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이층버스 창가에서 바라본 잔상

ep.홍콩

by 이담록

속도의 도시에서 느린 나를 만나다

홍콩에 도착한 첫날,
나는 그 낯선 속도감에 금세 압도되었다.
공항을 나서자마자 들려오는 자동차 경적,
좁은 인도를 스치는 무수한 발걸음들,
간판과 불빛과 소음이
도시 전체를 재촉하는 듯했다.

나는 그 안에서
내가 서 있어야 할 자리를 찾지 못한 채
멍하니 흐름을 따라가고만 있었다.

그 순간의 나는,
여행자가 아니라 이방인이었다.




그날 오후, 우연히 이층버스를 탔다.
계단을 올라 2층 맨 앞 창가 자리에 앉자
도시와 나 사이에
유리창 하나가 생겨났다.

버스는 천천히 움직였고,
나는 비로소
내 속도로 홍콩을 바라볼 수 있었다.

창밖으로는
줄지어 서 있는 빨래들,
좁은 골목길의 간판들,
그 틈을 유유히 빠져나가는 고양이 한 마리.

홍콩은 여전히 바빴지만
내 시선은 그 속에서
조용히 멈춰 있었다.




버스가 도로의 곡선을 따라 움직이는 동안
나는 마음을 내려놓을 수 있었다.

창밖에는
가게 앞에 쌓인 박스,
모퉁이에 앉아 담배를 피우는 사람들,
벽에 드리운 햇살의 기울기.

누군가는 스쳐갈 장면들이
나에겐 오히려 깊이 머무는 순간이 되었다.

나는 그 도시를 걷는 것이 아니라,
그 도시를 바라보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트램이 지나가고
좁은 골목 어귀에서 익숙한 팝송이 흘러나왔다.

낯선 도시에서 만나는 익숙함은
이질감이 아니라
‘사이’를 만들어 주는 감정이다.

그 순간 나는
이방인이 아닌,
잠시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으로
조용히 받아들여졌다.

홍콩은 나를 알지 못하지만
나는 그 도시를
내 방식으로 이해하고 있었다.




사진도, 기념품도, SNS 포스트도 없었다.
하지만 그날의 기억은
오히려 가장 선명하게 남았다.

창문을 타고 흐르던 바람,
햇살에 반짝이던 간판들,
이름 모를 거리의 소리와 냄새.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지만
마음은 오래 머물렀다.




여행자의 메모

속도의 도시에서
나만의 정지 버튼을 찾았다.

그 하루는 짧았지만,
그 안에 머문 나의 감정은
가장 긴 여행이었다.

keyword
작가의 이전글아무 일도 없던 하루를 기억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