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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희 Dec 11. 2016

잘못된 접촉이 만든 매듭,
접촉으로 풀다

접촉의 심리치료 08_마음의 불덩이 이별의식

     

우리 삶을 통한 모든 체험은 그대로 몸에 체화(體化)되어 남아있다.
우리 몸은 어떤 충격적인 체험에 대한 반응을 함께한다.
우리 몸은 다시 그런 경험을 하고 싶지 않으므로
나도 모르게 성격에 드러나고 관계에서 반응한다.
긴장하고 있는 동안은 아픈 줄도 모른다. 아플 틈이 없는데 끝나면 아프다.
이완이 되면 어떤 고통이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공간이 생기므로
몸을 이완시키면 문제가 드러난다. 
―정신분석가 빌헬름 라이히(Wilhelm Reich)     


묻지 마 폭행으로 인한 PTSD

나의 칼럼 ‘화해와 용서는 불가능한가?’를 보고 정말 용서가 안된다고 그런 자신이 잘못된 건가 묻는 이가 있어서 이렇게 답했다. 


“아마도 아직 그 대상에 대한 분노를 내려놓고 용서하실 때가 아닌 게지요. 하지만 언젠가, 자기 내면 또는 어딘가로부터 무슨 응답이 있겠지요. 그래야 할 때가 되었다라는 외침이 내 안으로부터 들릴 때가 있을 겁니다. 세상의 모든 것들이 서로 연결되어 있는, 인드라망 위에 내가 존재하고 있음을 알아차리는 그때를 언급하고 있는 겁니다.”


세상을 살면서 우리는 너무 뜻밖이어서 기가 막히는 듯한, 정말 어처구니없는 일들을 많이 당한다. 분노 유발자는 분명 있으나 그 대상이 명확하지 않거나, 그것이 내가 감당하기에는 너무 벅차고 힘이 들어 어쩔 수가 없는 덩어리일 때에 혼란에 빠지는 경험들 말이다. 분노가 머리끝까지 차올라 원망의 불길 한가운데, 그 감정의 소용돌이, 혼돈 속에 있는 이의 귀에는 용서와 화해란 들리지도 않을뿐더러 스스로 깨닫고 실행할 수도 없는, 어림도 없는 말일뿐이다.      


내 의지와는 아무런 관련 없었던 단 한 차례의 ‘잘못된 접촉’으로 마음의 매듭이 단단히 맺혀 풀지 못하던, 스물세 살 젊은 대학생이 찾아왔다. 작은 체격에 윗몸이 발달한 그이는 첫 상담을 하는 동안 줄곧 굳어 있는 무표정의 얼굴로 불안한 듯 눈을 치켜들었고, 한 곳을 가만히 바라보지 못했다. 그리고 어깨 근육은 계속 실룩거리며 움직이고 있었다. 고등학교 때, 길을 가다가 느닷없이 낯선 사람들에게 집단폭행을 당했다고 담담하게 말한다. 이른바 ‘묻지마 폭행’의 피해자가 되었던 거다. 


그는 도대체 영문도 모르고 당해야 했던 그 사건의 부당성에 대한 억울함과 분노, 그리고 피해의식을 보상하기 위한 복수심 때문에 오랜 시간 동안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없었다. 그런 충격적인 사실을 처음엔 자신의 현실로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래서 무력감 때문에 한동안은 하루의 대부분, 무려 20시간을 잠만 잤다. 그리고 잠자는 동안 꿈속에서도 그랬고 깨어있는 동안에도 누군가가 자신을 또 폭행하려 할지도 모른다는 강박적인 생각에 대상이 분명치 않은 무의식 속의 가해자와 끊임없이 가상의 전쟁을 벌이느라 온몸 근육들이 쉴 틈 없이 꿈틀거리며 움직였다. 


눈을 뜨고 길을 가면서도 가해자를 찾아 복수하겠다는 마음으로 칼을 품고, 분노의 눈길로 사람들을 훑어보고 다녔다. 잠시도 분노의 감정을 몸과 마음에서 내려놓을 수 없었던 그에겐 늘 만성적인 피로감과 대인관계에서의 어려움이 사회생활에 큰 장애를 가져왔다. 다니던 고등학교도 중퇴하고 검정고시로 집을 떠나기 위해 서울에 있는 대학에는 들어갔지만 도저히 사람들과 어울릴 수 없었다. 정신과에 다니면서 오랫동안 약물치료를 했지만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


온전하게 받아주고 보듬어줄 '마음의 안전기지'

그런 그에게 지금-여기라는 시공간의 마당에서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안전함’과 ‘보살핌’이었다. 두렵거나 혹은 복수하고픈 대상으로부터 떨어져서 충분히 보호받고 보살핌을 받을 수 있는 ‘안전기지’임을 온몸과 마음으로 느끼게 해주는 것이었다. 어린 시절 어떤 고통스러운 일을 체험하고 돌아와 토닥여주는 어머니의 품에 안겨 한참 울 수 있었던 어머니의 품과도 같은. 신체 작업으로 몸과 마음을 이완시켜 안도감과 편안함을 느끼게 했다. 

그런 다음 마음속에서 떠오르는 생각들과 느낌을 말로 표현하도록 했다. 억울함과 분노와 원한의 감정이 피처럼 섬뜩하게 묻어, 마치 시퍼렇게 날 선 칼날처럼 날카롭게 느껴지는 언어들이었다. 그때 그 자리에서 아무도 자기를 지켜주지 못했고, 부모님마저도 보듬고 돌보아주기는커녕 ‘사내 녀석이 그런 일로 약한 모습을 보이냐’고 나무라기만 했다.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많았는지 몇 차례의 만남으로 이야기는 길게 이어졌다. 다 들어주었다. 그 억울했던 자기 내면의 소리들을 온전하게 받아들여주었다. 판단과 비평과 비난이 없는 무조건적인 수용이며 공감이 그에겐 필요했던 거다. 말은 지금-여기에 머물면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준다. 


누군가에게 털어놓기 어려웠을 그 이야기들을 듣고, 그에게 다가갔다. ‘견디기 힘들었을 텐데 정말 애 많이 쓰며 잘 견뎌왔다’고 등을 토닥여주고 안아주었다. 그때 그에겐 자신의 억울한 심정을 온전하게 받아주고 보듬어줄 ‘누군가’가 필요했다.       

 

“그날 이후, 제 가슴 한가운데에 늘 커다란 불덩어리가 활활 타고 있는 것 같았어요. 그런데 선생님의 손길이 와 닿으면서 그 불이 어느 날 스스륵 꺼졌어요. 용서라는 것은 제가 그들을 그대로 복수해주지 않는 한 있을 수 없다라고 생각했었는데 오늘은 ‘이제는, 용서한다’라는 말이 떠오르는데요.”


용서라는 말을 꺼내면서 부정적인 정서의 악순환의 굴레로부터 벗어나기를 스스로 선택할 그이의 모습에서 진정성이 느껴졌다. 진정한 용서는 어디에 존재하는지 모르는 대상과 화해가 없이도 일어나며 무조건적이다. 어느 누가 강요하지도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안도의 한숨을 깊게 후욱하고 내쉬는 그이의 얼굴은 정말 평화로왔다. 


몇 차례의 치유작업을 거치면서 상처받은 채 그때 그 아이로 내면에서 머물고 있던 그이가 훌쩍 성숙한 듯 편안해 보였다. 그는 자신의 지나온 삶과 참된 자기와 주변 사람들을 돌아보았다. 사고의 순간, 이미 잃어버렸고 자신 안에서 이젠 없어졌다고만 생각하던 자기존중감과 삶에 대한 의욕을 갖게 되면서 여자 친구도 생겼다. 또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현실로 다시 복귀할 수 있었다. 


자신의 의지와는 달리, 또한 예측할 수 없었던 공격적이며 폭력적인 접촉이 한 사람에게 남겨준 굵은 매듭을 건강한 접촉 행위가 풀어주었던 사례였다. 말과 약물로도 치유하기 어려웠던, 깊은 마음의 상처를 신체적인 접촉으로 다가가서 다독이며 위로와 위안으로 아물게 해 주고 마음에 새 살이 돋아나게 했다.  

   

마치 생명체와 같은 마음속 불덩어리

마음의 병이 되어버린 잘못된 접촉, 차라리 경험하지 않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접촉의 체험들이 요즘 우리 일상에서 많이 있다. 정신적으로 충격을 준 사건으로부터 비롯된 장애를 ‘외상 후 스트레스 장애(PTSD, Post traumatic stress disorder)’라고 부른다. 충격적인 사건을 경험하고 난 다음 불안상태가 지속되어서 일상생활에서의 어려움을 겪게 되는 정신적 장애다.   


이 내담자의 가슴에 맺혔던 ‘화’ 덩어리의 정체는 ‘억울하고 분한’ 생각과 감정을 담고 있는 ‘마음의 고통’이었다. 분노 증후군이라고 말하는 마음의 화는 마음과 몸에 고통을 주고, 생각과 감정과 행동을 부정적인 방향으로 몰고 가서 점점 우리 자신을 파괴하게 만들 뿐만 아니라 인간관계와 현실 생활에 큰 장애를 가져온다. 화를 풀면 될 텐데 왜 그게 잘 안되어서 ‘화병’이 되는 걸까. «화가 풀리면 인생이 풀린다»라는 책을 낸 틱낫한 스님은 ‘화는 살아있는 생명체와도 같다’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마음속의 불덩이를 어떻게 다루어야 할는지에 대한 답이 여기 있다.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와 같이! 


이 칼럼의 맨 앞에서 언급한 빌헬름 라이히의 말과 같이 이완이 되면 어떤 고통이든 감각적으로 느낄 수 있는 ‘느슨해질 수 있는’ 공간이 생기므로, 몸을 이완시키면 문제가 드러난다. 그것을 전체적인 관점에서 알아차리고 내가 관찰자가 되어서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마치 생명체와도 같은 화’의 치유는 나 혼자가 아닌 너와 나가 상호작용하는 관계 속에서 이루어진다. 나를 사랑한다 혹은 나를 이해하고 인정해 준다는 느낌이 들 때 치유가 일어나는데 이는 매우 중요한 부분이다. 사랑과 공감은 말보다는 신체적인 표현과 접촉 등의 비언어적인 의사소통의 경로를 통해서 그 진정성이 감지된다. 


사랑과 공감은 머리로 하는 논리적 이해가 아닌 가슴으로 하는 감성적 이해이며,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파동의 동질성을 함께 공유함으로써 이루어지는 것이다. 신체심리치료와 같이 건강한 관계 속에서 따뜻한 사랑과 공감의 소통을 가능하게 하는, 접촉을 통한 새로운 치유적 접근들이 동서양에서 함께 시도되고 있고 많은 성과들을 보고하고 있다.


마음의 불덩이를 건강한 이별의식을 통해 잘 보내고, 부디 생각의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자유롭게 살 수 있게 되기를 진정으로 바란다.



Dire Straits - Brothers in Arms

https://www.youtube.com/watch?v=Dqok5m4lqe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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