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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따라온 냄새

ep.대만

by 이담록

타이베이에 도착한 첫날 밤,
나는 호텔 창을 열고 오래도록 바깥을 바라봤다.
어딘가 지친 듯하면서도 끈질긴 에너지가
도시의 공기 속에 섞여 있었다.
낮보다 밤이 더 선명했고,
간판은 아직 꺼지지 않았으며,
버스 소리와 오토바이 엔진,
그리고 그 모든 틈을 비집고 나오는
기름지고 뜨거운 음식 냄새가 있었다.

그 냄새는 낯설었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마치 과거의 어느 날로
순간이동이라도 되는 듯한 기분.
냄새 하나로 기억이 열린다는 말을
그날 밤 처음으로 실감했다.

다음 날 아침, 나는 어떤 방향도 정하지 않고
그저 발이 가는 대로 걷기 시작했다.
도심에서 조금 벗어난 좁은 골목.
아파트 벽엔 습기가 자욱했고,
창문 아래엔 식은 국수 국물이 남겨져 있었다.
누군가 갓 빨아 널어둔 수건과
바삭한 소리로 구워지는 전통 간식 냄새가
뒤섞여 나왔다.

그 순간,
잊고 있던 기억이 불쑥 떠올랐다.
어릴 적 외할머니 댁 골목.
장판 냄새, 된장국 냄새,
이른 저녁의 습기.
낮은 담벼락과 기울어진 골목길,
그리고 골목을 따라 걷던 내 걸음걸이까지
그대로 복원되듯 되살아났다.

나는 카메라를 꺼내 들었지만
막상 셔터를 누르지 못했다.
화면 속 장면보다
내 안에서 올라오는 감정이 더 진해서였다.
무언가를 찍기보다는
그 시간을 그대로 살아내고 싶었다.
렌즈는 순간을 담지만,
향은 시간을 끌어당긴다.

사진 속 장면은 쉽게 잊히지만
향은 어느 날 갑자기
마음을 건드린다.
나는 그 골목에서 그렇게
예고 없이 찾아온 나 자신을 마주하고 있었다.

그 골목은 조용했다.
그런데도 모든 감각이 또렷해졌다.
작은 선풍기 소리, 튀김 냄새,
아이들의 발소리,
그리고 내 안에서 깨어난 아주 오래된 나.

나는 그곳에서 오래 머물렀다.
사진도, 기록도 없이.
그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내 안에 들어온 과거를 천천히 만지고 있었다.
그건 추억이라기보다,
오랜만에 찾아온 진짜 나 자신 같았다.

그날의 대만은
풍경보다 냄새로 기억된다.
그리고 그 냄새는
지금도 가끔,
내 마음 어딘가에서 문을 두드린다.
기억은 흐려져도,
그 냄새는 선명하게 남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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