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달희 May 31. 2017

인간은 연속적인 존재인가?

생의 심리학 33_끝은 새로운 시작

   


우리는 매 순간마다 끝을 만나고, 또 새로운 시작의 길을 떠난다.
알지 못하는 세계로부터 알 수 없는 세계로, 끝없이. 
아직 알지 못함(未知, unknown)에서 이미 앎(旣知, known)으로,
그리고 이미 앎에서 아직 알지 못함으로의 움직임은
그 누군가가 깨닫게 되지 않는 한 영원히 계속된다.

-오쇼 라즈니쉬     


현생에서의 삶이 끝인가?

얼마 전, 풀리지 않는 관계에서의 갈등으로 가슴에 맺힌 화가 치밀어 밤잠을 한숨도 못 자고 아침 일찍 찾아온 내담자가 신체심리치료중에 왈칵 눈물을 쏟았다. 한참을 흐느끼고 난 뒤에 남긴 말이 내 가슴을 내내 벅차게 했다.     

"선생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닐 거예요. 제 생명의 은인이세요."     


그저 가슴 아픈 삶의 이야기 공감하며 잘 들어주고, 진심으로 아픈 마음 잘 아물어 성장과 치유로 이끌어 줄 수 있기를 바라며 몸을 통해 어루만져주어 한 소중한 생명을 살렸다. 삶에서 끌어안고 살아가야 하는 '아픔(苦)'이란 나눌 수 없기 때문에 더 고통스럽고 버겁기만 하다.     



삶을 살아가면서 우리는 이 세상에 존재하는 이유와 현생에서의 삶, 그 이전과 이후에 대해서 끊임없이 물으며 답을 얻고자 한다. 어찌할 바를 찾을 수 없는 답답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그러한 의문은 우리를 더욱 힘들게 한다. 왜 나의 삶은 이토록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왜 나에게 이런 고난이 닥친 것일까? 인간으로서 삶의 종말인 죽음 뒤에는 도대체 무엇이 있을까?      


진리에 대한 깨달음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하는 것이므로 말이나 글에 의지하지 않는 불립문자(不立文字)로 하나이다. 하지만, ‘존재함은 연속적인가’라는 물음에 대하여 말과 문자로 표현하는 인간의 생각은 제 각각이고, 인간 모두의 합의와 공감에 이를 수 있는 답은 안타깝게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것이다. 그래서 진리는 늘 신비의 장막 속에 있다.     


오래전, 불교에 대해서 공부하다 '윤회(輪廻)'에 대해서 토론이 벌어졌다. 그때 강사는 이렇게 마무리 말을 했다.      


“이 세상에 존재하는 것은 인과법(因果法) 안에 들어 있습니다. 창밖을 보세요. 말라버린 저 풀들이 이제 생명을 다했다고 보이지만 내년 봄이 되면 그 풀꽃들이 뿌린 씨앗들이 말라 없어진 그 풀 옆에 새싹으로 솟아 나올 겁니다. 진공청소기로 큰 먼지를 빨아냈다고 하지만 그 먼지는 미세먼지로 청소기 밖으로 나와 다시 큰 먼지로 뭉쳐집니다. 생과 사, 윤회란 그런 것 아니겠습니까? 업의 고리는……”    

 

그 이야기를 들으며 가슴이 시렸다. 아버님 임종을 지켜보아야 했던 그날이 생각나서였다. 그날, 20년이란 긴 세월 동안 투병하시던 사랑하고 존경하던 아버님께서 이 세상을 떠나시던 그 마지막 순간, 아버님께선 눈을 번쩍 뜨시며 필자를 지켜보셨다. 이 세상을 떠나시면서 이 세상의 모습을 담으시려던 그 마지막 눈맞춤을, 필자는 평생 잊을 수가 없다. 그 무언의 메시지를. 그렇게 한 생명의 끝을 마무리하던 마지막 장면에는 아버님과 살아남은 자인 그의 아들, 둘 만이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날은 필자 아이의 세 번째 생일날이기도 했다. 그렇게 한 생명의 끝은 새로운 생명의 시작으로 이어진다는 것을 스스로 보여주시며 세상을 떠나신 아버님이셨다. 그처럼 끝은 시작의 다른 이름임이 분명함을 삶의 인도자는 내 존재의 장 이곳저곳에서 보여준다.     


종교 밖에서 윤회에 대한 논의

요즘 몇 가지 영적 체험을 한 적이 있다는 한 분이 물었다.     


“영의 존재, 윤회 현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세요? 서로 다른 시공간에서 서로 다른 삶을 살아야 하는 인간은 연속성을 가진 존재로 봐야 할까요?”


그런 물음에 대해서 존재함의 여러 차원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도 마음으로부터의 ‘진실이다’라는 울림이 들리지 않았다.      


존재의 연속성이란 주제에 대한 논의는 여러 생에 걸쳐있는 하나의 존재, 우리 각각의 개체의 정체성에 대한 문제, 즉 윤회와 환생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로부터 비롯되어져야 한다. 입증 가능한 과학으로서의 학문 영역 안에서는 다루어질 수 없다고 생각해온 이러한 ‘존재함의 연속성’에 대한 이슈는, 종교적인 관점에서 잘 정리되어 있지만 누구나 공감하긴 어렵기만 하다. 불교에서는 욕망의 영역인 욕계(欲界), 형상이 있는 세계인 색계(色界), 형상이 없는 세계인 무색계(無色界)의 모든 번뇌를 완전히 끊어 열반을 성취한 성자 아라한(阿羅漢)이 되어야만 윤회의 수레바퀴에서 벗어날 수 있다고 한다. 존재로서 생명을 부여받고 순환하는 데 꼬리표처럼 따라붙는 카르마<karma, 업(業)>란 한없이 이어지는 생에서 우리가 짊어지고 풀어가야 할, 전생에 풀지 못한 매듭이며 실타래다. 이렇게 존재의 연속성을 언급할 때에는 그 대상인 한 개체, 특정한 정체성이 부여되는 자아(自我)라는 주체가 있다.      


종교적인 차원에서, 그리고 최면이나 이른바 영계 통신이라 할 수 있는 채널링(channeling)과 같은 방법으로 윤회와 환생을 밝히고자 하는 시도들은 많이 있다. 여기에 대해서 상세한 내용을 펼쳐보거나 그 증거들에 대해서 논박할 생각은 없다. 필자가 주목하는 윤회에 대한 두 가지 새로운 관점은 심리치료와 후생유전학이라는 분야다.     


심리학에서 신경증적인 심리상태와 불교의 윤회 개념을 비교하고 있는 인물은 미국의 정신의학자 마크 엡스타인(Mark Epstein)이다. 불교 상담학을 이끌고 있는 박찬옥 교수는 엡스타인의 책 <생각하는 사람 없는 생각들(Thought without a thinker)>을 빌어 ‘육도와 윤회에 대한 서양 심리학의 이해’를 이렇게 풀어냈다.  

   

“윤회의 본질은 고통이다. 그리고 육도(六道)― 불교에서 중생이 깨달음을 얻지 못하고 윤회할 때 자신이 지은 업(業)에 따라 태어나는 6가지 세계, 지옥도(地獄道) · 아귀도(餓鬼道) · 축생도(畜生道) · 아수라도(阿修羅道) · 인간도(人間道) · 천상도(天上道)―중생의 윤회하는 고통으로부터 해방은 ‘윤회하며 고통스러워하는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에서 출발해야 된다. 한편 서양 심리학의 관점에서 보면 육도의 중생을 특별한 장소에 존재하는 제각각의 생명체로 보기보다는 시시각각으로 변화하는 심리상태의 갈등을 표현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애욕에 가득 찬 마음의 상태는 축생도로, 피해망상과 공격성 그리고 불안은 지옥도로, 탐욕과 이기심의 상태는 아귀의 세계로, 경쟁심과 질투심은 아수라장으로, 자아도취와 자기중심적 사고는 인간의 세계로, 자기초월에서 오는 절정의 경험은 천상의 세계로 각각 대비될 수 있다.”     


서양에서 출발한 심리치료는 인간의 심리상태가 빚어내는 마음의 고통을 치료하는 것이 그 근본 목적이며, 불교의 가르침은 어떻게 하면 우리 인간이 윤회의 고통으로부터 벗어나서 마음의 자유를 얻는가이다. 윤회 개념은 인간의 모든 심리상태를 어느 한 가지 영역에 제한하지 않고 육도를 윤회하는 커다란 수레바퀴와 같은 것으로 이해하도록 도와준다. 그러한 ‘윤회하는 마음 상태로부터의 진정한 해방은 무엇인가’에 대한 답은 완전한 깨달음에 이르는 것이라면서 그 방법으로 명상법을 그는 제시하고 있다.      


내 삶의 체험은 세포에 새겨지고 있다

후성유전학(後成遺傳學, 영어: epigenetics) 또는 후생유전학(後生遺傳學)은 최근에 들어서 아주 활발하게 연구되고 있는 학문이다. 후생유전학은 생명이 DNA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양육과정과 환경에 의해서도 조절됨을 보여준다. 인간은 모두가 태초에 세포 하나에서 시작이 되는 순간부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이 세포의 각인(刻印)이라는 것이다. 그들은 나름대로의 의식들을 가지고 있으며 아주 오래된 고대의 기억을 저장하고 그 지혜라는 것을 후손들에게 물려주고 있는 것이다. 초파리 유전학 전문가인 김우재 미국 캘리포니아대학(UCSF) 박사는 <한겨레21>의 기고문(2010년 6월 3일자)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환경이 유전자에 흔적을 남기고, 그 흔적이 유전된다. 유전자는 환경의 흔적을 ‘기억’한다. 내 할아버지가 경험한 환경의 흔적이 나에게 유전된다. 1944년 네덜란드의 기근으로 인한 신생아들의 체중 저하와 당뇨병 증가는 인간도 후성유전학적 대물림에서 자유롭지 않다는 증거가 된다. 임산부의 행동 양식이 태아의 DNA 메틸화에 영향을 끼친다는 증거도 있다. 실제로 환경의 변화가 DNA의 메틸화에 영향을 끼치고, 그 영향력이 몇 세대에 걸쳐 대물림된다는 증거는 헤아릴 수 없이 많다. 그 작동 방식이 확실히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환경이 몇 세대에 걸쳐 생리 현상과 행동 양식에 영향을 끼칠 수 있는 가능성은 남아 있다.”     



환경변화에 적응한 선충류의 유전적 흔적은 14세대 대물림되었다.

신뢰도가 높은 과학학술지 <Science> 4월 21일 자에 ‘꼬마선충에서 환경 정보의 세대 간 대물림(Transgenerational transmission of environmental information in C. elegans)’이란 흥미로운 연구결과가 게재되면서 유전자는 환경 변화의 흔적을 기억한다는 확실한 근거가 제시되었다. 이 연구는 스페인에 있는 게놈 조절 센터(CRG), 요셉 카레라스 백혈병 연구소, 건강과학연구기관 IGTP의 과학자들은 선충류를 대상으로 실험한 것으로 선충류가 온도의 변화에도 발광하면서 환경에 적응하도록 했다. 이러한 환경적 변화의 흔적은 14세대에 걸쳐 대물림된다는 것을 밝혔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환경적 변화가 다른 동물들에게 어떻게 이어지는지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줄 수 있다고 연구진은 말한다.  


지금-여기에서의 삶에 충실하며 모든 순간에서 의미를 찾고, 보람된 생의 순간들을 채워가는 것에서 우리 자신의 현존, 그 실재에 대한 정체성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그러한 마음, 행동, 생각이 나의 모든 세포와 유전자에 새겨지면서 어제의 나는 소멸되고 오늘의 나는 진화하며 새롭게 태어난다. 그것이 생에서 맞는 윤회다.      

과거는 더 이상 여기에 없고, 미래는 아직 오지 않았다.
삶이 존재하는 오직 한 순간은 지금 여기에서 맞고 있는 바로 이 순간뿐이다.


매거진의 이전글 물방울 속에서 바다를 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