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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초연 Jul 05. 2023

무사시노를 거닐다.

무사시노 외, 구니키다 돗포 지음

요새 근대 일문학에 매료되어, 자연스레 메이지의 자연주의 선구자인 구니키다 돗포를 만나게 됐다.


우리나라에는 잘 알려져 있지 않지만,

일문 학도에게는 돗포는 기본이니,

만나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의 일본에서의 명성은

근대 문학의 기원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돗포가 번번이 인용되었다고 한다.


그의 문체는,

마치 내가 그 풍경을 보고 있는 듯한

착각을 일으킬 만큼

세밀한 붓 터치에 따른 명도와 채도까지,

시각적으로 나를 안내한다.


감히 추상적이지 않고,

굉장히 실재적이라고도 말할 수 있을 듯하다.



 특히 무사시노 작품에서는 무사시노라는 자연 풍경에 대해 묘사하였는데, 나는 그의 언급에 따라, 그 길을 함께 걷고 있었다. 이건 분명 책인데, 나는 하나의 산수화가 아닐까 싶기도 할 만큼, 구체적이고도 세심했다.


11월 4일
하늘은 높고 공기는 투명하게 맑다.
저녁에 홀로 바람 부는 들에 서 있으니, 먼 하늘의 후지 산은 가깝게 보이고,
국경을 따라 늘어선 산맥은 지평선 위로 검다.
별빛은 한 점, 저녁 어스름이 짙어져 숲은 점차 멀어진다.
11월 18일
달빛을 밟으며 거닐다.
푸른 밤안개 땅에 깔리고 달빛은 숲에서 부서진다.
11월 19일
하늘은 맑고 바람은 깨끗하고 이슬은 차다.
눈에 들어오는 것은 온통 단풍 사이에 섞인 상록수다.
작은 새는 나뭇가지에서 지저귄다. 길에는 아무도 없다.
홀로 걸으며 묵묵히 생각하고 읊조리며 발 닿는 대로 근교를 거닐다.


 김영하 작가님이 알쓸신잡에서 "햇빛이 부서진다."라는 관용표현을 해서, 반했었는데, 시초는 돗포였을지도 모르겠다. 시간의 순서에 따라, 일기장에 적은 내용을 언급하면서 무사시노의 풍경을 설명하는 부분이다. 등산을 좋아하는 사람은 활엽수 사이에 사계절 내내 초록색인 상록수가 눈에 띈다. 상록수는 올곧게 초록색이므로, 활엽수의 빛을 더욱 발산하게 만든다고 해야 할까. 그 부분이 담겨있어, 나는 가을에 무사시노를 걷는 듯했다.


 코로나를 통해 등산을 즐겨하게 되면서, 낙엽림에 대한 아름다움을 몸소 체험하게 되었는데, 위도가 비슷한 일본에서의 작가 또한, 나의 경험을 무사시노에서 하였다. 낙엽림의 정취를 잘 아는, 그가 말한 이 대목에 굉장한 공감을 자아낸다.


만약 무사시노 숲이 참나뭇과가 아니라
소나무나 다른 것이었다면
극히 평범하게 변화가 적은
한 가지 색과 모습이 되어
이토록 좋아하지는 않았으리라고.

 상록수에 비해 참나뭇과는 비용이 발생한다. 부자의 동네일수록 참나뭇과가 꽤나 보이는데, 상록수는 사계절 내내 푸르고, 계절의 변화에 따라 잎이 떨어지거나, 생성되거나, 하지 않으므로, 더 이상의 관리 비용을 발생시키지 않는다.


 반면, 참나뭇과의 단풍나무 같은 식물은 사계절에 따라 잎이 생성되기도, 소멸되기도 하기 때문에, 떨어지고, 만들어지고 하는 데, 무수한 청소와 수정 비용이 발생한다. 우리는 만약, 동네에, 참나뭇과 나무들이 많다면, 참으로 감사해야 할지도 모른다.




 나는 더불어 "목적지를 향하지 않는 정처없는 발걸음"을 참 좋아한다. 나에게 제한이 없는 시간은 유일하게 산책인데, 산책을 좋아하는 이유 자체가 목적성을 띠지 않는, 유일한 나의 시간이기 때문이다. 무언가를 의식하지 않고 정처없이 걷다 보면, 자동반사되어 갈 수 있는 익숙한 길을 거닐지 않게 되고, 미지의 세계에 입성할 수 있게 된다. 누구에게도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시간적 제약을 받지 않고도, 나 스스로 게으름과 무지에 대한 채찍을 내리치지 않고도, 내 걸음에 대한 평가와 가치판단을 행하지 않고도, 난, 존재할 수 있기 때문에, 난 정처 없이 목적이 없는 발걸음이 좋았다. 이에, 돗포는 공감할 듯싶다.


무사시노를 산책하는 사람은 길을 잃을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어느 길로도 발 닿는 대로 가다 보면
반드시 그곳에 보고 듣고 느껴 얻는 것이 있다.
무사시노의 아름다움은 단지 종횡으로 통하는 수천 갈래의 길을
방향 없이 걸음으로써 비로소 얻을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겨울, 아침, 낮, 저녁, 밤, 그리고 달, 눈바람, 안개, 서리, 비, 소나기처럼
단지 이 길을 정처 없이 걸으며 마음 내키는 대로 좌우로 가면
곳곳에 우리를 만족시켜 주는 것이 있다.

 아울러 돗포는 주제재를 자연과 소시민 풍경으로 삼았다. 마치 박경리의 토지에서 소민 한 명 한 명의 일생을 담은 것과 같이, 돗포 또한, 결코 지나치지 않고, 잔잔한 소민의 일상을 전달하였다. 그 인물이 주인에게 연정을 품은 하녀일지라도, 광장에서 퉁소를 부는 눈먼 노인일지언정.


 소민의 일상을 담았던 <겐노인>이나, <잊을 수 없는 사람들>의 소감은 남기지 않겠다. 그저 감각적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 문자로 형용할 수 없는 그런 것들이었다. 이에 돗포의 평과 소시민적 일상에서 기억에 남는 문구를 적으며, 이번 글을 마치려고 한다.


돗포에게 풍경은 풍경 자체로만 존재하거나 인물의 배경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아름다운 혹은 쓸쓸하거나 음울한 자연의 풍경은, 그 풍경 속에 작은 점으로 존재하는 소민 혹은 이름 없는 사람들과 어우러지고, 수직적 시공간의 기억과 역사까지 품고서 돗포의 작품 속에서 완성되었다.
그래서 오늘 같은 밤 나 홀로 밤늦게 등불을 마주하고 있으면, 인생의 고독을 느껴 견딜 수 없을 정도의 애상을 불러일으키지. 그때 내 이기심의 뿔은 뚝 부러져 왠지 사람이 그리워지네. 옛날 일과 친구가 생각나지. 그때 강하게 내 머리에 떠오르는 것은 바로 그 사람들이네. 아니, 그때 그 광경 속에서 있던 그 사람들이네. 아(我)와 타(他) 사이에 무슨 차이가 있겠는가. 모두 다 이승의 어느 하늘 어느 땅 한구석에서 태어나 머나먼 행로를 헤매다가 서로 손잡고 영원한 하늘로 돌아가는 게 아닌가. 이런 감정이 가슴속 깊은 곳에서 일어나도 모르게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린 적이 있네. 그때는 실로 아도 아니며 타도 아닌, 단지 모두가 그립고 애틋하게 느껴지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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