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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희 Dec 07. 2016

몸에서 속마음을 찾다

접촉의 심리치료 04_몸이 전하는 마음의 언어

내 몸을 내가 모르는 것 같아요

미국 나로파대학 교수인 신체심리치료사 크리스틴 콜드웰은 ‘신체심리치료는 인지적 통찰력으로 신체적 행태의 변화를 시도하는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top-down) 접근과는 반대되는 '밑에서 위로 올라가는(bottom-up) 접근’이라고 말하면서 그 기능을 이렇게 설명한다.

      

신체심리치료란, 자신의 몸에 주의력의 초점이 맞춰지고, 각성상태를 직접 조정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다. 그럼으로써 신체적 이완과 의식의 움직임을 통해 마음을 안정시키고 치유를 가능하게 하는 심리치료다. 가장 효과적인 치료는 지금-여기에서의 이 순간을 내담자가 직접 경험하고, 인지적 상태는 물론 몸의 상태를 알아차리고, 자아를 수용하고 내 안에 있는 사랑의 마음을 확인하고 키우며, 타인과의 관계에서 연결되어 있음에 가치를 두고, 삶에서 긍정적인 행위를 취하는 일을 포함한다.     


여러 상담가들을 거친 다음 내게 온 한 내담자가 ‘내 몸을 내가 모르는 것 같아요’라며 자신의 이야기를 꺼냈다. 그러면서 특징적으로 반복되는 자신의 행동과 몸의 통증을 언급했다.      


“양쪽 팔의 윗부분이 허전해서 저도 모르게 계속 쓸어주는 동작을 하게 돼요. 그리고 여러 사람들과 함께 하는 자리에서 갑자기 배가 많이 아파서 뒹굴다가 병원에 갔어요. 병원에선 아무 문제가 없다고 하더군요.”     


부모님은 얼마 전 이혼했다. 아버지의 불륜 때문이다. 장녀로서 뜻하지 않게 가장역할을 맡아야 했던 그이는 현실적인 부담을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웠다. 어머니는 외할머니로부터 제대로 돌봄을 받지 않은 것을 대물림했다. 아이였던 내담자가 엄마의 돌봄을 필요로 할 때 무시하고 회피했던, 접촉 결핍의 불안정 애착 체험은 내담자에게 끊임없이 주관적인 공허함을 느끼게 만들고 있다. 그리고 아버지에 대한 배신감만 있다면 좋겠으나 아버지에 대해선 사랑의 느낌과 추억들이 너무나 많아 두 가지 감정으로 혼란스럽기만 하다. 부모는 갈라섰으나 갈라서지 않은 채 내담자의 눈에는 경계가 명확하지 않아 더 혼란스럽다. 부모님의 이혼으로 애착의 두 대상으로부터 드러난 상실―엄마로부터는 사랑의 결핍, 아버지로부터는 박탈―에 대한 애도과정중이기도 하다. 그러한 상실감이 보살펴지지 못하여 애도반응으로 나타나는 왜곡된 정서가 그의 성격의 일부로 굳어졌다.


애도과정의 이런 혼란스런 단계를 애착이론의 존 볼비는 1)마비 2)그리움과 추구 3)혼란과 절망 4)재조직이라고 정리하고 있다.      

텅 빈 가슴을 채워주고 싶은 자기 위안 행동

부모로부터 신뢰를 체험하지 못한 내담자는 어느 누구에게도 믿음을 갖지 못한다. 그래서 내담자의 마음속에는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겠다.’라는 각오와 함께 타인과의 어울림이란, 그저 흔적으로만 남아있다.


텅 비어있는 가슴을 채우기 위해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자기 위안 행동인 자기가 자신을 쓸어주는, 자기 접촉 밖에는 없다. 그리고 혼자 애를 쓰며 열심히 살아보겠다고 노력하는 자신의 마음을 함께 해주며 고통을 분담해주지 않는 가족으로부터의 소외감이 자신을 너무나 맥 빠지게 만든다. 누군가로부터 다독거림을 받고 싶은 약한 자신의 본모습, 외로움에 고통 받는 자신의 속마음을 누구와도 털어놓고 나눌 수가 없다. 그러면서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는 늘 차가웠고, 또한 정작 자기 자신의 지금-여기의 느낌에는 접촉조차 하지 못하고 있다.


‘내가 안전하기 위해선 느껴선 안된다’는 것이 이 사람이 살아남기 위한 자기 삶의 규범이며 그의 유일한 자기방어수단이다. 이 세상에서 아무도 나를 돌보아줄 사람은 없다고 말하는 내담자는 ‘공허함’을 반복해서 말한다. 타인과의 접촉을 회피하고 있고, 느낌을 찾지 못한다며, 자기 내면의 어떤 부분에 접촉하기를 두려워한다. 그것을 ‘혼란스럽다’고 표현한다. 또한 자신이 너무 부족하다고 자기 비난을 한다. 대학원을 마치고 전문직을 가지고 있는 그녀인데도.      


초기 단계의 세션에선 지금 느낌을 묻는 상담자의 말에 습관적으로 “그냥, 모르겠어요.”라며 자기와의 직면을 회피하는 저항을 보였다. 하지만, 이윽고 혼란의 마음은 가라앉고 “가슴에서 뭔가가 스윽 올라왔다 사라지곤 한다.”“내 안에서 일어나는 느낌을 약간 알게 된 것 같다.”고 하면서 국면의 대전환이 일어났다.     


양쪽 윗팔이 허전해서 쓸어주어야 했던 반복적인 행동과 배의 통증도 멈췄다. 그러면서 “아마도 제가 누군가에게 안기고 싶어서 그랬나 봐요.” 했다. 누군가로부터 사랑받고 싶은 마음이 팔과 가슴의 허전함으로, 채워지지 않는 사랑의 욕구는 배의 통증으로 드러난 것. 게슈탈트 심리치료에선 이러한 행동을 접촉경계 혼란 행동 중의 하나로 ‘반전(retroflection)’이라고 한다. 다른 사람이나 환경에 대하여 하고 싶은 행동을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 혹은 다른 사람이 자기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행동을 스스로 자기 자신에게 하는 것을 말한다.     

 

“어릴 때, 내가 아프다고 하면 아버지는 화를 내셨어요. 어느 날 내가 배가 아프다고 약을 좀 사달라고 했는데, 아버지는 그러겠다며 나가셔서 안 들어오시는 거예요. 아마 잊어버리셨나 봐요.”     


내담자는 담담하게 이렇게 말한다. 그리고 내가 뭘 잘 못했었나 봐요. 다른 집 아버지들도 다 그런 것 아닌가요, 하고 반문한다. 그 뒤로는 아파도 아프다는 말을 해본 적이 없고, 아파도 혼자 끙끙 앓기만 했다는 내담자.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는 답답한 상황에선 늘 배가 견딜 수 없이 아팠다. 이 내담자는 신체작업을 할 때면 마치 아기가 된 것처럼 재미있다고 히죽거리기도 하고 두 발을 모아 끌어안고 흔들거리면서 마치 다시 어머니의 자궁 안으로 들어가 태내 아이가 된 듯한 행동을 보였다.   

    

몸이 전하는 마음의 언어

스트레스에 대한 인간의 반응으로 싸우거나 도망가거나(fight or flight) 그럴 수 없을 위협적인 상황일 때에는 얼어붙는다(freezing). 이는 맹수의 추적을 피하려고 애쓰다 더 이상 피할 수 없는 상황일 때 나타나는 동물의 반응과도 같다. 이럴 수도 저럴 수도 없다고 판단되어서 본능적으로 얼어붙어있을 때, 인간은 동물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몸과 마음으로부터 벗어나 무감각해진다. 지금-여기에 존재하는 자신의 몸의 상태를 알지 못하며 살고 있다는 것은 자기 삶의 매 순간마다 살아있음을 느끼지 못하고 있다는 말과 같다. 이런 이들의 삶은 의미가 없어 공허하고 삶의 목적이 없으니 몸과 마음이 어디를 향해야 하는지 방향성을 잃어 길을 잃고 헤매게 된다.

     

마음의 불편함이 몸을 통해 나타내는 현상을 심리학에선 ‘신체화 somatization’라고 한다. 그런 경향성을 가진 이들은 타인과의 관계와 소통의 장에서 가슴의 문을 꼭 닫고 몸과 머리로 반응하며 서로 다른 신호로 메시지를 내보낸다. 그러한 신호를 따라가보면 핵심정서와 만나게 된다. 길던 짧던 우리 모두가 지나쳐온 삶의 여정을 돌아보면, 여러가지 사건들과 복잡한 인간관계 속에서 비롯된 크고 작은 마음의 상처들이 흔적으로 남아있게 마련이다.


치유되어 아물지 못한 그런 상처들은 고스란히 우리의 무의식과 몸의 어느 부위에 깃들어 웅크리고 있다. 그 핵심정서는 명확하게 측정할 수 없는 불편함과 통증과 온갖 '부정적인 언어'들로 자신의 존재를 틈날 때마다 몸을 통해 의식세계로 드러낸다. 더 아플까봐 더 상처받을까봐 더 버림받을까봐 두려워하며 경계하는 마음으로 자기를 방어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들을 살아남을 수 있게 만들어준 그들만의 생존방식이다.      


몸의 어느 부위에서 지속적으로 드러나는 통증, 자기 의도와는 달리 반복적으로 나타나는 습관적 행동 또는 동작 패턴, 몸을 자유롭게 기능하는데 특정한 불편함은 그들의 몸이 전하는 마음의 언어다. 사랑받고 싶고 소통하고 싶고 살고 싶다는 이들의 메시지에 따뜻한 사랑의 손길로 그 두려움, 외로움, 불안, 아픔을 이해하고 공감하고 있다는 마음을 전한다. 그런 공감의 손길과 사랑나눔의 몸짓을 내담자들은 단박에 알아차다. 경계와 두려움의 긴장을 풀고 느슨한 몸과 마음의 상태가 되면 무의식에 자리 잡고 있으면서도 그 존재를 명확하게 드러내놓지 않고 응어리진 채 꼭꼭 숨어있는 마음의 문제들이 슬그머니 의식의 문틈으로 모습을 살짝 드러낸다. 그처럼 무의식의 문이 열리면서 마음의 그늘에 밝은 빛이 들어오게 되면 깊은 마음속에 숨겨두었던 나만의 내밀한 문제들은 더 이상 내밀한 것이 아닌 게다.


자신이 바라보기 두려워 덮어두고 숨겨두었던 풀지 않은 정서와 마음의 상처들이 떠오른 것을 바라보며 ‘그것이 내 마음속에 있었네’ 스스로 명료하게 알아차린다. 마침내 몸과 마음의 두터운 방호벽들은 무너지고 마음의 문이 활짝 열리게 된다. 우리 마음의 고향과도 같은 어머니 품안과 같은 근원의 평온함을 체험하면서 말이다.      

고통이란 존재했다가 사라질 수 있는 것임을 알아차리며, 현재의 나는 상처 입은 과거의 나와는 다름을 깨달으며, 과거의 아물지 않아 고통을 주었던 지금 내 마음의 상처를 아물게 하여 자유롭게 하는 치유의 스위치는 바로 내 의지 안에 있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이처럼 존재하는 것과 존재하지 않는 것을 하나씩 깨닫게 되면서 치유의 매듭풀기, 그 여정은 끝이 나게 된다.


_()_모든 고귀한 존재들에게 축복있기를.


Ladies in Lavender- Joshua Bell

 https://www.youtube.com/watch?v=c4RIPjk6Jh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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