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도쿄
도쿄의 거리에는 수많은 이야기가 흐른다.
북적이는 신주쿠의 네온사인, 시부야의 인파 속 무심한 발걸음들.
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도쿄는 그 모든 소음과 번잡함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었다.
하루 종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그러나 그 자체로 선명했던 하루.
그날, 나는 도쿄의 한적한 골목을 걸었다.
오래된 목조 가옥 사이로 부드럽게 내려앉는 햇살,
창문 너머로 들리는 잔잔한 라디오 소리, 가게 앞에 웅크린 고양이 한 마리. 모든 것이 조용했고,
그 조용함이 마치 오래된 필름처럼 마음에 각인되었다.
시간의 흐름이 느려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한낮의 찻집에서 따뜻한 차를 마셨다. 유리잔을 감싼 손끝에 전해지는 온기.
찻잎이 천천히 우러나는 모습. 그 순간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창밖에서는 작은 나뭇가지 하나가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을 사소한 풍경이었지만,
나에게는 그 어떤 사건보다도 깊이 남았다.
그리고 길을 따라 무작정 걸었다.
유명한 관광지를 찾지도,
특별한 계획을 세우지도 않았다.
작은 서점에 들어가 낡은 책을 한참이나 들여다보고,
골목길의 작은 공원에서 벤치에 앉아 지나가는 사람들을 지켜보았다.
사람들이 남기는 흔적.
바람에 날리는 작은 종이 한 장.
골목 어귀에서 들리는 누군가의 웃음소리.
그것들은 다 지나가는 순간들이었지만, 어딘가에서 누군가의 기억이 되고 있을 것 같았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하루였지만,
그만큼 완전한 하루였다.
우리는 때때로 특별한 순간만을 기억하려 한다.
하지만 도쿄에서의 그 하루는 내게 가르쳐 주었다.
기억이란 거창한 사건이 아니라,
무심한 장면들이 차곡차곡 쌓여 만들어지는 것임을.
도쿄에서의 아무 일도 없던 하루.
그 조용한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흐려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또렷해졌다.
어떤 여행은 사진 속에서 빛바래지만, 어떤 여행은 마음속에서 더욱 선명해진다.
내게 도쿄는 후자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