서'라는 걸 만든 건 아닐런지. 나의 암흑기 시절, 세상의 의미는 그랬다.


자네의 쓸쓸함은 알고 있어.
그러나 항상 그렇게 불쾌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안 되지.
쓸쓸할 때 쓸쓸한 얼굴을 하는 것은
위선자가 하는 짓일세.

쓸쓸하다는 것을 남이 알아줬으면 하고
일부러 표정을 꾸미는 것일 뿐이야.

진실로 신을 믿는다면
쓸쓸할 때도 내색하지 말고
얼굴을 깨끗이 씻고
머리에는 기름을 바르고
미소 짓도록 하게.

쓸쓸한 것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아도
어딘가 눈에 안 보이는 곳에 계시는
자네의 진정한 아버지가 알아주신다면
되는 것 아니겠나.

쓸쓸함은 누구한테나 있는 거라네.

P.142


 출근길, 윗 페이지 글을 읽고 오열했다. 어떤 사물의 힘을 빌려 밝음을 만들고, 내 웃음으로 '나'를 치장하는 나날들. 사회와 개인 사이의 나의 간극. 고독과 무위, 희생과 삶의 애환을 홀몸으로 견뎌내기 위해서 나에 대한 조소를 입가에 한껏 물었다. 나의 사회적 위치를 지켜내기 위해 나에게 걸어왔던 최면. 그저 멀리서 그 누군가, 한 명만 그걸 알아봐 주면 된다. 물론, 이 책 속의 아버지는 하느님을 빗댄 거지만, 내게 아버지는, 생부이시다. 내가 연출한 삶에서 맞닥뜨리는 등장인물들의 동정을 기대하지 않는다. 어떠한 상품과 보상으로도, 나를 동기화시킬 수는 없다. 오로지, 나를 낳으신 분만이 나를 알아봐 준다면, 나의 양분은 충분히 채워질 테고, 그거면 된 거다.


최종면접 탈락날

 나의 전진이 나를 낳으신 분의 심에 들어가 있다면, 난 그걸로 충분했다. 다자이 오사무는 이 소설을 통해 부모와의 신뢰와 유대감이 오직 본인의 익살스러움의 대가로서만 존재했음을, 그로 인해 자신의 삶이 '익살꾼'으로 전향됐음을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낳으신 분의 전적인 사랑이 필요해서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당신만 알아주신다면 그걸로 족한 생이었음을 전달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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