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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달희 Jan 27. 2017

삶의 고통과 '의미'에 대하여

생의 심리학 21_생의 한 가운데에서

"쾌감의 결여가 곧 삶의 의미를 박탈을 뜻하는 것은 결코 아니며, 괴로움이란 거기에서 의미를 발견하는 순간 어느 면에서는 이미 괴로움이 되지 않는다.”
―실존분석, 의미요법의 창시자 빅토르 에밀 프랭클(Viktor Emil Frankl). 나치 정권에서 유태인 강제수용소인 아우슈비츠에 수용되어 있다가 살아남아 <죽음의 수용소에서>란 책을 냈다.

인간의 존재함은 고귀한가
심리상담과 신체심리치료를 하고 있는 내 센터를 찾아오는, 몸과 마음의 불편한 내담자들의 주된 호소는 ‘삶이 왜 이렇게 힘들고 괴로운가’라는 내용이다. 그들의 몸과 마음의 근원으로부터의 상처와 고통을 어루만져 다독여 주고 난 다음 치유에 도움이 되는 책을 한 권씩 선물로 주곤 한다. 책을 그의 손에 들려주기 전에 나는 책표지를 열고 빈 면에 이렇게 써준다.
   
당신은 고귀한 존재입니다
  
상처받은 몸과 마음의 고통으로부터 세상을 원망하고, 존재의 의미와 이유를 외면하고 싶었던 그들은 팽팽하게 자신을 옥죄던 고통의 속박으로부터 느슨해진 상태에서 이 한 줄의 글을 통해 자신을 돌아보게 된다. 단지 그 한 줄의 글 뒤의 담긴 자기 존중의 메시지에 그만 눈물을 주르륵 흘린다. 그 순간은 온전한 자기를 바라보는, 순수의 시간이다. 자신의 삶에서 잠시 기쁨으로 충만한 지복至福의 순간을 느끼는 그때 삶에 그 고통은 내게 어떤 의미인가 돌아보게 된다.

우리는 그렇게 고통을 통해 삶의 의미를 찾기도 하고 많은 것을 배우며 삶의 패러다임을 바꾸어간다. 사람의 온전하게 건강한 삶이란, 개체로서 한 인간의 몸과 마음, 그리고 영성의 모든 요소가 잘 균형 잡혀 조화로운 상태, 그러므로 지금 여기 매 순간이 지복의 순간이므로 거부할 수 없는 고통마저 의미 있는 삶의 현상으로 받아들이는 상태다.

하지만 고통은 결코 기쁨과 함께하는 유쾌한 체험이 아니다. 고통은 우리의 삶에 왜 존재하는 것일까. 고통에 대한 개념적 정의는 백과사전(두산)에서 이렇게 언급하고 있다.

고통(苦痛, distress)이란 몸이나 마음이 괴롭고 아픔을 말한다. 고통이란 피부나 신체의 아픔을 느끼는 감각인 통각(痛覺)에 의한 불쾌 감정과 구별되는 생리학·철학적 용어로 행위 주체의 감각(pathos) 또는 감정의 극단적인 불쾌감을 말한다. 그리스 쾌락주의 철학자인 아리스티포스는 고통을 ‘감각의 순간적 불쾌’라 하여 쾌락과 대립시키는 개념으로 말하였다. 이에 반해 에피쿠로스는 고통을 ‘감정의 불쾌’라고 보고, 이를 감소시키거나 이로부터 해방되는 것을 쾌락이라고 주장했다. 고통은 슬픔·욕구불만·갈등 등의 상태로 표현되고, 대부분 심리적 원인에서 생긴다.

이를 보면, 고통에 대한 접근 채널은 생리학적, 심리학적 그리고 종교를 포함한 철학적 접근이 가능하다는 의미다. 인간이 겪을 수밖에 없는 고통이란 현상에 대해서 포괄적인 조망을 할 수 있는 흥미로운 장면을 떠올려 본다. 우리나라 통합의학의 선구자라고 할 수 있는 전세일 박사 등 몇 분이 낸 책 <새로운 의학, 새로운 삶> 서문에서 좋은 예를 발견했다. 병원이란 창을 통해 고통의 장면을 전세일 박사는 이렇게 바라본다.  


사람을 괴롭히는 감각 중에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가장 두려워하는 것은 ‘아픔’이다. 그런데 아픔이라는 것은 우리가 떼어놓을 수 없는 생활의 일부이며, 생명현상의 일부이기도 하다. 이 세상의 삶이란 실제로 괴로움(苦)과 아픔(痛)으로 특징지어지는지도 모르겠다. 종합병원에는 많은 사람들이 항상 모여서 웅성거리는 곳이 두 군데 있다. 하나는 신생아실이요, 또 하나는 영안실이다. 신생아실은 이 세상으로 새로 오는 손님들을 맞이하는 장소요, 영안실은 이 세상을 떠나는 손님들을 배웅하는 곳이다, 신생아실 주변의 모습은, 이 세상으로 오는 사람은 울고, 창밖에서 이들을 맞는 사람들은 웃는다, 반면에 영안실의 모습은,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들은 편안해 보이는데 이들을 보내는 사람들은 울고 있다. 이 세상으로 오는 사람은 울고 이 세상을 떠나는 사람은 편안해한다면 이 두 장소는 이 세상이 고통스러운 곳이라는 사실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게 아닐까.


이처럼 병원에서 대비되는 사람의 생애 주기의 두 극단에 맞춰지는 장면들을 통해, '고통'이란 현상의 체험으로부터 우리 인간은 벗어날 수 없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고통’이란 키워드를 통해 지난 세월 동안 겪어온 고통의 현상들을 다시 떠올리면 생각은 삶의 허망함으로까지 발전한다.


주변을 돌아보면, 왜 저렇게 아파해야 하며, 왜 저렇게 사람이 제 뜻대로 안 풀릴까 싶은, 정말 안타까운 삶을 살아야만 하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자신의 삶에서 겪는 고통을 똑같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인간이 삶에서 직면하는 고통은 다차원적이며, 자신이 처한 환경, 신체와 자아의 상태, 이전의 체험을 통해 누적된 정보들에 따라 심리 내적인 처리 과정을 거치게 되므로 객관적인 측정치로 드러낼 수 없다.
   
인간이 느끼는 괴로움은 동물과 다르다
모든 동물은 '감각으로서의 통증'만 지니고 있어서 '아프다'라고만 느끼지 '괴롭다'라고 느끼지는 않는다고 한다. 맹수에게 잡힌 짐승들은 잡아먹히는 그 순간에도 괴로워하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오직 사람만이 생리적 감각 이상의 통증으로 고생한다. 사람은 질병의 전조로서의 경보이거나 증상의 발현으로, 그리고 생리적 감각정보의 전달로 통증으로서의 고통을 느끼고, 심리적 괴로움으로 고통받고, 사회적 기능의 상실로 고통을 받는다. 인간으로서 직면할 수밖에 없는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차라리 동물의 삶을 선택하겠다고 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듯하다.

인간의 삶에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과연 세상은 어떻게 변해 있을까. 고통이 존재하지 않으므로 해서 그 대칭점에 있는 행복과 기쁨이란 정서에 대한 체험도 없을 것이며, 고통의 맥락 위에 있는 슬픔, 분노, 미움 등의 부정적 정서도 고통과 조합되지 않으니 한결 둔감해질 것 같다. 고통이란 생리적 반응이 없으니 의사의 의료 행위가 필요하지 않을 것이며, 인간의 고통을 유발할 수 없으니 법과 윤리, 사회규범이 존재할 수도 없을 것이며, 존재하더라도 지금의 형태는 아닐 것이다. 의사, 약사, 심리치료사, 변호사, 판사 등등 지금은 선망의 직업군들도 필요 없어질 듯하다. 그런 맥락에서 만약 인간의 고통이 없어진다면 고통과 함께 없어질 직업군이 많을 것이며, 아예 인간의 생존방식과 사회 시스템의 모든 부문의 변화가 틀림없이 있을 것이다. 인간 실존의 고통마저 없다면, 종교도 필요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고통이 없는 삶이란 ‘인간’이라는 구성요소가 배제되거나 존재 형태가 바뀌게 될 아주 다른 차원의 존재 영역이다. 그것이 인간이 열망하는 '낙원'일까. 고통이 존재하지 않는 인간 사회의 모습을 상상해보니 마치 기계적인 부속품들의 조합으로서의 기능적 인간, 로봇이 떠오른다. 그런 모습에서 ‘인간미’와 ‘세상 살맛’‘사랑’을 느낄 수 있을까?

미국의 정신과 의사이자 신학자인 스캇 펙(Margan Scott Peck)은 베스트셀러인 그의 책 <아직도 가야 할 길>에서 이렇게 말한다.    


삶은 고통의 바다, 즉 고해苦海다. 이것은 삶의 진리 가운데 가장 위대한 진리다. 그러나 이러한 평범한 진리를 이해하고 받아들일 때 삶은 더 이상 고해가 아니다. 다시 말해, 삶이 고통스럽다는 것을 알게 되고 그래서 이를 이해하고 수용하게 될 때, 삶은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다. 왜냐하면 비로소 삶의 문제에 대해 그 해답을 스스로 내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삶이 어렵다는 이 쉬운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살아간다. 삶이란 대수롭지 않으며 쉬운 것이라고 생각한 나머지 살아가면서 부딪치게 되는 문제와 어려움이 가혹하다고 불평을 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존재는 서로 연결되어 있다. 그래서 우주와 나는 본래 하나이며, 그러기에 내가 살아가야 하는 이 세상에서 소중하지 않은 만남도, 가치 없는 생각이나 행위도, 어느 하나 의미 없는 상처와 고통도 없다. 그런 마음으로 매일 아침 새 날을 맞는다. 인간의 자유는 조건으로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조건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할 수 있는가 하는, '의미에 대한 선택의 자유'이니까.


이달희신체심리치료센터
http://somaticpsychotherapy.modoo.a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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