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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솜 PD Oct 27. 2021

<100일 글쓰기> 11. 사랑니에 얽힌



5년 전 스케일링을 받으러 가벼운 마음으로 치과에 갔다가 청천벽력 같은 말을 들었다. 매복 사랑니가 있고, 약간 썩었으며, 턱 신경과 가까이 닿아있으니 대학병원에 가서 뽑으라고. 고개를 끄덕이며 치과를 나왔지만 무서워서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에 뽑아야지.' 하며 세월을 보내다 보니 어느덧 1년, 2년... 5년이 지났다. 사랑니는 잊고 지낼만하면 쿡쿡 쑤시며 제 존재감을 드러냈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갈수록 통증이 심해져 타이레놀을 먹으며 견뎠다. 하얀 알약 하나 먹으면 언제 그랬냐는 듯 통증이 사라지고 불편함 없이 생활할 수 있으니 자연스레 잊어버리기 딱 좋았다. 아니 모르는 척 다른 데 신경을 돌리기 딱 좋았다.


나는 겁이 많기도 하고 미래에 일어날 일들을 최악의 경우까지 상상하는 편인데, 사랑니를 뽑다가 죽을 수도 있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아니면 턱 신경이랑 닿아있다 했으니 신경을 잘못 건드려 마비가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치아가 많이 썩으면 균이 침샘에 퍼져 문제가 되기도 한다는데 나는 이미 늦은 게 아닐까 등등등. 온갖 불길한 상상이 머릿속을 떠돌아다녔고 이는 당연히 큰 스트레스였다. 이렇게 스트레스를 받으면서도 사랑니 발치를 미룬다는 사실에 나를 비난하기도 했다. 해야 될 일을 미루는 사람, 생활 감각이 부족한 사람 등 스스로 딱지를 붙였다. 



그러다 정말 더 이상은 미루면 안 되겠다, 고 느낀 시점이 왔는데. 얼마 전 사랑니 옆이 새까맣게 썩은 것을 발견했다. 여태까진 치아 윗면만 거뭇거뭇한 정도였는데 대체 언제 이렇게 썩었지? 불안감이 엄습하는 동시에 그동안 아팠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쑤시는 통증이 느껴졌다. 사랑니가 아프기 시작하면 사랑니부터 시작해서 머리까지 쭉 고통이 타고 올라가는 기분이다. 진통제를 사랑니에 꼼꼼히 짓이기고 싶다. 치아 표면이 쭉쭉 흡수할 수 있도록. 약을 먹었지만 다음날이 되니 통증이 또 시작됐다. 그리하여 아주 큰 결심을 했다. 생일을 맞아 사랑니를 뽑기로!



웃기게도 2년 전 이미 치과까지 다 알아둔 상태였다. 서울대입구역 앞에 있는 치과인데 SNS에 후기가 올라오며 한동안 유명했었다. 치과 이름을 검색하면 광고성 글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사랑니를 뺀 생생한 경험담이 가득 나오는 곳. 다른 치과에서는 대학병원에 가라고 했지만 그 치과에 가니 바로 뽑아주었다는 말만 믿고 전화를 해서 예약을 잡았다. 다음 주 평일 중 가장 빠른 날짜와 시간대로 잡아달라고. 그렇게 생일 전날 사랑니를 뽑기로 했고 그날이 어제였다. 



치과는 4시에 예약을 했지만 1시간 넘게 기다려야 했다. 건물이 낡았다, 직원이 불친절하다, 오래 기다려야 한다 등의 평이 있었지만 나는 사랑니만 잘 뽑아준다면 다른 건 아무래도 상관이 없었다. 마취를 하고 x-ray와 CT촬영을 마쳤다. 의사 선생님이 사진을 보여주며 그러셨다. 



"신경이랑 아주 가까이 닿아있어요. 많이 위험한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괜찮은 것도 아니에요. 좀 아슬아슬해요. 하지만 제가 한번 잘 뽑아볼게요."



의사 선생님 뒤로 후광이 비쳐 보이는 대사였다.



 마취를 해놔서 사랑니를 뽑는 게 아프지는 않았는데 그 행위 자체가 충격이었다. 내 입 속이 광산이 된 듯한 느낌.... 찢고 부시고 캐내고. 탕탕탕 두드리고 힘을 줘서 뽑아내고. 두려움에 정신을 거의 반쯤 놓고 '나는 광산이다..'라는 생각을 하며 에프엑스의 '첫 사랑니'를 머릿속으로 몇 번 반복할 때쯤 수술이 끝났다.  시계를 보니 딱 15분 걸렸더라. 사랑니가 꽤 많이 썩어있기 때문에 그만큼 빼고 나서도 아프고 부을 거라 하셨다. 턱 신경이 마비되고 어금니도 같이 썩어 뽑아버리고 임플란트를 해야 하고 균이 퍼져서 감염되고 어쩌고 저쩌고를 상상했던 나에게 통증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아무것도 아닐 줄 알았다.



병원에서는 처방전을 주며 2시간 뒤에 거즈를 빼고, 죽을 먹고, 식후 30분 뒤에 약을 먹으라 하셨다. 진통제 더 먹어도 되냐니까 이 약을 먹고도 아프시면 먹으라 했고. 하지만 나는 이를 빼러 가기 전 블로그로 사랑니 발치 후기를 정말 많이 읽었는데 그중 어떤 분이 그랬다. 사랑니가 썩어있다면 마취가 풀리기 시작하면서 정말! 정말 아플 테니 나오자마자 타이레놀을 드시라고. 역시나 겁이 많은 나는 예방차원에서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타이레놀을 한 알 삼켰고.. 집으로 돌아가는 지하철에서 겁이 많은 나를 칭찬했다. 마취가 살짝 풀렸는데도 수술 부위가 아프기 시작했다. 약 안 먹었으면 어쩔 뻔했어. 



진짜는 집에 도착하고나서부터였다.



거즈를 2시간 물고 있으라 했지만 거즈가 닿는 것조차 너무 아파서 도저히 물고 있을 수 없었다. 얼음팩 찜질을 해도 아팠고 눈물이 났다. 결국 죽은커녕 빈속에 또 약을 먹었고 다행히 시간이 지나니 약이 돌면서 괜찮아졌다. 나중엔 멀쩡해져서 죽도 맛있게 잘 먹었다. 오늘 아침에는 또 아팠지만. 빈속에 약을 먹기는 그래서 아몬드 브리즈 한 팩 마시고, 약을 먹었더니 통증이 다시 가라앉았다.  



사랑니 네가 대체 뭔데....

어제 뽑은 사랑니를 보여주시며 사진을 찍어도 되고 갖고 가셔도 된다 했지만 나는 쳐다보기도 싫어서 괜찮다 하고 그냥 나왔다. 그냥 갖고 올 걸. 집에 두고 하루 종일 째려보고 싶은 심정이다.

사랑니 네가 대체 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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