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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포트와 리포터

직장인의 바람직한 글쓰기

신입사원 시절 오후에 지시를 받으면 밤새 리포트를 작성해서 다음날 아침 출근하기 전에 초안을 책상 위에 올려놓았던 철없던 시절이 있었다. 그 결과로 리포트를 쓸 수 있게 되었다. 말하자면 우공이산(愚公移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10,000시간의 법칙을 믿는다.


내가 쓴 리포트를 읽은 분들의 반응은 크게 세 가지였다.

(1) 그래서 결론이 뭐야? 하고 싶은 얘기가 뭐야?

(2) 무슨 말인지 잘 모르겠다.

(3) 맞춤법 좀 챙겨라. 용어가 중요한 거야.

모두가 10,000시간 동안 나를 키워준 것들이다.


그런데 이제 되돌아보니 리포트의 핵심은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에 있는 것이고, 결국 보고를 받는 사람에 달려있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말하자면 보고를 받는 사람이 지혜롭다면 굳이 리포트가 멋질 필요는 없을 것이다. 원석 그대로의 메시지를 재빨리 전달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래서 적절한 피드백을 반영하여 제대로 된 리포트를 작성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반면에 설득해야 할 경우라면 제대로 된 기획서가 필요하다. 근거 자료까지 완벽하게 준비해서 흠잡을 곳이 없어야 한다.


내가 겪었던 최고의 사례를 소개한다.

당시 경영전략본부장이던 그분은 외부 발표자료를 사원인 내게 부탁하곤 했다. 나는 최선을 다했고, 매번 단 한 번에 무수정으로 통과되었다. 어느 날 협회에서 PPT 발표를 하는 자리에 그분의 지시로 참석을 하게 되었다. 발표를 보면서 나는 놀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리포트 중간중간의 단어와 문장을 이어가면서 발표를 했는데, 발표 내용에 비추어 내 보고서는 너무나 부실했고 엉성했던 것이다. 도대체 왜 부실한 리포트를 받고도 수정하라고 지시하지 않았을까? 아마도 그분의 수준에서 내 리포트 정도면 충분했기 때문이리라. 발표를 끝내면서 나를 보고 싱긋 웃던 그 모습에서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분명히 느낄 수 있었다. "어때? 앞으로 리포트 작성하는데 도움이 되었지?"


지금까지 경험에 의하면 리포트를 읽는 마지막 사람은 논리 정연한 완벽한 보고서가 아니라 시의적절한 메시지를 전달받기 원했던 것 같다. 예컨대 손으로 몇 자 적어 헐레벌떡 들어가서 상황과 핵심 이슈를 보고하면서 앞으로 검토 방향을 얘기하면 충분히 납득할 분들이었다. 실무자를 데리고 가서 얘기를 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을 느끼거나, 혹은 그렇게 보고하는 직책자를 무능하다고 생각하는 분도 아니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서 실무자의 리포트 초안을 읽고는 오자나 탈자나 맞춤법을 얘기하는 것은 답답하다. 빠뜨린 메시지가 없다면 재빨리 보고해서 피드백을 줘야 한다. 수차례 수정을 해서 겨우 통과를 했는데, 보고 단계마다 또다시 수정이 되고, 그런 과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보고가 완료된 후의 리포트에 처음 메시지가 사라졌거나 왜곡되었음을 본다면 참으로 허무하다. 실무자에 대한 예의도 아니다.


멋진 기획서를 작성할 수 있으면 좋다. 그러나 멋진 기획서를 작성하느라 보고 시기를 놓치면 나쁜 것이다. 만약 보고자가 스스로 돋보이기 위해 치장을 하느라 보고 시기를 놓친 것이라면 더욱 나쁜 것이다.


실무자 시절에는 10,000 시간의 법칙을 믿고 열심히 글을 쓸 수 있어야 한다. 이제 직책자가 되어 리포트를 받는 입장이 되면 되면 리포트에 얽매일 것이 아니라 시의적절한 메시지 관리를 해야 한다. 말하자면 리포터가 되어야 한다. 실무자로부터 최대한 빨리 메시지를 받을 수 있어야 하고, 그 메시지를 적절한 시점에 보고를 하고 피드백을 해야 한다.


실무자의 초안에는 리포터가 필요로 하는 메시지가 누락되지 않으면 충분하다. 그다음은 리포터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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